나는 비열한 게 아니고 음흉하다고!
내가 잘못하거나 실수할 때 이를 지적하거나 비판해주는 눈물나게(?) 고마운 친구와 지인들이 주변에 많다. 아니 이 사람들은 심심풀이로 그냥 날 물어 뜯는 건가 싶을 때도 많고, 서슬퍼런 눈빛으로 내가 잘못하길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일 때도 많다.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다. 덕분에 나는 오금을 펼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매일 오줌이 마렵다. 놈들 때문에. 이렇게 나는 점점 더 약한 남자가 되어가는 걸까?
그래도 괜찮다. 나도 그러고 싶으니깐. 나도 상대방의 실수와 잘못을 늘 기다리고 있으니깐. 하지만 난 이빨이 억세지 않아 물어뜯지 못할 뿐이다. 아닌가? 더 기분 나쁘게 침을 묻혔던 것 같다. 물리적 타격을 입히지 못한다면 정신공격으로 대체한다. 정신승리를 하려면 상대방의 정신을 공격하고 침범해야 한다.
이런 날이면 가파도로 떠난 철학자 경윤샘이 보고싶다. 누가 날 놀리거나 못살게 굴면 경윤샘한테 찾아가서 무슨 앞잡이 마냥 일러 바쳤다. 그리고 그것도 모잘라 동시에 애꿎은 경윤샘을 놀렸다.
나는 나를 구해주는 사람에게 보따리를 요구하는 것도 모자라 술도 요구하고 심지어 놀리기까지 한다. 조만간 경윤샘이 철학자로 큰 성취를 얻거나 해탈해버린다면 그건 전부 내 덕이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제법 고약한 면모가 있다. 그래서 나보다 어른스럽거나 건강한 사람들만 주변에 남아있고, 나보다 조금 나이가 많거나 비슷한 동년배들은 나를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나에게는 형이나 누나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천연기념물의 숫자만큼이나 적다. 하긴 나 같아도 나 같은 동생은 불편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제법 정의로운 면모가 있는게 나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많은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지, 나보다 젊거나 어린사람들한테는 꼼짝없이 당하는 경우가 많다. 강자는 놀리고 약자한테는 놀림당한다. 다시 생각해봐도 정의롭다.
어른들의 수양을 돕고 젊은 친구들의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주는 일들이 반복되다보니 어느새 내 주변에는 마음씨 좋은 어른들과 고약하고 괴팍한 동생놈들만 남아있다.
얼마 전 술자리에서 나보다 젊은 친구들 중 한명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형은 비열해"
"와~ 단어를 막 갖다 쓰네. 나 보고 비열하다니!"
나에게 비열한 인간이란 비겁하고 졸렬한 사람을 말한다. 와씨 어떻게 알았지? 티가 많이 나나?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비열한 사람 중에 나처럼 돈이 없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더 정확한 단어여야만 한다. 나는 이미 마음 속에 품은 더 적확한 나만의 단어가 있었다.
"나는 비열한 게 아니고! 나는 음흉한 거라고!"
깔깔 웃으면 다른 친구가 거든다. "그렇지~ 나경호는 음흉하지"
"맞아! 나는 음흉해! 음흉하다고오!!!"
황망하고 어이없어 하는 그 친구의 눈빛에 나는 이미 정신승리에 도취해 있었다. 물론 술에도 취해 있었고.
그런데 집에 돌아오며 곰곰히 생각을 해보니. 잠깐만. 나는 지금껏 살면서 음흉한 놈들 중에 나처럼 여자친구가 없거나 결혼을 하지 못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이럴 수가!
이런 경우가 다 있나? 남성호르몬이 과다하여 머리가 빠졌다면, 남성호르몬이 줄어들면 머리가 다시 나야지, 이 무슨 남성호르몬도 없는 대머리 같은 경우가 다 있단 말인가?
더 정확한 단어가 필요하다. 더 정확한 단어여야 한다.
덧) 비오는 날 대낮 어묵우동에 맥주
#음흉 #비열 #40대 #일기장 #대머리 #남성호르몬 #우동
나도 모르게 태그를 달고 있는데 이걸 검색의 신과 알고리즘의 신이 발견하면 키득키득 웃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