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경호 Feb 21. 2024

때때로 나는 코 고는 사람을 좋아한다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여기 숨을 쉬고 살아있드아아 으르렁드르렁"

편집증이 있는 40대 오빠와 분열증이 있는 20대 늦둥이 여동생



1.

엄마는 막내이모와 함께 큰 이모를 보러 바다 옆 당진으로 떠나고 나는 동생과 어김없이 저녁산책을 나갔다. 주엽역에 외롭게 서있는 백화점 10층. 안마의자에 앉아있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데 중간층에서 어느 가족이 탔다.


"오늘은 다행이네. 엄마가 옷을 많이 안 사서. 허허"


자상한 얼굴의  자상한 아버지가 자상한 목소리로 아내와 딸들에게 말한다. "어휴 오늘도 옷 갈아입느라 힘들었어." 딸 하나가 볼멘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고 가족들이 뭔가 아웅다웅하는 따뜻한 모습에 잠시지만 마음이 이상했다. TV속 화목한 가정을 현실에 옮겨놓은 듯 모습이, 누군가에는 별 일 아닌 풍경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분명 별 일 인 풍경일 테니. 슬쩍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동생의 얼굴을 봤다. 동생은 이 광경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2.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동생이 말했다. "오빠, 고기가 먹고 싶어." 나는 순간 흠칫했다. 오빠라니. 16살 차이가 나는 동생은 평소 나를 나경호라고 부른다. 나경호 일어나! 나경호 나가자! 이렇게. 그러다 기분이 나쁘면 야나경호!라고 부르는데 이 모든 건 아버지한테서 동생에게로 전승됐다. 덕분에 동네 동생들이랑 어린 친구들이 내 이름을 부르거나 낮잡아 부르거나 반말을 써도 나는 별로 저항감이 없다. 


대신 어른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반말을 쓰거나 함부로 이름을 부르는 건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적어도 호칭에 있어서는 강자한테 강했고, 약자한테는 늘 약했다. 무튼 오빠라니. 고기가 정말 먹고 싶었나 보구나. 그런데 아니 이것도 웃긴다. 누가 보면 고기를 안 먹이거나 안 사주는 줄 알겠네. '고기 먹을래'도 아닌 '고기가 먹고 싶어'라니. 무슨 에세이 제목인 줄 알았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처럼.




3. 

고기를 굽는 족족 동생이 다 먹어치우는 바람에 나는 몇 점 먹지도 못하고 밥을 볶는다. 파채와 마늘 편을 들기름으로 들들 볶고 파기름냄새가 알싸하게 나면 깻잎을 얇게 가위로 썰어 올린다. 불판 위에서 30년 된 곱창집 냄새가 난다. 대패삼겹의 화탕지옥에서 기름풍파를 이겨낸 팽이버섯과 노릇노릇 잘 익어 김치전 냄새가 나는 김치를 쓱 밀어 넣는다. 찬그릇에 남은 김치국물을 마시... 는 게 아니라 마저 넣는다. "김치가 곧 양념이다." 음식 하나 변변이 할 줄 모르는 K-아저씨들이 국이며 요리에 김치국물을 푸다닥 넣으면서 능글맞게 하는 이 말을 나는 좋아한다.



꾸덕꾸덕한 흰쌀밥을 야채들 위에 꾹꾹 눌러 편다. 냄새가 달아나지 않게. 마지막으로 김가루를 올리고 다 된 밥에 고추장은 뿌리지 않는다. 인생의 매운맛은 인생의 고소한 맛을 상쇄하니깐. 동생이 남긴 된장찌개를 곁들어서 맛있게 먹는다. 배불러하는 동생도 옆에서 수저로 거든다. 후후 호호 뜨거워하면서도 입을 쉬지 않는다. 입모양이 번갈아가면서 '오'와 '예'가 된다. 오예! 오예~!


가게를 나와 맞은편 편의점에서 시원한 바나나우유로 알싸함을 달랜다. 바람이 차지만 동생과 팔짱을 끼고 눈꽃을 맞으며 길 위에서 낄낄 웃었다. 짧고도 긴 시간을 거쳐 집으로 왔다.




4. 

동생 잠자리를 펴주고 눈을 감는 걸 보고 식탁에서 일을 시작한다. 식탁에서 작업을 하면 안방 문틈 사이로 동생이 자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가족들이 자는 걸 나는 유심히 지켜본다. '숨을 쉬고 있는 거 맞지?' 이러면서. 어린 시절의 나는 잠을 자다 벌떡 일어나서 방문을 열고 엄마가 숨을 쉬고 있는지 안 쉬고 있는지 확인한 후 다시 돌아가 잠을 청했던 기억이 난다. 잘은 모르겠지만 생계를 꾸리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까지 고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엄마의 삶이 어린 내 눈에는 위태해 보였던 것 같다. 


그래서 때때로 나는 코 고는 사람을 좋아한다. 코 고는 소리는 나에게 마치 우렁찬 생명의 찬가와 같다.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여기 숨을 쉬고 살아있드아아 으르렁드르렁"


엄마가 집에 무사히 돌아오는 걸 보고, 아버지가 집에 무사히 돌아오는 걸 본다. 그리고 마음을 놓고 나는 새벽까지 일한다. 남들만큼 살려면 남들보다 더 일찍 일어나고 남들보다 더 늦게 자야 한다. 고생스러워도 괜찮다. 나보다 더 고생하며 산 부모님도 계시니 앓는 소리는 부러 하지 않는다. 




5. 

나경호 일어나! 동생이 문을 열고 말한다. "어어. 그래. 일어나야지" 나는 깨우면 1초도 안 걸려 바로 일어난다. 부지런한 집안에서 태어나 아기 때부터 이불에서 뭉기적대는 걸 배우지 못했다.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고 이불을 갠다. 가습기를 끄고 화장실로 가 이빨을 닦는다. 물을 한잔 마시고 샤워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거나 식탁에 앉는다. 그런데 아니 이게 웬 전복. 광어로 만든 생선가스와 장어, 오징어튀김을 당진 큰 이모가 엄마를 통해 보냈다 한다. 전복이라니. 아침부터 이게 웬 복!



6. 

영원한 오늘이 다시 또 시작되었다.



#40대 #일기장 #편집증 #분열증

매거진의 이전글 동치미와 고구마로 만들어진 세포를 갖고 태어난 아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