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등려, 자색 등나무 집
차를 우릴 때 불쑥 시작되는 기억이 있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흘러간 하루에,
문득 오래전 장면이 잔 위로 겹쳐진다.
대만에서, 자매같은 내 친구 H와 함께
‘자색 등나무집’이라는 찻집에 갔었다.
꽃보다 느리게 퍼지는 향,
문인들과 사회 운동가들이 자주 찾는다는 예술적인 분위기.
그 시절의 우리에겐 조금 낯설고, 그래서 더 근사했던 공간.
다예사가 첫 잔을 우리며 시범을 보여주고,
그다음부터는 우리가 차를 내려 마셨다.
뜨거운 물을 따르고, 차가 우러나길 기다리는 시간.
찻주전자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잔에 천천히 따르며 친구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술잔을 주고받는 사람들 같다고,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던 순간.
이전에도 좋은 차를 자주 접했던 탓인지, 비싼 가격에 비해 놀라운 맛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차를 좋아하게 된 계기’를 생각하면
자꾸 그날이 먼저 떠오른다.
찻집을 나오며 우리도 언젠가 다도를 연마해 좀 더 고상한 사람이 되자고 다짐했던, 20대의 H와 나.
훗날 둘 다 티마스터가 되었으니, 그 다짐을 제법 잘 지킨 셈이겠다.
보라빛 등나무꽃의 향처럼
그 기억은 은근하고 따뜻하게, 그리고 오래도록 남는다.
어쩌면 차를 마시는 지금의 내가
그때보다 훨씬 능숙해졌다는 사실이
이 기억을 더 자주 데려오는 건지도 모른다.
찻잎은 스르륵 펼쳐지고, 물속을 유영한다.
기억과 감정은 찻잎을 따라 두둥실 떠오른다.
오늘의 차가 어제와 다르듯
오늘의 마음도 그때와는 조금 다르겠지만
오늘의 찻물이 그때의 추억을 조용히 꺼내주었다.
당신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나요?
차 한 잔을 마시다, 어느 기억이 살짝 스며든 적.
차를 우리고 마시는 시간은
지금에 머무르게도 하고,
추억을 불러오게도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