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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르는 굼벵이 Nov 24. 2023

좌절감을 느낀다면, 정상이다.

정리전문가의 일

<만약 당신이 좌절감을 느낀다면, 정상이다.> 읽고 있던 책(아무도 빌려주지 않는 인생책, 가우르 고팔 다스 지음, 이나무 옮김, 수오서재)펴니 나온 구절이다. 저자는 '너는 어제 좌절감을 느꼈지만, 이건 모두에게 예외 없이 일어나는 일이고 네가 경험하는 삶의 일부야.'라고 말해주었다. 그래, 그렇지. 내가 어제 느낀 좌절감은 일하면서 겪는 여러 감정들 중 하나야. 어제 일에서 많이 배우고 잊지 않으면 돼. 나는 깨달았다.


어제는 정리수납컨설팅일이 있었다. 팀장님이 사전견적을 가서 사진을 찍어 와 보여주기 때문에 상황은 알고 갔다. 물건이 섞여있고 많았다. 어느 집이나 그렇지. 이 정도야 뭘. 하는 마음으로 갔다.


그런데 집에 들어가니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물건들이 바닥에도 많아 발을 디딜 틈도 적었다. 예상과 달라 조금 당황했지만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 생각하며 일을 시작.


어제 내 영역은 주방이었다. 주방팀장님이 계시고 나는 팀원. 정리는 물건을 꺼내 분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는 일단 주방 초입에 있는 키 큰 장 두 개에서 물건을 꺼내 60L 비닐에 분류해 담기 시작했다. 구석구석 다양한 물건들이 콕콕 박혀있었다. 과자, 화장품, 치약, 칫솔, 면도날, 비누, 샤워기 필터 등의 욕실용품 새거, 아이들 이름이 적힌 스티커, 목장갑, 종이컵, 빨대, 약국 약봉지, 볼펜, 물티슈 등등이 나왔다. 과자 등 간식봉지만 3개. 봉지가 주방에 가득 찼다. 시간도 꽤 걸렸다. 간식은 주방 안쪽 키 큰 장에, 주방 말고도 집안 곳곳에 많은 약은 주방 입구 키 큰 장에 넣어 정리하기로 했다.


다음으로는 주방 안쪽 키 큰 장의 물건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곳을 비워야 간식을 정리해 넣을 수 있다. 얼른 정리해 나가야지 하는 의욕을 가졌으나 또 살짝 당황. 팀장님이 주방 안쪽에서 일을 하고 계시면 내가 들어갈 수 없다. 부딪친다. 어쩌지, 잠깐 고민하다 어찌어찌 조심조심 상부장 물건을 먼저 꺼내 분류해 놓은 뒤 간식을 정리해 넣었다.


일은 주방 옆 작은 베란다 세탁기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했다. 공간이 없었다. 물건이 많으니 속도를 내야지 했지만 자세도 불편하고 바닥에 가득한 분류봉투 때문에 왔다 갔다도 힘들어 생각만큼 일이 빨리 진행되지 않았다. 계속 쪼그리고 있으니 점심 먹고 나서는 위에 경련이 나는 것처럼 아팠다. 사탕하나 먹으면 괜찮아질 테지만 내 가방 속 사탕을 가지러 갈 여유가 없었다. 바닥에 물건들을 헤치고 나가는 것보다 아픔을 참는 게 낫다는 판단. 다행히, 더는 못 참을 것 같을 때 고객분이 따뜻하고 단맛도 나는 율무차를 타주어 먹고 통증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또 한 번 당황했다. 쉬지않고 일을 하는데 물건이 줄지 않는 것 같았다. 움직일 공간이 여유롭지 않은 것도 계속 힘들었다. 정해진 시간에 끝나려나 싶은 생각마저 들 때, 팀장님이 주방 개수대와 가열대 쪽 상, 하부장 정리를 마치고 남아있는 것들을 정리해 나가면서 주방이 훤해지기 시작했다. 나도 서둘러 팀장님을 도와 마무리를 시작, 일은 잘 마쳤다.


그러나 일을 끝내고 나니 내가 일을 너무 못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괴로웠다. 당황할 게 아닌 부분에서, 아니 일을 하면서 어떤 상황이든 당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어제는 작게라도 여러 번 당황한 게 좀. 부족한 게 많구나, 느꼈다. 그리고 일한 것을 되짚어 생각해 보니 일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할걸 하는 부분도 있다. 물론, 어려운 상황에서 좀 더 나은 결과물을 내고자 끝까지 고민하고 치열하게 일했다. 어느 순간도 대충 흘려보내지 않았다는 부분은 스스로 만족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어제의 내가 마음에 안 들어 좌절했었다. 더 잘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책을 읽고 다음을 다시 정리했다. 어제일을 배움으로 삼아 더 잘해야지, 그렇게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꼼꼼하게 나아가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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