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스쳐가는 성장통에 대해
무더위에 땀을 훔쳤을 당신에게
아무래도 올해는 장마 없이 지나가려나 봅니다. 밖에 나다니기 한결 수월하니 좋긴 하지만 내심 섭섭한 기분도 드네요. 나는 비를 무척 좋아하거든요.
비 내리는 날을 좋아한다고 하면 거 참 궁상맞은 취향이라고 핀잔을 많이 들어요. 나도 처음에는 우중충한 하늘빛이나 신발이 젖어 질퍽거리는 찝찝함을 싫어했답니다. 비 오는 날이 좋아진 건, 온몸이 비에 흠뻑 젖어본 다음의 일이에요.
어린 시절 나는 아빠 껌딱지였습니다. 주말이면 아침잠이 많은 나머지 식구들이 깨지 않도록 둘만 조용조용 집을 빠져나와 동네 식당들을 탐험하며 '아침밥 사냥'을 나서기도 했고, 단둘이 여행을 가거나 등산하는 일도 꽤 잦았습니다.
아빠와의 관계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중학교 3학년 봄이었습니다. 학교에 다녀온 나를 거실로 불러내신 아빠께서는 오늘부로 당신을 아빠 대신 '아버지'라 부르라 하셨습니다. 충분히 머리가 굵어졌으니 마냥 어리광부릴 시기는 지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 예고 없이 떨어진 아버지의 통보는 혼란스러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버지의 미움을 산 것은 아닌가 불안한 마음에 밤을 지새웠던 기억이 납니다.
철없는 아이가 하루아침에 어른이 될 수 있을 리 만무했고, 불완전한 어른인 저는 아버지와 마주하기 두려워졌습니다. 가족과 함께 하던 저녁식사는 도서관 공부를 핑계로 학교 근처 편의점에서 혼자 해결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주말에는 아버지와 마주칠세라 눈을 뜨자마자 독서실로 직행했습니다. 아빠와 내 사이에 어색한 긴장감을 조장한 아버지가 원망스럽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고작 호칭 하나의 무게가 그렇게 버겁더랬습니다.
몇 달이 지나 장마철이 찾아왔습니다. 쏟아지는 장대비에 흠뻑 젖은 신발을 직직 끌며 귀가하니 웬일로 아버지께서 일찍 퇴근해 계셨습니다. 현관으로 들어서는 저를 보시자마자 가방만 내려놓고 다시 나가자고 하시더군요. 그새 빗줄기는 더 굵어져있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침묵에 숨이 막혀올 때쯤, 아버지께서 집 옆의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아빠가 어릴 때는 비 와도 우산 안 쓰고 그냥 다녔는데 말이야."
아버지는 그대로 받치고 계시던 우산을 접어내리셨습니다. 그러더니 놀란 토끼눈을 뜨고 쳐다보던 제게,
"너도 한 번 비 맞아봐. 이런 것도 추억이지 뭐."
하며 개구지게 웃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참 오랜만에 마주한 그 표정 탓이었을까요. 아빠와 손 잡고 아침밥 사냥을 나섰을 때처럼 기분이 들떴습니다. 정강이까지 차오른 흙탕물을 텀벙텀벙 튀겨대며, 쫄딱 젖은 저희 둘은 그렇게 운동장을 몇 바퀴나 돌았습니다.
투박한 망치로 얼음조각이라도 만들 듯 조심스러운 대화가 오갔습니다.
"요즘 공부하느라 힘들지?"
"남들도 다 이 정도 하는데요, 뭐."
"그래, 열심히 사는 건 좋은 거지."
"그런가요."
"그럼."
짧은 침묵.
"넌 아빠보다 머리가 좋으니까 어른이 되면 훨씬 재미있게 살 수 있을 거야."
아버지의 말투에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주말에 아빠랑 아침밥 사냥 갈 시간은 좀 내주면 안 되냐? 매번 너희 엄마 깨우기도 미안해."
그러고보니 아버지께서는 한 번도 당신을 지칭하실 때 "아버지"라는 말을 쓴 적이 없으셨습니다. 매번 "아빠..."라고 우물거리며 힐끗 제 눈치 살피는 것을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요. 어쩌면 저만큼이나 아버지도 이런 부모자식 관계에 서투른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웃음이 터졌습니다.
"네, 아버지. 그럼 이번 주말에 같이 사냥하러 가요."
그러자 나와 참 많이 닮은 주름진 얼굴이 마주웃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 직후 홀로 상경하여 어린 나이에 어른이 되어야만 했던 당신에게, 당신께서 제 할아버지를 부르시던 "아버지"란 호칭을 허락하는 것은 자식을 부모와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해준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여전히 자식을 품는 "아빠"로 남고 싶으셨을 테지요. 어설픈 자식은 그렇게, 시끄러운 빗소리가 침묵을 메워주는 가운데 어설픈 아버지를 조금 더 알아갔습니다.
온몸에서 빗물을 뚝뚝 흘리며 집으로 돌아갔을 때, 제 아버지 닮아서 철딱서니 없는 짓만 골라서 한다는 엄마의 잔소리가 퍽 기분 좋게 들렸습니다.
비가 오는 순간은 스산하고, 때론 무섭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비가 그친 다음, 주위를 유심히 관찰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빗방울이 거쳐간 곳은 반드시 새로운 색깔을 입는답니다. 나뭇잎도, 하늘도, 사람도요.
요즘도 가끔, 성장통이 올 때면 방안에 가득 차도록 빗소리를 틀어놓곤 합니다. 이 비가 그친 뒤 달라질 내 모습을 상상하다 보면 조금은 지혜로워지는 기분이 들거든요. 어쩌면 이 무더위 속에서도 당신만은 비를 맞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빗물로 덧칠된 당신의 색깔이 부디 당신 마음에 들기를 바라요.
마른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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