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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12

by 날나

* 책 속 내용 일부 포함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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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화가 세상을 떠났다. 토지는 읽어나갈수록 매번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야기가 이어진다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의 삶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게 아니라 죽음과 그 이후의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다. 읽는 내내 안정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서희의 삶 자체가 그렇기 때문에 관련되어 있는 이들도 이렇게나 다 불안정 한 걸까. 아니면 그때는 그런 시절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걸까


서희와 어린 시절을 함께 했던 봉순이. 단지 주종 관계가 함께 어린 시절을 살아온 이의 죽음은 다른 죽음보다도 유난히 더 힘들다. 내가 이 시절에 이랬어, 저랬어, 이렇게 아무리 이야기 한들 그 순간들을 온전히 같이 살아온 이와 느끼는 공감과 이해의 폭은 다른 사람이 쉽게 끼어들 수 없다. 서희에게는 그런 사람이 봉순이었고, 길상이었다. 지금 두 아들이 있기 때문에 그 아이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버티지만, 사실은 그 스스로도 버틸 곳이 필요한 어린아이 같다. 같이 생활하지 않더라도 그 시절을 공유하는 이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고 하면 그건 은연중에 삶의 버팀목이 되어주지 않았을까. 차라리 생존 여부를 모르는 게 나을 수 있겠다. 누군가의 죽음을 확실히 인지하게 되는 건 막연한 희망, 기대 같은 것도 남기지 말라는 선고가 아닌가.


나의 봉순이가 아닌데도 기화의 죽음은 가슴이 뻥 뚫린 기분이다. 여기서 길상까지 큰일이 생긴다면 서희는 무너져 내리겠지. 무너지지 않더라도 텅 비어버릴 것 같다. 소설에서는 내내 서희가 완벽한 양반집 여인으로 그려지지만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나는 괜히 안쓰럽고 측은하다. 봉순이가 좀 더 강한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서희는 누구에게 기댈 수 있을까. 의지할 사람 하나 없는 삶은 너무 외롭지 않은가.


토지를 읽기 시작했을 때도 미스터 선샤인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특히 이번에 상현과 희성이 비슷하단 생각이 많이 들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과오로부터 벗어나고자 일본에서 허송세월 하던 희성이나, 아버지의 명성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상현. 둘 다 글쓰기로 현실을 도피하거나 드러내고자 했고 온 갖 무용한 것들을 쫓아다니지 않았나. 처음에는 그래도 명망 높은 아버지를 가진 상현 쪽이 더 좋은 신세가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둘 다 똑같다. 오히려 나중에는 현실을 피하지 않고 맞서게 되는 희성이 대단해 보인다. 상현도 그렇게 정신 차릴 수 있을까. 부모의 명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쉽게 벗어날 수 없고 그 건 자식의 불행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유명하거나 악명 높은 누군가의 자식으로 살지 않으려면 아버지보다 더 훌륭하거나 악해져야 벗어날 수 있을까. 부모는 내가 선택하거나 어찌할 수 없기 때문에 더 깊은 무력감을 느끼게 되는 지도.


책을 읽는 내내 쉽게 읽기 어려운 시대 이야기가 나오면 빠르게 읽어 넘어간다. 쉽게 읽히지도 이해되지도 않는다면서 그때 상황에 대한 이야기는 슬쩍 넘어가고 치정관계에 더 치중해서 읽고 있다. 문득, 작가가 소설을 쓴 이유와 내가 읽고 있는 이유가 너무 다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보기 어렵다고 건너뛰는 이야기들이 작가는 하고 싶었던 이야기이고 전달하고 싶은 주제였을 지도 모르는데 너무 내 입맛대로 읽어 내려가는 게 아닐까. 글을 그저 길게 쓰기 위해 안 해도 되는 말을 이리저리 부연하지는 않았을 텐데. 20권이나 되는 토지를 쓰면서 작가가 정말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토지의 배경 시대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책 전체적으로 연좌제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핏줄에 대한 강한 유대. 멧상을 받들어 줄 자손에 대한 집착, 살인죄를 지은 이의 아내, 자식까지 모두 싸잡아 비난하던 시대. 신분제도 없어졌다 하지만 부모가 무엇이었는지에 따라 삶의 태도가 달라지고 있다.


두만이도 부모가 면천한 신분이 아니라면 그렇게 동향 사람들을 싫어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의 자격지심은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쉽게 떨칠 수가 없다. 두만이도 처음부터 그렇게 고향 사람들을 싫어하지는 않았겠지. 서울 물먹으면서 눈치도 빨라지고 부모와 떨어져 살다 보니 내가 어떻게 자라왔는지에 대해서는 점점 더 희미해지고 만 것일까. 그런데다가 나보다 점잖고, 똑똑해 보이는 사람과 살림을 차리고 보니 무시당할까 걱정이 더 되고.


상현은 유명한 아버지 덕에 오히려 더 인생을 낭비하려고 한다. 아버지를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으며 그 그늘에 들어가고 싶지도 않다. 어쩌면 좋을까. 차라리 상현이 별 볼일 없는 그저 그런 아버지의 자식이었다면 그의 삶이 달라질 수 있었을까. 그는 자기 자식들에게 어떠한가. 똑같이 아비를 못 보는 자기 아들과 환국을 비교하며 전혀 다른 상황으로 비교하며 또 슬퍼한다. 어쩌면 그는 비교를 하면서 자기 연민에 자꾸 빠져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살인을 한 김평산은 죗값을 치르고 죽었지만 그의 두 아들은 살인자의 자식의 이름을 달고 살아야만 했다. 똑같은 상황에서 형은 벗어나서 새롭게 살기로 했고, 동생은 그 마을에 남아 눈치를 받아 가며 버티어 낸다. 그래서 지금 어찌 되었나. 형은 여전히 과거를 숨겨야 하고, 동생은 숨기거나 거리낄 게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아버지에 대한 자격지심을 덜어낼 수 이을까. 숨기고자 했던 것은 드러내어야 마음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걸까. 그래서 한복이는 마음이 편안해졌을까.


환국이와 윤국이는 하인이었던 길상의 아들들이다. 하지만 서희가 조선으로 돌아오면서 자신과 길상의 성을 바꾸어 아이들에게 최 씨성을 물려줄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이야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때는 가능했던. 그렇지만 그게 그렇게 의미 있는 일일까. 서희는 양현을 친딸처럼 기르고 있다. 친딸도 아니고 자신의 몸종 같던 (몸종은 아니었다) 봉순의 딸은 사실 그 신분이 서희 친자식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점점 더 이상 누구의 핏줄인지가 크게 중요하지 않는 시기가 오고 있는 걸까.


홍이는 간도로 떠나려고 한다. 친부모가 자란 고향인 평사리 가 아니라 자신이 나고 자란, 마음으로 따르던 엄마가 있는 곳. 이제 홍이는 조선인인가 간도 사람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그곳이 고향인가. 자식의 자식으로 세대를 내려가면 핏줄에 대한 열망도 점점 흐려지는 듯하다. 땅에 대한 애착도 그렇게 사라지고 있는 게 아닐까.


분명 부모와 닮았지만 다른 사건들이 겪으며 다르게 살아갈 아이들이다. 신분과, 핏줄과, 연좌제로 가득한 시절은 이미 지났다. 지나가고 있는 게 맞나.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연좌제나 신분제는 사실 80년대 이후로 없어졌다고 하지만 은연중에, 혹은 드러내놓고 아직도 그렇게 이리저리 얽혀 있는 건 아닐까. 오롯이 하나의 개체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건 아직도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혼자 사는 인생이 아니고 누군가와 끊임없이 교류하며 살아야 하는 인간이라면.



61. 홍이는 그런 유의 인간이 내 마누라 니 줄까 봐! 하던 주정뱅이 지게꾼보다 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교육을 받고 높은 지위에 있다 하여도 비천함은 고쳐지지 않는 법이다. 그것은 인성이 나쁘다는 것이며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있다면 인성이 나빠질 수 없다는 건가. 지금은 점점 인간에 대한 애정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가 아닌가. 그래서 그런 건가. 걱정이네.


161. 이미 사랑의 적수라든지 하인 출신이라든지 그런 의미는 다 소멸하고 없었지만, 바로 그 숙적과 같은 감정이며 주종과 같은 의식이 완벽하게 무너져버렸다는 것을 자각했던 것이다. 이조 오백 년의 권위의식, 그 존엄성이 흔적 없이 사라지는 순간 상현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만주 바닥을 헤매는 들개 같은 존재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조 오백 년의 권위의식. 그건 정말 흔적 없이 사라진 건가.


228. 방대한 땅, 막대한 재산, 허접쓰레기 같은 재산 위에 사람은 없고 윤국이 혼자 쭈그리고 앉은 모습만 있었다.

서희와, 길상과, 환국은 어디로 가고. 무엇을 위해 이렇게 달려왔을까. 윤국이 혼자 남겨져 버렸지. 왜.


265. 아무도 모르리라 믿고 있던 비밀, 살인을 교사한 사실, 그러나 자신이 그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서웠던 것이며 두수는 살인자의 피를 받은 사내다.


449. 아비의 상을 당한지 얼마가 안 되었는데 홍이는 임이네를 위한 슬픔을 느낀다. 얼마나 죽기 싫었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하고. 가을바람같이 뜻하지 않게 찾아온 순수한 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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