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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삭

사회화와 정형화. 조각되고 있는 나.

by 날나

처음 느꼈던 건 아마 서평 글쓰기를 배우러 다닐 때였다. 운 좋게 회사에서 한겨레 서평 쓰기 강의비를 지원받아서 교대 근무인데도 불구하고 오전반만 하고 오후에 글쓰기를 배우러 갈 수 있었다. 아마도 반짝반짝했던 나의 어린 시절. 그렇게 나름 회사에서 선택되었다는 우쭐함과, 글은 어느 정도 기본적으로 쓸 줄 안다는 자만심으로 갔던 것 같다. 글쓰기 수업은 강의 후 숙제로 서평 하나를 써오고 다 같이 읽어보고 합평을 하는 방식이었다. 신나게 써 내려갔던 것 같다. 내가 쓴 글에 내가 흠뻑 취해있었다. 칭찬일색이지 않을까 하는 김칫국도 사발로 마시고 갔다.


결과는 처참했다. 다듬어지지 않은 날 것의 글은 어설프기 그지없어서 이리저리 까이고 말았다. 서론, 본론, 결론이 없고 내가 하고 싶은 말과 내 감정이 우선이 서평은 서평이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내가 누군가를 비평할 수 있겠나. 그저 독후감이라면 모를까, '평'이 들어간 이상 내 마음대로 쓰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20250514_132651.png 서평글쓰기 특강-북바이북 2015

이미 서평을 쓰기 위한 형식은 정해져 있었고 나는 거기에 맞춰서 내용을 찾아 채워 넣으면 되었다. 크게 고민할 것도 없었다. 5개 타입 중 하나를 골라 채우기. 간단하다. 내가 아닌 누구라도 쓸 수 있을 것만 같아. 비문만 적당히 조심하면 어렵지 않겠는데.


그렇지만 결과는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가 않는다. 이리저리 규격에 맞춰서 쓰고, 제대로 퇴고를 하다 보면 내가 쓴 게 아닌 것 같은 느낌. 그 책을 읽었을 때 그 기분과 그 감정이 전혀 떠오르지 않고 그냥 딱딱하고 사무적인 느낌. 말랑말랑하게 솔직하게 쓰고 싶었는데 솔직하지 않은 느낌. 누구나 쓸 법 한 그런 생각과 내용. 남들이 공감 못한 내 감정, 내 생각들을 드러내고 싶은데 그런 글들은 잘 쓴 글이 아니라고 한다. 서평은 객관적으로 남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거 싫어엇! 하고 빼액 소리만 지를 수는 없지 않나.


그리고 그 첫 조건으로 우선 글에 '나'가 드러나서는 안된다.


아, 나는 나를 마구마구 드러내고 내 생각을 마구마구 보여주고 싶은 사람인데 그걸 하면 안 된다니. 그럼 내 글쓰기는 뭐란 말인가. 그냥 진짜 공개 일기장인가. 개성이 없는 글쓰기가 무슨 소용인가. 정말 아무도 나의 사사로운 생각에는 관심이 없는데 혼자 줄기차게 쏟아내고 있는 중인가. 남들도 다 이 정도는 그냥 쓰는 걸까. 생각의 흐름대로 대책 없이 흘러가는 글자들.


얼마 전 글 하나를 쓰고 챗 GPT에게 첨삭을 해봤다. 묘하게 차분한 정돈된 글. 이게 내가 쓴 거라고 할 수 있나. 내 글인가. 나라는 색깔이 빠진 것 같은데.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순서와 형식. 또 어디서 많이 본 감탄사와 꾸밈말들. 이렇게 점점 사람들의 개성이 깎여 나가는 걸까. 인터넷에 많이 올라오는 글들도 대부분 어디서 양식을 교육이라도 하듯 천편일률적이 되어 가는 것 같다. 특히 독서 후기는 대부분 생각이 거의 빠져있어서 후기라기보다는 대부분 책 소개로 흘러가는 것 같다. 책 소개가 궁금한 게 아닌데. 책 내용은 나도 읽을 수 있어. 줄거리가 궁금한 게 아닌데.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그 생각을 공유하고 싶은데. 결국은 생각도 다 비슷하게 흘러가는 걸까. 생각을 하지 않게 되는 걸까.


아이가 천방지축인 것 같다. 이러지 마, 저러면 안 돼. 이런저런 규칙들을 가르치다 보면 어느 날엔가 아이가 불쑥 자란 게 보인다. 어른스러워졌네. 사회화가 된 건가. 어디 내놔도 톡 튀지 않고 무난무난해진 아이. 내가 바라던 게 그런 건가. 글에는 그렇게 개성이 사라진다고 잣대를 들이대지 말라고 첨삭 같은 거 싫다고 하더니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재단하고 있었나. 어디서 어디만큼 자를 가져다 대야 할까. 어디까지 다듬고 어디까지 그냥 두어야 할까.


정원에 나무를 조성할 때도 너무 과하게 반들반들하게 잘라버리면 부담스러운데. 그렇다고 방치된 나무들은 너무 지저분하다. 그 적절함은 어디일까.


뾰족하게 뛰어난 사람은 아니지만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도 아닌데.


개성이라는 게 있나. 남겨놔도 되는 건가. 필요 없는 개성이라면, 혹은 나쁜 버릇이라면 자르고 깎아내야 하는 게 아닌가.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 내가 판단해도 되는 걸까. 챗GPT에게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 대답을 듣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이 녀석이 하는 말에 내가 조각되고 있는 기분. 그럴듯한 말을 너무나 잘 꾸며서 홀리기 때문에 어느새 고개를 끄덕거리며 넘어간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진 않는다.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그래. 그게 더 좋은 것 같아. 생각을 기계에게 넘겨버리고 대부분이 하는 보통의 평균의 것을 수행한다. 이게 난가. 원래 그런 건가. 이렇게 시키는 대로 하면 되나. 그러면 나는 왜 존재하는 걸까.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며. 거기서 생각을 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요즘엔 이런 식으로 사회화를 시키는 걸까. 이러다가 정형화된 사람이 되고야 마는 게 아닐까. 그래도 생각이 유연하고 통통 튀는 사람이고 싶은데. 나이가 들수록 그건 어려워지는 걸까. 점점 굳어가는 진흙 같아. 어릴 땐 이리저리 몰랑말랑 했는데 말이지.


그냥 그대로의 나로 사랑받고 싶다.


이것만 조금 고치면 좋을 것 같아. 저것만 좀 바꾸면 괜찮을 것 같은데, 가 아닌 그냥 그대로의 나. 그러다가도 멈칫한다. 나는 그대로를 사랑할 만한 사람인가. 이것도 부족하고 저것도 모자란데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서 사랑받고 싶다니, 욕심쟁이 아닌가. 게으름뱅이인가. 드라마나 소설 속 여주인공은 사랑할만한 그런 사람들이지 않나. 나도 그런 사람인가. 그 옆에서 사랑받지 못하는 서브 여주인가. 정말 객관적으로 충분한가. 주관적으로 부족한가. 아니 주관적으로 충분하고 객관적으로 부족한 것 같은데. 결국 모두가 비슷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나.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라는 게 있나. 그럼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내가 받던 사랑은 잃게 되고 말까. 사랑받기 위해, 육각형의 사람이 되기 위해 이리저리 조각하고 있었나. 그럼 그건 나인가.


누가 나를 첨삭하고 가르쳐야 하나. 그럼 그 사람의 취향대로 내가 조각되어지는 걸까. 아이들은 우리의 자식이기 때문에 우리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누군가를 가르칠 만한 자격이 있나. 그렇게 영향을 주어도 괜찮은 사람일까. 누군가의 사회화에 관여해도 괜찮을까. 나의 방식은 옳은 결정일까. 최선일까. 다른 좋은 방법이 있지 않을까. 아무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내 말에 더 솔깃해지고 길들여지고 있는 게 아닐까.


그게 사람이 아니라 환경이라면.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의 영향력이 아니라 여러 명의 영향으로 한 사람이 자라난다면. 내가 그렇게 절대적이지 않고 나도 단순히 한 사람의 영향으로 변하는 게 아니라면. 아주 보통의 하루를 살고 싶으면서도 남에게도 영향을 주지 않고 나도 영향을 받고 싶어 하지 않는 나는. 그러면 보통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닫고야 만다.


불특정다수에게, 이래도 되는지, 저래야 하는지 계속 묻다가 그렇게 남들과 비슷하게 나를 맞춰가다보면. 무색무취의 내가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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