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그리고 시작
비행기 안이다. 덜컹거리는 흔들림과 찬 공기가 느껴지고 시끄러운 백색 소음이 귀를 간질거린다. 갑작스럽게 남아공을 떠날 최종 결정을 하고 지난 5주 동안 나는 집 안의 모든 짐을 하나씩 팔고 나눠주고 떠넘기며 정리했다. 어떻게 정리했는지 스스로도 놀랍고 대견하다. 이사보다는 덜 힘들게 정리되는 것 같았지만, 쓰던 물건, 정든 물건들을 하나씩 정리하고 가져가야 할 것들만 빼내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공항 수화물 붙이는 곳에서 오버된 가방 키로 수를 맞추느라 다른 가방에 쑤셔 넣고 겨우 맞추는 쇼를 벌였다. 한 바퀴 휘몰아친 대소동이 끝나고 언젠가 여행 한 번 또 오자고 이야기하고, 헤어짐에 아쉬워 꼭 끌어안고 눈물 흘리며 비행기에 올라탄 나는 지금 별생각이 없다. 그저 이틀간 나머지 짐을 어떻게든 줄이고 줄여 가방에 밀어 넣고 손발이 퉁퉁 부어 피곤한 눈꺼풀을 치켜뜨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떠올리면 아쉬운 관계만 떠올려본다. 그저 다시 이야기하자면, 그냥 실감 안 난다.
지난 7년을 꽉 채우고, 8년이 되는 해를 위태위태하게 살았고, 그 안에서는 늘 감사의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흥미롭게도 지난 5주간 집 정리하면서 남아공 살면서도 몰랐던 사람들을 꽤 많이 알게 됐다. 마지막이라며 아쉬워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참 다행이기도 했다. 처음 알게 되었는데 밥을 사준다며 식당 예약을 하고 이야기 나눈 분도 있고, 알고 지냈지만 대면했던 관계가 좀 더 애틋해지기도 했다. 짐 빼고 비행기 타기 전 이틀간 머물 곳이 없으면 자기네 집에 와서 자라고 선뜻 제안해 준 가정이 여러 곳이었다는 것도 참 다행이었다 싶다. 초청을 마다해야 하는 곤란한 상황도 꽤 있었다. 지내는 동안 더 일찍 가까이 지냈더라면 좋았을 걸, 더 많이 왕래했다면 좋았을 성싶은 관계들이 못내 아쉽다. 아이들 친구들과 쏟은 수도꼭지 같은 눈물, 아이들 엄마와 쏟은 아쉬운 눈물, 이곳을 떠난다며 밉다고 말하며 펑펑 우는 교회 아이들을 보면서 못내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한국어반인 외국인 학생들과 어찌 그리 정이 들었나, 부족한 나를 사랑해 줬고, 즐거웠다. 포옹하고 악수하며 선물을 주고받고 기록으로 남기자 사진도 찍었다. 아쉽다며 용돈을 쥐어주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다. 늘 가까이서 밥 챙겨주고, 힘든 일 도와주고 때때로 식탁을 나눴던 가족 같은 관계도 이제 바이바이 했다. 마지막에 웃으면서 씩씩하게 헤어지려고 누르고 눌렀던 눈물이 빵 터져 후다닥 정리하고 나와버렸다. 곧 다시 한국에서, 필리핀에서 그리고 언젠가 다시 남아공에서 만나자며. 관계라는 게 참 신기하다. 어렸을 적 나는 눈물이 많았다. 어느 시점에는 나는 눈물도 없는 냉정한 사람인가 싶었는데, 나는 여전히 눈물이 많은 게 맞다. 단지 공감이 안 될 때 울지 않을 뿐이다. 눈물이 한 번 나면 참느라 고역이다.
무튼, 7년 반의 여정은 마무리되었고, 이제는 돌아갈 집도 차도 없다. 덜렁 캐리어 12개로 우리의 짐이 정리됐다. 한 번에 다 짊어질 수 없어 이곳저곳 한국 들어오는 분들에게 가방을 나눠 맡겼다. 이 또한 서로의 사정을 아니 가능한 일인데, 감사할 뿐이다. 우리가 비행기로 가져갈 수 있는 캐리어는 5개, 백팩 하나씩. 이제 어딜 가서 살아도 되는 상황이 되었다. 우리는 일단 한국으로 가고, 그다음 스테이지인 필리핀으로 갈 준비를 해야 한다. 필리핀으로 갈 결정을 내렸지만, 아직 아무런 정해진 계획이 없다. 언제 한국에서 떠날지, 어느 지역으로 갈지, 아이들 학교는 어디로 보낼지...
나는 크리스천이고, 선교사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움직이는 충직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핸들링하신다고. 또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계획 없이 움직이는 게 무모하지 않냐고, 아이도 셋이나 있는데... 이런 말들은 놀랍지도 않다. 이미 8년 전 한국을 떠나 남아공으로 왔을 때 귀가 닳도록 들었던 말이고, 그런 말을 듣는다고 해서 내 중심 또한 흔들리는 것도 아니다. 내 안에는 어떤 심지 굳은 믿음이 줄곧 자라왔고, 나는 그렇게 그 하나를 붙들고 살아가는 중이다. 내 안에서는 늘 싸운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나의 욕심, 세상의 기준, 타인의 기대와 시선 늘 섞여 존재한다. 그것들이 나의 전부를 만들어가는 건 아니지만, 일부를 차지하는 것 맞기 때문이다.
일단 독일로 간다. 남편과 나는 신혼여행 이후로 두 번째 독일 방문이다. 아이들 고모와 고모부는 우리 삼 남매를 실제로 본 적이 없다. 아이들도 가족들을 만나고 독일 시내를 활보할 생각에 들떠있다. 나도 그래야 하는데, 지금은 흘러가는 시간에 몸을 맡기고 따라가야겠다는 생각뿐이다. 나의 혈기와 노력과 애씀으로 채워지는 시간이 아니란 걸 너무 잘 안다.
언제나 인생은 그렇게 흘러왔다. 나의 의지와 바람도 있었지만, 흘러가는 시간과 방향에 몸을 맡겨 여기까지 왔다. 그렇게 순적하게 흘러가길 바라며, 곧 도하에서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