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 32도 다바오의 겨울.

다바오 적응기



평균 기온이 32도인 겨울이 있다니 상상조차도 안 되는 계절이다.

필리핀의 다바오에서는 가만히 있어도 땀방울이 송골송골 땀구멍을 비집고 나온다. 아프리카의 한 여름 최고 기온이 39도까지 치솟았어도 땀이 잘 나지 않았던 터라, 그저 아프리카 더위는 '뜨겁다'로 통했다. 그렇게 뙤약볕의 더위를 느끼다가도 그늘 밑으로 가면 선선해져 더위를 피할 수 있었다. 집안, 실내에만 들어가면 시원했다. 집에서도 에어컨 없이 8년을 살았다. 오히려 남아공의 겨울은 추워서 실내에 오래 부동자세로 있다가 발가락 동상에 걸리기도 했다.

남아공이나 필리핀 둘 다 더운 나라가 맞긴 하는데, 한국과 사계절이 반대인 나라에서 살다 사계절 내내 여름인 나라에서 살아보니 계절의 변화를 모르겠다. 물론, 이제 겨우 두 달 차. 아직 한 계절도 안 지났다. 사계절 내내 여름이라 무슨 계절이냐 싶겠지만, 시즌의 변화는 있다. 지금은 새벽에 에어컨 없이 잠을 잘 수 있는 다바오의 겨울이다.


신기하게도 필리핀의 각 지역마다 우기의 시기와 강우량의 정도도, 계절도 다르다. 바기오는 지대가 높아 1년 내내 서늘하다가 춥고, 마닐라는 우기가 3-4개월은 된다고 들었다. 다바오는 우기가 거의 없지만 스콜처럼 비가 며칠 쏟아지거나, 밤에만 내리고 아침엔 활짝 개기를 반복한다. 그걸 보면 남아공의 몇 년 전과 비슷한 것도 같다.

적도 바로 밑에 위치한 다바오는 해가 빨리 뜨고, 빨리 진다. 덕분에 아침에는 저절로 눈이 떠지는데 새벽 5시면 이미 동이 튼다. 6시면 한국 오전 8시는 넘은 것 같은 느낌이다. 요즘 아침 6시면 무조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간다. 그럼 이미 시간이 훌쩍 오전 8-9시는 된 느낌인데 나처럼 나와서 걷거나 뛰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오가며 눈인사나 목례하며 "모닝"인사도 한다.

아떼(집안일을 맡아서 해주는 사람)나 아야(아이를 돌보는 사람)가 거주하는 집들이 있는데, 아침이면 아떼는 나와서 마당을 쓸고, 아야는 아이를 유모차에 싣고 동네를 산책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오후 5시 30분 정도가 되면 밤 9시가 된 듯 캄캄해진다. 저녁 식사 후 정리하고 8시경 산책하러 나가면 선선한 기운이 좋다. 한 여름에는 열대야가 지속되니 바람 한 점 없을 것 같기도 하지만, 창 밖 나뭇가지가 흔들리기만 해도 바람이 분다는 신호니 그저 반가울 뿐이다.


날씨에 그리 민감한 편이 아니었던 것도 같은데 나이를 먹어서인지,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서인지, 계절의 변화가 심히 그립고, 4계절인 한국과 남아공(내가 있었던) 이 그저 축복받은 나라란 생각이 든다. 지금 시점에서는 눈 내리는 한국 겨울이 그립다. 분명 한국에서 체감 영하 15도를 느끼면 더운 나라가 그립다고 할 테지만.

땅이 비옥해 채소와 과일이 잘 자라고 맛있는 나라, 그에 비하면 필리핀 땅은 비옥하지 못한 모양이다. 생각보다 과일과 채소의 크기도 작고, 맛이 그다지 "맛있다"는 느낌도 없다. 며칠 전 마트에서 한국 딸기를 봤다. 약 250그램 정도 되는 작은 딸기 가격이 얼추 계산해도 한화로 25000원 정도 됐다. 기함할 노릇이다. 난 절대 안 사 먹지 했는데, 필리핀 부유층 사람들은 사 먹으려나 싶다.


다바오에 와서 놀란 것들이 여러 가지가 있다.

교통이 엉망이다. 나름의 질서는 있지만, 들이대지 않으면 절대 갈 수없다.

차선 실선을 넘어 유턴이 가능하다. 심히 놀랍다. 트라이시클, 지프니, 오토바이로 인해 교통이 상상이상으로 혼잡하다. 신호등이 망가져도 고 치치 않는다. 사람들은 2차선, 4차선 무단횡단은 기본이다.

다진 마늘이 없다. 시장에 가서 깐 마늘을 사다가 다 다져서 냉동실에 얼려두고 쓴다. 신혼 초, 한국에서 살 때도 이렇게 하긴 했지만, 남아공은 간 마늘이 항상 마트에 진열되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생우유 먹으려면 들어오는 시기를 기다려야 한다. 마트에는 멸균 우유만 항상 있다. 날씨과 관련된 문제일 것이다. 남아공은 낙농이 발달해서 우유, 치즈가 넘쳐난다. 심지어 맛있다. 다바오는 낙농을 하긴 하지만 발달하지 않아서 멸균 우유 사용이 더 잦다.

시금치, 콩나물이 없다. 그 흔한 시금치도 없다. 대신, 청경채와 숙주는 쉽게 구할 수 있다. 남아공에서도 구하지 못하는 익숙한 한국 채소는 한국 작물을 키우는 분들을 통해 구할 수 있었는데, 듣기로 지금 여기는 한국 작물을 키우는 분들에게 부추와 미나리 정도만 구할 수 있다고 했다. 마트에 국간장이 없다. 액젓으로 곡간을 맞춘다. 일부러 국간장 안 쓰고 액젓을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지만, 마트에 국간장이 없다는 사실이 적잖게 놀라웠다. 남아공에서 8년을 살면서 한국에는 있는데 남아공에는 없는 것들은 웬만해선 이 없음 잇몸으로 살면서도 웬만한 건 다 있다고 했다. 비싸서 그렇지. 무튼, 남아공보다 없는 게 많은 다바오다. 자연스럽게 문화와 일상 편의가 비교되는 삶을 살고 있다.


여전히 여름의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보냈지만, 사뭇 다른 여름을 지나고 있다. 환경이 바뀌면 그 환경에 맞게끔 적응하고 삶의 보폭을 맞추는 게 일반적이다. 이게 달라서 싫고, 저게 달라서 힘들다 말은 할 수 있지만, 내 삶에서 불편한 것만 찾는 것보단 좋은 것을 찾는 게 낫다.

정말 못살겠다면 그런 말도 안 하고 떠나버릴 것도 같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고 나는 적응하기 위해서 좋은 것들을 찾아보려 한다. 1년 내내 32도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도 같고 살다 보면 24도가 춥다고 이불을 끌어당길 날도 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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