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도 우울할 때가 있어요.
나는 꽤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막내작가 때는 이 성격이 꽤 도움이 되었다. 전화 섭외를 할 때도, 출연자들과 미팅을 할 때도 밝은 기운의 사람이 있으면 경직된 분위기가 풀리곤 했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막내의 천진난만한 질문이나 호기심 어린 반짝이는 눈빛도 한 몫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무슨 일이든 잘 하고 싶어서 부탁받은 일들을 모두 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출연자 섭외, 촬영지 섭외, 촬영지 자료조사, 협조 공문 보내기, 아이템 제안서 만들기 등등 막내작가로서 할 수 있는 일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일을 했던 것 같다. 아무리 패기있게 시작한 일이지만 쏟아지는 업무에 나는 점점 웃음을 잃고 밝았던 기운도 조금 흐려졌고, 말수도 줄어들었다.
일이 버거워 주변 사람들에게 고민을 토로하자면 사람들은 그래도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연예인이나 유명인들과 만날 수 있으니까, 텔레비전만 보면 재밌어 보이니까 네가 참아, 너 잘할 수 있잖아, 그것도 잠깐 그런걸거야 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건냈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이게 잠깐의 업무 과부하라고, 잠깐의 우울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막내작가 때 시작된 작은 우울감은 서브작가로 입봉하면서 조금씩 몸집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다른 작가님들의 서포트만 했던 막내시절과 달리 서브작가로 입봉하면서는 내 코너를 내가 책임져야 했다. 방송 사고가 날만한 것이 생기면 모두 내 잘못으로 벌어진 일 같았고 자책했다. 매일 더 좋은 아이템을 찾기 위해 컴퓨터를 20시간 넘게 한 일도 대다수였다. 아침 6시부터 8시까지 생방송을 끝내고 아침식사 겸 방송뒷풀이를 하고 나서 사무실 소파에서 쪽잠을 자고 일어나 오후 1시부터는 다시 아이템을 찾았다. 방송작가에게 잠은 사치였다.
그 때는 시간만 나면 잠을 잤다.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회사에서 잠깐의 틈이라도 생기면 머리가 닿는 곳이 있다면 잠이 들었다. 그런데 그 잠을 자면서도 '아이템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 '섭외전화 거절하시면 어떻게 하지'라는 불안감에 거절당하는 꿈을 꾸니 제대로 잠이 들 턱이 없었다. 그렇게 일을 하니 수면장애가 왔고 그 영향은 고스란히 건강악화로 찾아왔다. 신경성 위염에 장염, 역류성 식도염에 피부도 뒤집어 지고 생리불순도 빈번했다. 나만 이렇게 아픈건가 싶어서 주변 작가들에게 물어보면 방송작가들의 고질병이라고 얘기하고 넘어갔다. 안 아픈 사람이 있는게 더 신기할 때였다.
그렇게 번 돈을 다 병원비로 쓰면서 몸을 돌볼 때 정작 돌보지 않은 것은 마음이었다. 몸이 아프니 일에 효율이 오르지 않고, 그렇다 보니 실수도 잦고 피디와의 의견 충돌도 잦았다. 밝고 긍정적이고 힘들어도 웃으며 일하던 나는 점점 신경질 적이고, 날카롭고, 매사에 최악을 생각하는 부정적인 마음을 갖게 됐다. 아이템이 잡히지 않을 때면 늘 교통사고나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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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늦은 퇴근길. 너무 지치고 피곤한데 퇴근하는 지하철이 답답해 다섯 정거장 정도 전에 내려서 길을 걷고 있었다. 그날도 아이템은 잡히지 않았고, 피디와는 의견 충돌로 말다툼을 했고, 집에 가서 또 밤새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해야할 예정이었다. 생각만으로 가슴이 꽉 막혔다.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탕탕 쳐봐도 해소되지 않았다. 그 때 마침 평소에 즐겨듣던 라디오 방송에서 문자 사연을 받는다는 게 흘러나왔다. 나는 잠시 거리 벤치에 앉아 문자 사연을 썼다. '일이 너무 많은데 잘 되는 건 하나도 없어요. 나만 열심히 일하는 것 같고, 인정은 못 받고 매일 신경질적이 되는 제가 싫어요.' 라고. 몇 분을 기다려도 내 사연이 읽히지 않자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터덜터덜 거리를 걸었다.
그런데 라디오가 끝나갈 무렵, DJ가 내 사연을 읽어주었다. 그리고 한 마디 조언을 해주었다. '지금 많이 지쳐있고 스트레스도 많은 것 같아요. 그 많은 일을 다 떠안으려고 하지 마시고 못하겠는 건 못하겠다 하시고, 도움이 필요하다면 누군가에게 의지도 해보세요. 그리고 울고 싶을 땐 울어도 좋아요. 그래야 스트레스가 풀릴 거에요. 그리고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계세요.' 그 말을 듣고 나는 거리에서 펑펑 울고 말았다. 말 그대로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면서 걸었다. 드라마에서 이별을 하고 거리에서 우는 사람처럼 정말 눈물만 주륵주륵 흘리다가 이내 소리내서 엉엉엉엉 울었다. 정말 다행히도 지나가는 행인은 없었고, 그래서 더 펑펑 울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뭐든 잘하고 싶었다. 막내작가 때부터 서브작가까지. 내가 맡은 일은 최선을 다하고 싶었고 누군가의 도움없이 멋지게 해내고 싶었던 거다. 그래서 나를 더 채찍질하고 잠을 줄여가면서 일을 했고, 일하다가 몸이 아파지는 걸 훈장처럼 여겼다. 그게 나를 더 아프게 하는 건 줄 모르고 상처만 주고 있었던 거다. 내 마음만큼 인정받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나를 아껴주지 않으니 남들이 무슨 말을 해도 만족이 되지 않았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