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다 ‘똑같은’ 인간, 다 똑같은 ‘인간'

명사가 형용사를 이기는 찰나에 대하여

by 남발

코트백(심판가방)을 메고 테니스 코트를 빠져나올 때, 가장 먼저 마주하는 건 해방감이 아니라 손끝에 머무는 기묘한 진동이다. 종일 쥐고 있던 PDA 혹은 스코어카드의 서늘한 감촉이나, 수만 번은 고막을 때렸을 선수들이 치는 공의 파열음이 신경계 어딘가에 끈적하게 눌어붙어 있는 기분. 저녁 즈음 숙소 주변에서 선수들과 마주칠 일 없는 조용한 구석에 앉아 가로등 불빛을 보고 있으면, 코트 위에서 보았던 수많은 얼굴이 망막 위로 일렁이며 지나간다. 인간은 일상을 견디기 위해 타인을 분류하는데 그것은 효율적인 생존 본능이라 생각된다. 낯선 이들을 매번 고유한 우주로 대접하기엔 우리의 에너지는 늘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 앞에 ‘똑같은’이라는 편리한 형용사를 붙인다. 지하철에서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무례한 사람도 ‘똑같은 진상’이고, 비슷한 타이밍에 항의를 쏟아내는 선수도 내게는 ‘똑같은 유형’ 일뿐이다.


언어학적으로 볼 때, 형용사는 명사를 구속한다. ‘똑같은’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순간, 명사가 가진 생생한 박동과 개별적인 서사는 거세된다. 그들은 오직 내 머릿속 데이터베이스의 한 조각으로 박제될 뿐이다. 그래서 심판으로 살며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판정의 오류가 아니라, 타인을 ‘똑같은 존재’로 치부해 버리는 그 게으른 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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