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누군가의 둥지를 빌리는 법

'다양성'이라는 이름의 비겁한 면죄부

by 남발

뻐꾸기는 스스로 둥지를 틀지 않는 대신 뱁새의 둥지에 몰래 제 알을 밀어 넣는다. 뱁새는 그것이 제 새끼인 줄 알고 지극정성으로 키우지만, 먼저 부화한 뻐꾸기 새끼는 뱁새의 진짜 알들을 둥지 밖으로 밀어내 떨어뜨린다. 생태계는 이를 ‘다양한 생존 방식’ 중 하나라고 부르지만(그리고 실제 태생에 따라 다양해야겠지만), 둥지 바닥에 깨져 있는 알들에게 그것은 명백한 학살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심판생활을 하면서 주변을 서성이는 기회주의자들을 겪게 되었는데 나는 이제야 그 뻐꾸기의 생존방식인 ‘탁란’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둥지를 틀 줄 모른다. 대신 가장 만만하고 단단해 보이는 타인의 호의 속에 제 고민과 책임을 슬그머니 밀어 넣는다. 이때 그들이 내세우는 무기는 역설적이게도 ‘무능’이다. “당신이 잘 아는 전문 가니까”, “나는 이 부분이 약해서”라며 거짓 칭찬을 섞은 무능을 내밀 때, 나는 매번 거절의 타이밍을 놓쳤다. 오히려 그 칭찬 때문이 아니라 나의 작은 선의가 그들을 통해 다른 심판들에게도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에 진심으로 대했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무기화된 무능(Weaponized Incompetence)’이라 부른다. 상대의 죄책감과 책임감을 건드려 제 할 일을 떠넘기는 아주 영리한 기생 전략이다. 솔직히 말해, 한 번씩은 스포츠종목 심판이라는 직업군이 결국 '프리랜서'에 속하니까 일반 조직의 특성이나 규율조차 존재하지 않아도 이렇게 흘러가는 건가 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어떤 조직의 구성원들보다 더 '소속감'을 원하는 자들의 집합체였고, 나 또한 그 부족함을 채우는데 일조하는 게 '조직'의 형태를 만드는데 밑거름이 될 거라 믿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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