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내 외국어 발음이 내 편이 아닐 때

가끔은 언어가 누가 이 땅의 주인인지를 확인시켜 주는 높은 담벼락이 된다

by 남발

어제까지 일주일 동안 매일 2번 이상 똑같은 심판석에 올라가서 경기를 진행하는데도 마이크 스위치를 켤 때 손끝에 전해지는 그 차가운 금속 느낌은 여전히 적응이 안 되었다. '딸깍'소리와 함께 불이 들어오고 경기장의 큰 스피커에 나의 작은 목소리와 숨소리마저 울려 퍼질 때, 갑자기 세상에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 든다.

특히 경기 시작 전 선수에 대한 소개를 할 때는 수만 명의 관중이 내 입술만 쳐다보고 있는데, 사실 나는 내 입에서 나갈 첫마디가 어떻게 들릴지 몰라 속으로 마른침을 삼킨다. 마이크에 "On"이라는 글자에 불이 들어오는 그 찰나, 나는 소통의 주인공이 아니라 내 영어가 틀리지는 않을지 검열받는 죄수가 된 것 같을 때가 있는데, 첫 어나운스를 내뱉는 순간, 코트의 공기가 묘하게 바뀌는 걸 느낀다.


사실 테니스 투어대회 급에서는 라이브스코어나 방송이 필수라서 실제 내가 앉은 심판석 주변에는 마이크가 대여섯 개 이상 설치되어 있다. 내가 사용하는 마이크를 끄더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나의 대화나 심지어는 혼잣말조차 생생하게 들을 수 있고, 캡처도 할 수 있다. (한 번씩 혼잣말을 하다가 깜짝 놀라서 정신 차린 적이 꽤 있다) 경기 중에는 그 마이크를 통해 선수들과의 대화도 전달되는데 사실 이 부분이 관중이나 시청자 입장에서는 가장 흥미로울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심판과 선수의 대화, 혹은 언쟁 말이다.

분명히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말했는데도, 내 발음이 상대방이 기대한 '미국이나 영국 스타일의 영어'가 아니거나 혹은 '아시아인 특유의 영어'가 흘러나올 때 사람들은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갸우뚱한다.

선수가 땀을 닦으며 나를 쳐다보는 그 1초의 정적. 그건 "무슨 소리야?"라는 의문보다는, "너, 우리 쪽 사람 맞아?"라고 묻는 것 같은 본능적인 경계심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듯하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남발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세상일에 급급하지 않은 여행자로 지내는 중

79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29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41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