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는 기쁨 넘치는 연차날이었다. 원래는 첫째 병원 진료를 위한 오후 반차로 시작했다. 아이 낳고 지난 11년 동안 온전히 나를 위한 휴가를 낸 적이 3번은 되려나. 올해 둘째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며 아이들도 많이 컸으니 올해는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이 조금이나마 주어지길 소망했다.
마침 지난주 애정하는 친구가 좋은 소식을 알렸다. 초기 유산의 아픔을 딛고 임신 18주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했다. 요즘 안 그래도 글을 쓰기 시작하며 친구들 생각이 났던 터였다. 엄마라는 타이틀이 주어지며 '내가 좋아하는', '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생각을 안 하게 된 지 오래다. 글을 쓰는 일은 내가 주어가 되어 나의 생각과 말을 풀어나가야 하기에 '나' 위주로 생각하며 살던 그 시절, 함께 하던 이들이 자주 떠올랐다.
절친인 그녀와 1년에 한 번 연례행사로 겨우 겨우 만나고 있었다. 마지막 접선은 작년 4월이었다. 만나러 가야겠다. 즉흥적으로 결정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연락했다. 다짜고짜 목요일 오전에 시간 되냐고 묻는 나에게 그녀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당연하지'
아침 9시에 아이들을 교문 안으로 밀어 넣고 그녀를 만나러 버스 타고 지하철로 갈아타며 짧은 여행길에 올랐다. 오랜만에 하는 나들이에 부담스러운 엉덩이가 경거망동하게 실룩거렸다. 다행히 가방 속에 든든히 자리한 손현 작가의 '글쓰기의 쓸모' 책이 들뜬 발걸음을 지그시 눌러주었다.
내가 사는 곳에서 그녀의 직장 근처까지 한 시간. 작년에 같은 곳을 아이들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간 적이 있다. 내게도 쉼이 필요했던 것일까. 아이들이 옆에서 끊임없이 새처럼 조잘대는 소리보다 홀로 말없이 책장을 넘길 때 들리는 사락사락 소리가 더 편안했다.
한적한 브런치 카페에서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출산 예정일이나 휴직 계획 이야기를 하며 근황을 나누었다. 친구는 간호대를 졸업하고 대학병원 간호사로 몇 년을 근무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그녀는 수능을 3번이나 봤지만 끝내 꿈을 이루지 못했다. 아무도 그녀에게 의대에 가라고 떠민 이는 없었지만 오랜 꿈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았다. 어려운 집안 사정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국 꿈을 좇아 퇴사를 감행했다. 몇 년 공부에서 손을 놓았기에 이 도전이 쉽지는 않았다. 마지막이라고 다짐했던 세 번째 시도 끝에 그녀는 드디어 의학전문대학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만큼 유급만큼은 피하고 싶어 죽을 힘을 다했다. 집안 사정이 몹시 안 좋아 그 와중에 아르바이트도 해야 했고 몇 년 간 밥은 늘 햇반에 라면으로 때웠다 했다.
소설로 한 권 쓰고도 남을 친구 인생이었다. 지금은 그 모든 풍파를 헤치고 나와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소아과 전문의가 되었다. 친구로서 애정하는 그녀가 꿈을 이루어서 기뻤다.
한창 얘기를 나누던 그녀가 의외의 말을 했다.
"지나고 보니 간호사로 쭉 있었어도 결국엔 만족했을 거 같아. 아픈 사람들을 직접 치료하고 싶어서 의사가 된 거였거든. 그런데 내가 가장 가까이 있고 싶었던 건 환자들인데, 막상 의사가 되니까 환자 곁을 지키는 건 내가 아니라 간호사더라."
꿈을 이룬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꿈을 위해 너무 많은 희생을 해야 했다. 지나고 두 길을 모두 바라 보니 예전 길이 자기에게 더 맞는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후회는 없다 했다. 두 번째 길의 끝까지 오지 않았으면 몰랐을 테니까. 하지만, 당시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간호사로서의 삶에 만족할 수 있도록 좀 더 노력해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친구와 반가운 만남을 뒤로하고 둘째 하교 시간에 맞추기 위해 일어섰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오며 글쓰기의 쓸모를 거의 다 읽었다. 하루에 책 1권을 읽을 수 있다니. 매일 휴가였으면 좋겠다 몇 번이나 생각하며 돌아왔다. 지하철 역에서 학교 앞까지 15분 남짓. 날이 좋아 걷기로 했다. 평일 낮에 이렇게 찬찬히 기다란 길을 걷는 게 얼마만인지. 내 발소리에 귀까지 기울이며 아이를 만나러 힘차게 발을 굴렀다. 3월이 되어 누그러진 바람에서 봄내음을 맡으며 기분 좋은 상상을 했다.
교문 앞 수많은 군중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배시시 웃으며 뛰어올 아이의 모습.
손잡고 간식을 사 먹으며 학교 이야기를 찬찬히 미소 지으며 듣는 내 모습.
이 모든 것을 상상하니 다음 날 돌아갈 일상이 보기 싫어졌다. 다른 일상으로 하루를 지냈다고 원래 내 삶이 덜 소중해 보이고 가치 없이 느껴졌다. 가지지 못한 일상이 더 보람있어 보였다. 갑자기 뾰족해진 마음으로 매일 이렇게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이는 찰나 진지하게 얘기하던 친구 모습이 떠올랐다.
매일 하교하는 아이를 교문에서 만나다 보면 그새 감사함을 잊겠지. 산책을 이처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겠지.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이적 '당연한 것들' 노래 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가 살아왔던 평범한 나날들이 다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버렸죠
내가 살아왔던 평범하고 당연한 일상이 있기에 작은 일탈이 더욱 빛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다.
*사진 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