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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봉 Jun 24. 2023

수술 후 하루 휴가를 떠났다.

얼마 전 비교적 간단한 수술인 자궁근종 제거 수술을 했다. 당일 퇴원이라 집으로 바로 올 계획이었다. 같은 수술을 했던 이모님이며, 친구들이 조언했다. 아무리 간단한 수술이라도 전신마취 하고 출혈도 있기 때문에 푹 쉬어야 한다고. 집에 가면 아이들이 찰떡처럼 붙어있어 몸조리하기 어려우니 수술 당일만이라도 혼자 쉬라고. 수술은 뒷전이고 철없이 혼자 잘 수 있다는 말에 히죽 거렸지만 결정은 쉽지 않았다.




퇴원 수속을 밟으면서도 숙소를 예약 못하고 망설였다. 이른 새벽부터 나오느라 보지 못했던 아이들이 눈앞에 아른 거리기도 했고, 한 편으로는 이 정도 수술 가지고 유난인가 싶기도 했다. 병원을 나서는데 같은 병동으로 입원 수속을 밟는 할머니와 딸을 마주쳤다. 할머니가 전화기를 놓지 못하고 집에 남은 가족들을 걱정하자 딸이 혼내듯 말했다.


"엄마는 여기까지 와서 집 걱정을 하고 그래. 엄마 걱정이나 해."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딸의 말이 맴돌았다. 결혼하고 나만의 휴가를 가져본 적이 거의 없고, 쉼 없이 일하고 애들 키우며 십수 년을 보내온 내가 고작 하룻밤의 휴가를. 그것도 수술 후 필요한 요양인데 망설이고 있다니.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살아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서 만난 할머니처럼 많은 대한민국 엄마들이 렇게 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조금은 씁쓸해 지기까지 했다. 집 근처까지 와서는 남편에게 일생일대의 결심을 하듯 말했다.


"나 오늘 하룻밤만 혼자 쉴게."


이 짧은 한 마디 하기가 참 어려웠다. 십 수년이 걸렸지만 결국 내뱉었다.


남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집 근처 가성비 좋은 호텔로 향했다. 로비에 나를 내려주고 떠나는 남편에게 성급히 손을 흔들고 방으로 향했다. 홀로 호텔방에 들어가려니 처음에는 죄지은 사람 마냥 콩닥 거렸지만 이내 입술이 움찔 거리며 나댔다.


들어가자마자 방에서 퀴퀴한 냄새가 낫다. 아... 역시 가성비..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혼자라는 사실이 페브리즈보다 더 강력하다.

수술 후 계속되는 출혈로 몸은 돌덩이에 눌린 듯 힘들었지만 눈은 총총 빛이 났다. 이제부터 뭘 할까. 씨-익


오늘 길에 사 온 김밥을 허겁지겁 해치우고 혹시 몰라 챙겨 온 여벌옷으로 갈아입었다. 눕기를 평생 기다려온 사람 마냥 푹신한 침대에 자유롭게 몸을 내던졌다. 다른 건 몰라도 침구 상태는 괜찮다는 후기를 봤는데 과연 그 말이 사실이었다.  


이따금 상상했었다. 혼자만의 1박을 하게 되면 무엇을 할까. 쉬이 이루어지지 않는 꿈같은 상상을 하며 잠이 들었던 무수한 날들은 이 날을 위해서였나 보다.



혼자서도 잘 있어요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 보고 싶던 티브이 프로그램을 크게 틀어놨다. 소리를 줄이라는 이도, 채널을 돌리라는 이도 없다. 귀한 시간인데 한 가지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책을 읽으며 틈틈이 지인들과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핸드폰으로 드라마 정주행도 시작했다. 어느 하나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시간은 잘도 흘러갔고 어느새 10시가 되면서 초조해졌다. 이 밤의 바짓가랑이라도 질척거리며 부여잡고 싶었다. 그러다 허무하게도 까무룩 잠이 들었다. 한기가 들어 깨니 새벽 2시. 욕심껏 이것저것 했지만 10시 조금 넘어 잠이 든 듯하다. 악, 안돼! 아까운 내 밤! 티브비를 끄고 차분히 앉아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졸음이 다시 몰려오자 이번에는 SNS에 접속해 세상 구경에 나섰다. 슬프게도 눈꺼풀은 잠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수술한다고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시간이 모자라. 시간이 모자라를 연신 내뱉으며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9시가 넘어 겨우 눈을 떴다. '혼자인데 뭣이 급한디.' 하며 침대 속에 숨어 생각보다 많이 읽지 못한 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고요하게 혼자 깨는 것이 얼마만인지. 새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호텔 숙박의 꽃은 조식인데 게으름 피우다 놓쳐버렸다. 입맛 다시며 근처를 어슬렁 거리다 보니 호텔 건물에 설렁탕 가게가 있었다. 몸보신을 하고 싶었는데 잘됐다 싶어 설렁탕 한 그릇을 주문했다. 파송송 들어간 뽀얀 설렁탕 국물에 흠뻑 젖신 밥  한 숟가락을 야무지게 펐다. 오독오독 씹히는 간장 무장아찌며, 서걱서걱 시원한 깍두기를 얹어서 한 입 크게 삼켰다.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자유를 위한 갈망 한 조각이 뜨거운 밥과 함께 내려갔다.

12시 체크인이라는 매력적인 호텔 방침에 따라 부른 배를 두드리며 다시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가 한참을 판다곰처럼 뒹굴거렸다. 집에 돌아갈 시간이 뒤쫓아 오고 있어 조바심이 들기 시작했다. 바닷가 고운 모래를 담아가듯 지금 이 여유를 담아 가져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마다 꺼내 만져볼 수 있도록.






하룻밤의 휴가가 아름다운 신기루로 사라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보고 싶었다며 달려드는 두 아이들을 품에 안으니 두 팔이 꽉 찼다. 혼자만의 시간으로 충만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을 안는 순간 알아차렸다. 나 자신도 소중하지만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있어 내가 된다는 사실을. 혼자만의 시간이 행복했지만, 사랑하는 이들이 있어 더 찬 행복을 느낄 수 있음을.



깨끗하고 조용한 호텔을 나서는 길은 고행길을 떠나는 사람처럼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장난감이 여기저기 밟히고 꺅꺅 거리는 아이들이 있어 정신은 없지따스한 봄햇살 같은 집. 막상 집에 와보니 사람들이 왜 휴가를 떠나는지 알겠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을 더욱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어제도 그제도 늘 그대로인 집은 지겨웠고 내 맘 같지 않은 아이들이 힘겨울 때도 있지만, 그것이 내 삶의 일부고 나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에. 짧은 휴가가 더욱 달콤할 수 있었다.


병원에서 뵌 할머니도 전화기를 내려놓고 아무쪼록 치료에만 전념하셨기를. 퇴원 후에 집 걱정은 옆으로 치워 놓고 안온한 휴가를 맞이하셨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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