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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봉 Sep 12. 2023

여행의 기쁨과 슬픔(2)

태풍 소식을 접한 남편과 나는 오래간만에 사이좋게 머리를 맞대고 대책회의를 열었다.

일단은 숙소 취소가 가능한지 확인해 보고 안되면 'Go!' 하자.

체크인 날짜가 코 앞이라 그런지 두 곳의 숙소에서 모두 환불은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

차라리 잘됐다. 일단 가보자.


회사에 휴가원도 일찌감치 올려놓았고, 아이들도 오랜만의 여행이라 들떠 있었기에 최대한 떠나고 싶었다. 그때부터 우리 부부는 태풍의 움직임을 매의 눈으로 지켜봤다. 한반도를 정면으로 지나가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기세로 매번 날씨 앱을 노려보았지만 한낱 인간이 자연을 이길 수 없거늘. 부질없는 성냄을 반복하다 드디어 태풍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남편이 말했다.


"자, 봐봐. 태풍은 목요일에 와. 우리가 떠나는 화요일은 괜찮을 거야. 다만, 우린 목요일에 강릉에서 속초로 떠나야 하는데 태풍이 와서 위험할 수 있어. 최악의 경우 강릉 숙소에서 추가 1박을 해야 한다는 얘기지. 속초 숙소는 하루 날리는 거고."

"추가 1박에 얼마지?"

"33만 원."

"날리는 속초 숙소는 하루에 얼마지?"

"15만 원"

"..."

그렇게 또 우리는 예기치 못한 부티나는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대망의 휴가날, 새벽 6시에 길을 나섰다. 태풍 소식에 여행을 취소한다는 사람들을 인터넷 카페에서 꽤 봤는데 그래서인지 도로에 차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아침을 먹기 위해 들른 휴게소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움찔했다.

뭐지, 이 찝찝한 느낌은...

안타깝게도 그것은 성질 급하게 예정보다 일주일 앞서 나타난 불청객, 생리가 시작함을 알리는 신호였다. 태풍 너 하나로는 부족했던 것이냐.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정신줄을 부여잡고 도착한 첫 목적지는 대관령 양떼 목장이었다. 남편과 신혼 시절 갔던 아름다운 기억을 떠올리며 대관령으로 들어서는 순간 숨 막히는 절경... 이 아니라 안개에 압도당했다. 꼬불꼬불한 길은 그렇다 쳐도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길을 가려니 이번 여행 운명길 같기도 해서 내 마음도 함께 뿌예졌다. 이러다 죽는 거냐며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다고 난리 치는 아이들을 안심시키면서도 내심 겁이 났다. 비상등을 켜고 체감상 가시거리 5m도 안 되는 길을 기어가다 마침내 안개길을 빠져나왔을 때 모두 함께 만세를 불렀다. 살았구나!



안개 속 포토스팟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양떼 목장에 비바람이 몰아쳤다. 서둘러 얇은 긴팔을 꺼내 입었으나 역부족이었다. 8월 둘째 주에 추위라니 제대로 피서 온 것이 맞다고 우리끼리 위로하며 동면하는 다람쥐들처럼 꼭 껴안았다. 잠시 후, 트랙터 마차라 불리는 대형 트랙터에 올라타 목장 정상으로 출발했다. 긴 시간 차를 타고 온 아이들에게 곧 절경이 펼쳐질 것이라며 큰소리치고 데리고 올라간 곳에서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 마치 산신령이 나타나 금도끼 줄까 은도끼 줄까 할법한 뿌연 우윳빛 절경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여긴 왜 온 거야?" 해맑게 물어본 둘째 아이에게 잇몸을 힘껏 드러내며 웃어 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시작부터 불안했던 대관령을 서둘러 떠나 강릉에 도착했다.

점심때를 놓쳐 아무거나 먹자고 들어간 곳이 하필 소문난 강원도 향토 요리 맛집이라 오후 3시였는데도 손님들이 바글바글했다. 운 좋게 대기줄 첫 번째 서서 십여분 기다리다 자리로 안내 받아 이동하는데 뒤에 있던 젊은 여자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저기요, 저희가 먼저 왔거든요?"

이건 또 무슨 감자 옹심이 뜯어먹는 소리인가. 새치기했다고 억울하게 누명 쓴 게 올해만 두 번째였다. 내가 만만해 보이는 상인가 생각하며 갑자기 남편이 보고 싶었다. 특별히 사납게 생기진 않았지만 툭 튀어나온 이마가 충분히 위협적인 그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했던 순간이었다. 다행히 옆에 있던 남자가 자신들이 늦게 온 게 맞다고 사과하며 여자를 말렸다.


하마터면 못 볼 꼴 당할 뻔했던 식당에서 눈에 띄지 않게 코 박고 음식을 먹고 있을 때 사무실 동료가 메시지를 보냈다.

- 강릉 잘 도착했어? 좋겠다~~

- 응, 방금 와서 점심 먹는 중. 사무실 별일 없어?

- 오늘 엄청 조용해. 쥐새끼 한 마리도 없어.

순간 강릉을 벗어나 쥐새끼 한 마리도 없는 사무실로 순간 이동 하는 꿈을 꾸었다. 번잡스러운 일상에서 벗어나 힐링을 취하려고 했는데 밖에 나오면 다른 데서 번잡스럽기 짝이 없다. 갈대보기 부끄러울 정도로 출렁거리는 내 마음을 부여잡고 숙소로 향했다.






태풍에 대한 걱정, 아이들이 언제 또 아플지 몰라 불안한 마음을 이고 지고 출발한 여행이라 그런지 어디를 가도 까끌거리는 겨울 니트를 입은 것 같았다. 불운의 씨앗이 우리 가족이 여행을 떠날 때마다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것 같았고, 불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우리는 이렇게 여행을 계속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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