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직장 상사가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고작 한 끼 먹으러 왕복 4시간 걸리는 서울 시내까지 가야나 하는 생각에 며칠 전부터 속이 부대꼈다. 작열하는 태양을 머리 위에 이고 지고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걸음마다 툴툴거렸다.
정여울 작가의 '마흔에 관하여'를 절반 즈음 읽었을 때 광화문역 도착 안내 방송이 들렸다. 역에 내리자 예상치 못하게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지하철을 타고 온 건 오랜만인데 어제 온 것 마냥 친숙했다.
그러고 보니 학생 때 광화문에 자주 왔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엄마는 광화문에 조그만 가게를 하나 차렸다.
결혼과 함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쭉 전업주부로 지내던 엄마가 한 번은 지인이 관리자로 있던 운수회사에서 세 달간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일주일 후 첫 주급이 들어 있는 얇은 누런 봉투를 흔들며 집에 왔다. 손가락에 침을 묻히고 돈을 세다가 미어캣처럼 목을 쭉 빼고 앉아 보이지 않는 침을 흘리고 있던 남매를 발견했다. 의기양양한 미소와 함께 우리에게 만 원짜리 한 장씩 하사했다. 그 당시 만 원은 초등학생에게 엄청나게 큰돈이었다. 엄마가 유쾌하게 자신만만한 얼굴을 내비친 것도 보기 좋았고, 예상치 못한 용돈은 더더욱 좋았다. 큰돈을 공으로 받아 무엇에 썼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노란 봉투와 엄마의 미소,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돈을 받던 오빠와 내 모습만이 날이 갈수록 선명해진다.
엄마는 아르바이트 후 우리가 크면 일을 다시 하고 싶다고 얘기하곤 했다. 그런 엄마가 가게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장소가 광화문이라 좋았다. 교보문고를 실컷 갈 수 있다는 철없는 생각뿐이었다. 가게를 핑계로 광화문역에 매일 드나들었다. 미리 도착해 교보문고에서 놀다가 가게 문 닫을 시간이 되면 퇴근하는 엄마를 만나 함께 집에 갔다. 오랜 시간 잊고 있었는데 그 장소에 도착하니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선연했다.
배고프냐고 빨리 가서 밥 해 먹자는 엄마의 다정한 말, 어제는 왜 늦게 들어왔냐고 옆구리를 쿡쿡 찌르던 엄마의 잔소리, 건물 관리인하고 싸운 얘기를 하던 엄마의 한탄.
빠르게 오가는 인파들 사이로 모녀의 실루엣이 보이는 듯했다.
뉴욕이나 파리의 명소도 아닌, 어디에나 있는 허름한 지하철역 계단에서 엄마를 떠올렸다. 추억의 장소로 떠올리지 않을 법한 이곳에 우리도 모르는 추억이 오래도록 묻어 있었다. 새삼 혼자 옛 기억을 더듬고 있다는 생각에 잔잔한 외로움이 일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전화했을 것이다.
"엄마, 뭐 해? 나 지금 우리 맨날 같이 지나던 광화문 거기 지나는 중이야. 서울까지 왜 왔긴. 먹고살려고 왔지. 밥 먹었어?"
생각에 잠겨 느릿느릿 걷다 시간이 지체되었다.
약속 시간까지 남은 건 단 20분. 잽싸게 교보문고에 들러 아이들에게 줄 소소한 선물을 샀다. 작가가 꿈인 첫째에게는 아이 이름을 곱게 각인한 샤프를, 이모티콘 작가가 꿈인 둘째를 위해서는 자기를 꼭 닮은 귀여운 스티커를 샀다.
도심 속 인파를 휘적거리며 뚫고 지나 약속 장소에 당도했다. 창가 자리였다. 두 시간 걸린다고 투덜거릴 땐 언제고 고요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솜뭉치 같은 여유가 한 아름 안기는 듯했다.
상사가 조금 후 도착하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명성답게 훌륭한 맛이 났고, 곁들인 화이트 와인은 먼 길 달려오며 머금은 먼지를 상큼하게 털어내 주었다.
다시 2시간을 산 넘고 물 건너 밤 11시쯤 집에 도착했다.
"엄마~!! 왜 이제 와요. 잠 못 자고 있었잖아요."
볼멘소리를 내는 아들딸에게 짜잔 하면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선물을 받아 든 아이들은 잠이 홀딱 깨어 소파 위에 올라가 방방 뛰며 환희의 댄스를 선보였다. 아주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신명 나는 엉덩이춤이었다.
파김치가 된 몸으로 잠을 청하며 오늘 좋았던 일을 손꼽아 보았다.
되살아난 엄마와의 추억, 오가는 길에 읽은 좋아하는 작가 에세이, 해 질 녘 건물 유리벽에 눈이 부시게 퍼지던 붉은빛. 시원한 와인 한 잔, 소소한 선물에 엉덩이를 흔들며 좋아한 아이들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