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책장은 어린 내게 미지의 세계였다. 안방 한편을 차지하고 있던 낡은 5단 책장 안에는 글자가 빼곡한 어른책들,영어 회화책, 여행 일본어책이 섞여 있었다.책이 가득한 내 책장도 버젓이 있었지만 언제나 아빠 책장으로눈길이 갔다. 고학년이 되자 슬그머니 책장 안 어른책들을 몰래 보기 시작했다. 밤마다 엄마 아빠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방으로 가져와 읽곤 했다.
태백산맥,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아리랑, 동의보감, 개미...
그땐 몰랐지만걸작들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호기심에 집어 들고는 이해될 듯 안될 듯한 세상 속에 빠져들었다. 문장의 아름다움을 단박에 알아차리기 힘들었지만 어린 나이임에도 표현할 수 없는 황홀함을 느낄 수 있었기에멈출 수 없었으리라.
엄마는 교육열이 강한 사람이었다. 우리 남매가 글을 깨우치자 집집마다 들이곤 했던 위인전부터 시작해서 역사, 곤충, 세계 문학 전집을 하나둘씩 책장에 채웠다. 넉넉지 않은 살림이라 보다 못한 아빠가 눈치를 보며 엄마에게 말했다.
"인저 그만 좀 사지 그려. 이미 많은디..."
동향 출신이지만 말투는 전혀 다른 엄마가 쏘아붙였다.
"이 양반이 뭘 모르네 그래. 나중에 중학교 가면 책 읽을 시간도 없어. 지금 싹 다 읽어둬야지. 모르면 그냥 가만히 있어!"
아빠는 뒷짐 지고 천장을 쓱 바라보고는 내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털썩 누웠다. 그럴 때면 아빠에게 가서 온갖 아양을 떨며 기분을 풀어주려 노력했다.
"아빠, 내가 사준 책 다 잘 읽을게~~ 엄청 재미있게 읽고 있어."
아빠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했다.
엄마가 시시 때대로 넣어주는 전집들과 아빠의 책들을 하나하나 섭렵해 가며 어느새 자칭 문학소녀가 되었다. 엄마의 예상과는 달리 중고등학교 가서도 책을 가까이했고, 책은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아빠는 달랐다. 그의책장 속 책들은 뽀얗게 먼지를 머금고누레졌다. 가끔 책장 먼지를 털어주던 엄마도 병으로 우리 곁을 떠나고 책들은 아빠의 청춘처럼 잊혀갔다.
그 뒤로 아빠가 책 읽는 모습은 빛바랜 추억 속에서만 볼 수 있었다.
첫 아이가돌즈음 되자 아이에게 읽혀줄 책을 틈만 나면 사모으기 시작했다. 유명 온라인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살다시피 했다. 원하는 책이 없으면 비싸다는 새 전집도 과감하게 구매했다. 옆에서 보던 남편이 한 마디 했다.
"아직 책도 못 읽는 애한테 무슨 책을 이렇게나 많이 사줘."
그 시절 우리 아빠처럼 남편도 항변했다. 책에서만큼은 내 의지가 확고했다. 아이들은 책을 옆구리에 끼고 사는 환경에서 자라났고 책을 읽는다는 건 하루 세끼 밥을 먹듯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빠는 이제 일흔이 넘은 할아버지가 되었다. 맞벌이하는 우리 부부가 휴가를 내기 어려울 때 아이들을 봐주러우리 집에온다. 올해 학교 들어간 둘째까지 글을 스스로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아이 둘 다 제각기 할 일을 다하면 소파에 책을 들고 와 읽는다. 더는 크게 손이 가지 않는 손자, 손녀가 조용히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을바라보며 아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얼마 전에도 아이들 방학이라아빠가 집에왔다. 서둘러 퇴근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보기 드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아빠가 남편 돋보기를 빌려 쓰고는 아이들 사이에 나란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아빠, 책 읽어?"
"어, 그냥 있길래. 대충 보는 거여."
수줍어하며 책을 읽는데 휙휙 넘기는 게 아니라 한 글자 한 글자 정독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편이 읽던 조선왕조실록이었다. 저녁 식사를 다 차릴 때까지 할아버지와 손주들은 참새들처럼 나란히 앉아 책을 읽었다. 잠자리에 들 때도 슬그머니 책을 들고 갔다. 새벽부터 읽으려는 눈치였다. 다음 날 집에 갈 때까지 책 한 권을 다 읽고는 "읽을만하네." 한마디 툭 던졌다.
얼굴엔 아주 오랜만에 보는 그만의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엄마의 열정적인 책 제공과 아빠의 고급스러운 책장 컬렉션 속에서 나는 문학소녀를 꿈꾸며 자랐다. 없는 살림에 남매를 소위 책벌레로 키우느라 정작 아빠는독서에 빼앗겼던 마음을 하릴없이수거했으리라. 그들 덕에 책이 주는 기쁨을 마음껏 먹고 마시고 자란 나는 여전히 책을 통해 인생을 배우고 다친 마음을 치유하며살아간다. 그리고 그 잔잔한 환희를 아이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아이들은 어미새가 물어다 주는 모이를 입을 쩍쩍 벌리고 받아먹는 새끼들 마냥 활자가 주는 신비함을족족 받아먹는다. 손주들이느끼는 희락이 칠순의 할아버지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것이 조부에게서 온 것임을 아이들은 알까.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사랑이 순환하는 것을 목격한다.책에 담긴 온기는 식지 않고 세대를 돌고 돈다.
다음 주 친정에 방문하기로 했다. 신발장 한쪽에 아빠가 좋아할 만한 책 다섯 권을 골라 쇼핑백에 넣어챙겨두었다. 아빠의 책장이 부활하기를 소망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