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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봉 Oct 12. 2023

다시, 글쓰기

요즘 한창 영어 원서 읽기에 재미를 붙인 5학년 첫째가 속상하다며 얘기했다.

"엄마, 나도 겨울왕국이나 해리포터 이런 책 당장 읽고 싶은데 너무 어려워서 힘들어요."

"OO아, 너는 학원도 안 다니고 집에서 영어 공부 시작한 지도 몇 달 안 되었는데 벌써부터 높은 수준에 도달하길 바라는 건 좀 무리인 거 같아. 몇 달이라도 더 노력해봐야 하지 않을까?"


아이에게 얘기를 하는데 목덜미가 후끈거렸다. 애한테는 잘도 읊어대면서 왜 스스로에게는 못했던가.




몇 달 전 온라인 글쓰기 강좌를 수강했다. 첨삭 강의인지라 내 글이 한 문장 한 문장 물어 뜯기고 나면 후련하지 않을까, 글을 더 잘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안고 시작했다. 막상 내 차례가 되어 여러 수강생들 앞에 올려진 내 글을 마주하자 마치 발가벗은 듯 몸이 웅크려졌다. 이어진 첨삭에 내 몸은 점점 더 말려들어갔다. 예상치를 뛰어넘는 양의 지적이 탑처럼 쌓였다. 고칠 점이 많다고 생각했고, 수업을 들으며 발전하고 싶었는데 왜 나는 당황부터 하는가. 부끄러운 마음을 고이 접어 넣어놓고, 첨삭받은 부분을 개선하면 글이 나아질 테니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애써 다독이며 수업을 마무리했다. 옆에서 떠드는 아이들 때문에 놓친 부분이 있어 다음 날 올라온 녹화 영상을 다시 들어보았다. 들으면 들을수록 길 잃은 고양이처럼 방향을 잡을 수 없었다.


지나치게 감정적인 내 글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가.


문제점은 알겠는데 힘 빼고 담백하게 써야 한다는 말이 외국어처럼 겉돌았다. 힘들긴 했지만 즐거웠던 글쓰기가 고압적인 상사처럼 느껴졌고, 글을 쓰면서도 끊임없는 자기 검열에 내 글이 싫어졌다.

잘 쓴 글은 아니어도, 많은 이들이 사랑해 주는 글은 아니어도, 나는 내 글을 사랑했다. 지난날 아픔을 내보이고 지나쳤던 감정을 다시 들여다보며 자가치유의 신통함을 맛보았다. 행복했던 찰나의 순간을 담은 단어들이 글 안에 고이 간직되어 영원으로 남을 것 같았다.

강의 후에는 그동안 쓴 모든 글들을 당장이라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싶었다.


크고 작은 비판, 그것을 넘어 힐난을 받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선생님이 애정 담아 해 준 조언이 그렇게 싫었나. 내가 그렇게 속이 좁은 사람인가. 하는 생각에 이중 삼중으로 괴로웠다.


속 편하게 글쓰기 슬럼프라고 생각하고 글쓰기와 데면데면 내외하듯 여름을 보냈다.



아이에게 다시 다가가 말했다.

"엄마도 글쓰기에 별 노력도 안 했으면서 내 글이 형편없다는 불평만 하고 있었던 거 같아. OO이랑 얘기하면서 뭐가 잘못된 건지 깨달았어."

"엄마, 그럴 수도 있지 뭐. 다시 하면 되잖아요~."

잔소리에 시무룩했다가 엄마도 자신과 같은 '과'라는 걸 확인하고는 금세 화색이 돈 아이가 나를 위로했다.


입버릇처럼 말하던 슬럼프의 정확한 의미를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검색해 보았다. 슬럼프는 나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여 발생하는 부진의 상태가 오랜 시간 이어지는 현상이라고 한다. 슬럼프가 아니었다. 실력이 쌓일 만큼 노력을 쏟아부었는가라는 자문에 소리 없이 고개를 젓게 되는 걸 보면.  


문제점만 지적당하고 해결책을 제시 못 받았다고 투덜대던 나를 떠올렸다. 그럴수록  글을 더 썼어야 했다. 장벽에 가로막히니 죄 없는 글들을 하찮게 여기고 노력다운 노력도 안한채 판을 떠날 생각을 하지를 말았어야 했다. 글 쓰는 일이 고통스러웠다면 그 처절한 고통을 글로 풀어냈어야 했다.


은유 작가의 '글쓰기의 최전선'에 정성스레 줄까지 그어 놓은 문장들이 오늘따라 눈에 띈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초라하게 느껴져도 자기 능력에서 출발하기. 일단 써봐야 어디까지 표현이 가능한지, 어디가 약한지, 어디가 좋은지 볼 수 있다. 글쓰기 초기 과정은 '질'보다 '양'이다.'


아이가 수준 높은 영어 원서를 읽기 위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나가야 하듯, 나 역시 잘 쓰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현재 서있는 지점에서 다시 출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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