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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봉 Sep 25. 2023

우리 가족은 파티광

우리 가족은 파티광이다.


광란(?)의 피자파티 현장

- 얘들아, 오늘 파티해야지. 엄마가 피자 시킬게. 블루레모네이드도 사 왔지~

- 엄마, 왜 또 파티야?

- 오늘 참관수업 날이라 학교 가보니 너희가 정말 성실히 수업 듣더라. 그게 너무 대견해서 칭찬하는 파티야.

- 엄마, 그건 당연한 거 아니야?

- 아니야~ 학교에서 바른 자세로 앉아 선생님 말씀 잘 듣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너무 잘하고 있어.



지난주에도 파티가 있었다.

파티 목적은 난생처음 받아쓰기 시험 본 둘째에게 주는 응원이었다.

점수와 관계없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열심히 연습했기에. (물론 학교 숙제였지만)


시도 때도 없이 파티가 열리니 성대할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빈털터리가 되어버리겠지. 너무 호들갑 떨지는 않지만 사소한 애씀도 소중하다는 메시지를 줄 수 있는 만큼의 규모로 파티를 연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 한 가지. 또는 조그만 조각 케이크와  한 개.






어릴 적 경험이 없었더라면 아이들의 사소한 일상을 이리 자주 축복해 줄 수 있었을까.


엄마는 우리 남매가 싸우거나 어른들에게 버릇없이 굴면 꽤 엄하게 혼냈지만 공부하라는 잔소리보다는 새로운 간식을 만들어주는데 더 애를 쓰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엄마가 연년생인 나와 오빠가 중학교에 차례로 입학하면서 달라졌다. 중학교는 살고 있던 아파트 단지 바로 앞에 위치했다. 오빠가 중학교 입학한 후 첫 중간고사 점수가 나오던 날 우리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전화기가 끊임없이 울렸다. 수많은 같은 단지에 사는 엄마들이 경쟁적으로 물었다.

"OO는 이번에 몇 점 받았어? 반에서 몇 등 이래?"

엄마는 적잖이 놀랬을 터였다. 친하게 지내는 동네 아줌마들이 평소에는 자신의 아들, 딸들이 공부안 한다고 그렇게 모여 험담을 했는데 정작 결과는 본인 아들이 제일 낮았으니. 그때부터 엄마의 교육열은 활활 타올랐다. 지역적인 한계나 경제 능력의 제한으로 '스카이 캐슬'의 꿈까진 펼치지 못했지만 엄마는 분명 변했다.


그때부터였다. 엄마와 나 사이에 메워지지 않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건. 성적이 기대치에 못 미칠 때마다 찡그리던 눈빛만큼 깊게. 학교도 집도 가시덤불 같았던 고등학교 시절 나는 한동안 방황했다. 궤도 밖으로 나가있다고 평안에 이른 건 아니었다. 도서관 책들처럼 빼곡하게 둘러앉아 책상에 코를 받고 공부하는 친구들은 늘 그 자리에 있었고, 어김없이 돌아오는 성적표는 누더기처럼 너덜거렸다.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억지로 제자리에 돌아오긴 했지만 내게 공부의 의미는 텅 빈 공과도 같았다. 강 위의 반짝이는 윤슬 같은 배움의 기쁨은 훗날 대학에 가고 성인이 되어 깨달았다.




결혼 전부터 아이를 낳으면 공부를 최우선으로 삼지 않겠다고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 모두에서 되뇌었다. 이상과 현실은 달라서 시행착오도 하고 일관성이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 여전히 높은 성적이나 선행보다 아이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진도는 성실하게 따라갈 것.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눈을 바라보기. 시험 점수에 연연하지 말되 주어진 시험을 위해 준비하는 사람이 될 것. 자기가 좋아하는 만화 그리기, 글쓰기, 만들기 등을 집중력 있게 꾸준히 하는 힘을 기르기.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할 것.


이런 것들을 성실히 수행해 낼 때 파티를 열어 축하해 준다.


화려한 미러볼이 넘실 거리는 웅장한 파티는 아니지만, 진정한 축하와 기쁨이 넘치는 따뜻한 파티에서 아이들이 야무지게 챙겨갔으면 하는 것들이 있다.


행복한 삶이란 1등 하고 좋은 대학 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족할 수 있고 조금씩이라도 성장하는 삶이라는 것을. 작은 성취에도 기뻐할 줄 알고 그것을 발판으로 더 큰 배움의 환희를 느끼는 아이로 자라나길. 다른 이의 크고 작은 결실도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는 아이가 되길. 좋은 대학에 진학해야지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사랑함을 알도록. 자신의 소중한 경험을 주변에 나눌 수 있기를.





내가 1등 했을 때 기뻐했던 엄마의 얼굴보다

아무 이유 없이 안아주던 엄마의 미소가 더욱 선명하게 빛나기에,


우리 아이들이 사소한 일로도 축하하고 격려해줬던 부모의 얼굴을 기억하고

고꾸라 질 때마다 그 기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다음 주에는 또 어떤 파티가 열릴지 내심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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