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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댁 Oct 10. 2021

그래, 일단 노트북부터 열자.

감정 쓰레기통 열기

얼마만이지? 브런치에 다시 로그인한 게.

아버지의 췌장암 소식과 함께 우울함 가득 담은 글을 남긴 게 작년 말이었으니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아버지는 시한부 6개월을 선고받았지만 억척스럽게 항암을 견뎌내며 아직 살아계신다. 벌써 항암치료를 몇 번째 받았는지 이젠 세는 것도 무의미할 정도다. 이럴 때 보면 존경스럽다.


우리 사이가 썩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게 삶의 의지를 잃지 말고 살아가시길 소망한다. 더 욕심부려 보자면, 그러다 어느 날 때가 왔을 때 편안히 가실 수 있기를.




뭔가 끄적거리는 걸 좋아했다. 심플한 노트, 똥이 덜 나오는 펜을 찾는 건 나름의 취미이기도 했다. 다이소에서조차 심사숙고하며 노트를 골랐었다. 그랬는데, 심플한 이 노트에 담을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정성스레 눌러 담은 단어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심플한 그 노트들은 무엇 하나 쓰이지 않은 채 그렇게 책장에 있다. 똥이 덜 나오는 펜은 그나마 남아 옆을 지키고 있지만, 과거처럼 감정이 담긴 문장은 쓰지 않는다. 간간히 제 힘을 발휘할 때는 일로 만난 단어를 끄적거릴 때 정도다.


블로그를 하고 있다. 감정을 표현한 문장을 남겨왔으나, 나도 결국 인기와 수익에 목마른 서민이라 조회수에 민감하게 되었다. 관심 없는 정보성 글을 적당히 베끼고, 굳이 궁금하지 않은 투자 정보를 끄적거려 올렸다. 월급 만 원, 이만 원 수준 수익에 만족하더니 이내 흥미를 잃었다.


뭔가 끄적거리는 걸 좋아했는데, 글쓰기가 싫어졌다. 일로 만난 단어와 문장만 몇 년째 고민하고 쓰다 보니 싫어졌다. 고민하는 과정 자체도 귀찮아졌는지 어제 생각해낸 단어는 오늘 만든 문장이 되고 내일 만들 보고서의 제목이 되었다. 감정을 담을 진중한 글쓰기를 할 여력이 생기지 않았다. 뭔가 끄적거리는 걸 좋아했는데, 이젠 노트북을 여는 것조차 귀찮기만 한 부정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글쓰기는 나름 감정을 배설할 통로 중 하나였다. 이게 막혀버리니 케케묵은 녀석이며 막 들어온 신참내기 감정까지 다 쌓이기만 했다. 켜켜이 쌓인 감정들은 변비처럼 더부룩함과 통증을 유발했다. 아픈 나머지 감정을 배출하려 안간힘을 써봐도 소용이 없었다. 나 홀로 집에 있을 때, 간간히 보는 예능이나 드라마에서 눈물샘 버튼을 눌러줬을 때 미약하게나마 가벼움을 느끼는 정도였다. 그마저도 공허함이 되돌아오는, 썩 좋지 않은 느낌이었다.


내 속에 있는 감정 쓰레기통은 꽤 큰 줄 알았는데, 문득 생각해보니 그저 그런 평범한 사이즈였나 보다. 넘쳐흘러 바닥을 더럽게 만드는 날이 자주 있었다. 주기적으로 비워줘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었으리라. 내 쓰레기통에 나도 너도 다 버려라! 한 적은 많아서 채우는 법은 잘 아는데, 어떻게 비우는지는 모르겠다. 생각해본 적이 없다. 누군가한테 막 쏘아대고 쏟아내면 되는 건가. 그럼 다시 텅 빈 쓰레기통 들고 시작할 수 있나. 근데 누구한테 쏘아붙이지? 이 방법이 맞긴 한 건가?




그래, 일단 노트북부터 열자. 뭔가를 끄적거리다 보면 쓰레기통이 비워지지 않을까 싶다. 우울한 감정을 배설하고 한바탕 속이 시원했던 작년 11월 브런치의 글처럼. 아니면 다시 다른 방법을 찾아보면 되지 뭐. 해왔던 대로 블로그에 흥미 없는 글도 다시 써보자. 끄적임에서 위로를 받을 생각 말고, 끄적였더니 주는 물질적 보상에서 위로를 찾아보자. 가끔 너무나 힘에 겨워 아픈 날에는 책장 속에 잠든 심플한 노트를 꺼내보자. 내 옆의 펜을 쥐고 일로 만난 단어가 아닌 감정으로 만난 문장을 남겨보자.


일주일에 한 번 쓰기! 이런 계획은 하지 말자. 분리수거가 매주 화요일이라고 해서 감정 쓰레기통도 매주 비울 필요는 없다. 넘쳐흐르고 있다면, 넘치기 직전이라면, 때론 하나만 남은 쓰레기조차 비우고 싶을 때가 있다면 그때 비우자. 이성적 Plan 말고 감성적 의지가 있을 때. 해보는 거다.




오랜만이야 브런치! 오늘부터 우리 다시 1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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