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비가 내렸다.
내 걸음에 맞춰 함께 튀는 이 비가
조금씩, 나도 모르게 나를 적신다.
나는 천천히 우산을 내린다.
비는 영향력을 행사하듯
부드러운 빗방울로 나를 두드린다.
아무 말 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킨다.
작고 부드러운 빗방울이 내 손에 닿았다.
피부 위에 스며들 것 같이 천천히 흘러내려
처음엔 미세한 움직임 같았으나,
이내 온몸으로 번져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 비는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나를 위해 내리고 있었고,
나는 그저 비를 맞았다.
따뜻한 가을비가 나에게 천천히 스며들도록,
그저 가만히 두었다.
없던 심장병이 생긴 건지,
비에 젖어 떨리는 건지,
심장 소리가 내 말소리보다 크게 울려댔다.
동시에 머릿속엔 수많은 생각들이 떠들어대며,
내가 하는 말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출처 모를 고민들과 걱정들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들이.
이 떨림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전에
한꺼번에 나를 덮쳐왔다.
그때, 여태 내 곁에서 가만히 내리던 비와 빗방울이 모여
파도같이 나를 안아주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모두 씻어내 나만 남기고,
모든 것을 지워버릴 만큼 큰 파도가
내 품으로 안겨들어올 때,
그제야 알았다.
이 비가, 너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