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을 정의 내릴 수 있을까.
‘큰길에서 들어가 동네 안을 이리저리 통하는 좁은 길.’
사전의 짧은 정의에는 무려 네 가지의 조건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큰길에서 들어간 곳이어야 하고, 동네가 있어야 하고, 이리저리 통해야 하고, 좁아야 한다니. 그러니까 나무로 치면 기둥보다는 가지에 가까운 길, 쭉 뻗은 시원시원함보단 구불구불한 답답함이 매력인 길, 어디선가 소형차 한 대가 잘못 들어섰다가 낑낑 대고 있을 법한 아담한 폭 정도는 돼야 ‘골목’이라고 이름 붙여줄 만하다는 거다.
삐빅- 당신은 '골목'입니다.특히 그중에 ‘동네 안’이라는 조건이 맘에 쏙 든다. 사람이 살고 있어야 골목일 테니까. 최근 지자체에서 너도나도 관광상품 개발을 위해 조성한 ‘옛 골목’들을 가보면, 주민들은 어디 가고 깔끔하게 리모델링된 구식 가옥만 늘어서 있는 경우를 많이 봤다. 사람의 숨이 닿지 않는 골목에 물감칠 망치질 해놓는다고 죽은 길이 다시 숨을 쉴까. 덩그러니 길만 남은 골목을 조금 걷다가 어디에도 감정을 내어주지 못하고 허탈하게 발걸음을 돌렸던 기억이 많다.
이렇듯 골목의 비좁은 의미에 충실해서, 오늘은 내가 걸어본 다섯 곳의 사랑스러운 골목을 구독자분들께 소개하고 싶다.
어서 마중 나가 데려오고픈 달, 10월. 여전히 여행이 조심스러운 시절이지만, 바깥을 한가로이 걷는 순간까지 포기하기엔 불어오는 바람의 온도가 아깝기에 이 글을 띄운다.
1. 통영 봉숫골
내겐 마음속의 보석함 같은 동네.
집과 집을 나뭇가지처럼 잇는 골목들을 걷다 보면 마주치는 것들이 하나하나 사랑스럽다. 몇십 년은 지났을 법한 동네 식당. 원주민으로 보이는 어르신들. 거기에 노란 동네 책방과, 타일이 둘러싼 미술관, 큰길 뒤에 숨은 살롱, 아담한 카페들이 최근 몇 년 새 차례차례 들어섰다. 어느 것 하나 동네 분위기와 불협화음을 내지 않고 잘 스며들어 있다. 거기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일조량이 풍부한 통영의 햇살까지 골목 구석구석에 보태지면 더할 나위가 없는 하루가 된다.
봄날의 책방 | 출판인 아내와 건축가 남편이 운영하는 책방. 낡아만 가던 동네에 새 숨을 불어넣은 봉숫골의 효자다. 어느덧 김훈, 정유정 등 숱한 유명 작가들이 찾는 명소가 됐다.
내성적싸롱 호심 | 일러스트레이터 밥장님이 봉숫골에 정착해 운영하는 고풍스러운 살롱. 카페이자 펍이자 토론장으로 활용된다. 가게가 이름처럼 내성적인 골목에 숨어 있다.
통영에는 봉숫골보다 더 유명한 '핫플' 골목들이 많다. 벽화마을의 원조격인 동피랑, 개인적으로 더 아늑하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맞은편의 서피랑 골목도 있다. 그래도 하나만 고르라면 나는 봉숫골이다. 정식 명칭이 아니라 지도에도 잘 검색되지 않지만, 누군가 내게 점점 소중하게 다가올수록 손을 이끌고 데려가고 싶은 마음속 첫 골목인 것만은 분명하다.
2. 춘천 망대골목
내년부터 휴직하고 2년간 살겠다고 마음을 먹은 동네는 결국 춘천이었다. 그중에서도 ‘약사리’라고 불리는, 도심 한가운데 봉긋한 언덕에 섬처럼 남은 이 동네.
약사리는 큰길을 두고 양갈래로 언덕이 나뉘는데, 그중 서쪽 언덕이 망대골목이다. 골목 꼭짓점에는 이름처럼 낡고 아담한 전망대가 있고, 그 아래로 구불구불 좁은 길이 몇 갈래로 나 있다. 녹슨 마을에는 대개 어르신들만 남아 있지만, 겹겹이 쌓인 지붕 사이사이로 펼쳐지는 하늘만큼은 청춘처럼 푸릇하다. 이 다정한 골목은 한 때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돼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었다가 최근 개발 계획이 취소되며 헐리지 않고 남게 되었다.
기대수퍼 | 높다란 언덕에서 나지막이 사는 주민들. 주인 할머니는 ‘없는 사람들끼리 서로 기대어 살자’며 구멍가게 이름을 지었다고 하신다.
죽림동성당 | 골목 맞은편에 있는 100살 넘은 성당. 돌로 만든 성당 지붕에서는 정각마다 종이 울리고, 뒤뜰에는 이곳에 머물다 신의 곁에 먼저 이른 성직자들의 묘지가 있다.
약사리는 춘천이라는 꽤 번성한 도시의 도심 한가운데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낡았다. 그 낡음이 지속가능한 자산이 되려면, 통영의 봉숫골처럼 누군가는 숨을 불어넣어야 할 것이다. 내년부터 1년 반의 휴직을 앞두고, 우리 가족은 큰 빚까지 내어가며 망대골목 맞은편 언덕에 자그마한 폐가 하나를 샀다. 거기를 고쳐 함께 책을 읽는 공유서재와 잠자리를 내어주는 공유다락으로 꾸밀 생각이다. 나야 복직을 위해 언젠가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야 하겠지만, 우리의 좁은 공간이 이 골목을 숨 쉬게 하는 혈관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만은 오래오래 지켜내고 싶다.
3. 서울 후암동 골목
서울에도 머물고 싶은 동네가 생겨서 다행이다.
서울 토박이로 살아오면서도 서른 살 넘어서야 처음 발견한 후암동은, 복잡한 이 도시가 내게 건넨 두 번째 안식이자 깜찍한 선물이었다. 남산 자락을 따라 서울역까지 길게 뻗은 미로 같은 골목은 수십 번을 더 걸었지만 아직도 새로운 가짓길이 스멀스멀 나타난다.
후암동 골목의 정서는 ‘공유’라는 단어에 가까이 닿아 있다. 벽 하나에 여러 집의 전력량계가 다닥다닥 붙어있다든지, 옆집과 담을 나누어 쓰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다. 땅이 좁고 가파르다 보니 그랬을 텐데 골목여행자의 시선으로는 한없이 정답기만 하다. 평지로 내려오면 비교적 최근에 생긴 공유서재와 공유주방들도 눈에 띈다. 작은 공간을 여럿이 나누어 쓰는 후암동의 정서가 젊은 크리에이터들에게도 스며든 걸까.
108하늘계단 | 남산 방향으로 갑자기 가팔라지는 오르막에 108개의 계단이 있다. 서너 명 들어가면 꽉 찰 법한 승강기가 계단 끝과 끝을 부지런히 오가며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춘광사설 | 골목 본새가 홍콩의 캐슬로드를 닮았기에 이 가게가 여기 있는 걸까. 장국영을 사랑하는 주인이 홍콩의 골목 가게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만 같은 술집을 후암동에 차려놓았다.
후암동 뿐 아니라 남산 자락에 걸친 골목들은 하나같이 톰보이의 파마머리처럼 귀엽고 구불구불하게 내리 뻗어 있다. 신당동의 다산성곽길, 회현동 만화골목, 그리고 지금은 워낙 유명해져서 사촌 땅도 아닌데 배까지 아픈 해방촌까지. 어디라도 좋다. 언젠가는 꼭 “어디 살아?”라는 질문에 “남산 아래”라고 대답하는 사람이고 싶다.
4. 제주 저지리-조수리 사잇길
누군가에겐 한라산, 누군가에겐 푸른 바다겠지만 나에게 ‘다시 찾고 싶은 제주'는 저지리의 오두막 민박집에서 조수리의 작은 책방을 잇는 사잇길이다. 이 골목에서 며칠 머무르던 기억이 기약 없이 맑았기 때문일 것이다. 쭉 뻗은 2차선 도로로 20분이면 다닐 수 있는 길이지만 이왕이면 올레길 13코스로 구불구불 돌아가는 골목을 권한다. 북적이지 않는 제주의 돌담과 모진 바람과 평온함이라니.
꽃신민박 | 큰 나무 높이의 2층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곳. 주인장이 사랑하던 사람이 지어주고 떠난 오두막이라고 한다.
유람위드북스 | 다시 찾았을 때는 워낙 유명해져서 앉을자리조차 찾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제주 구도심의 바라나시와 함께 늘 마음속에 1순위로 품고 있는 제주의 북카페.
5. 공주 '잠자리가 놀다 간 골목'
이 골목을 쓸까 말까 한참을 망설였다. 아직 한 번 밖에 가보지 못해서 소개하기가 민망했고, 그만큼 정이 많이 든 것도 아니라서. 그래도 끝자락에 적어두기로 한 이유는 막 다듬어지기 시작한 골목의 앞날을 한껏 응원하고 싶어서다.
골목은 역시 필카로 찍는 게 만족도가 더 높다.
낡고 퀴퀴한 골목 어귀에는 로컬 크리에이터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모양이다. 동네 책방, 한옥 찻집, 수공예 공방… 간판 하나, 가게의 콘텐츠 하나하나에서 동네의 기원을 해치지 않으려는 그들만의 철학이 언뜻 느껴진다. 골목 이름도 모기 한 마리 없을 것만 같이 어찌나 귀여운지.
골목의 끝은 제민천이 가로지르고 있다. 끝까지 걸으면 금강이다. 왜 강 이름에 금칠을 해놓았는지 여기 와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추신.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하는 건 늘 부끄럽지만, 그래도 저는 '골목여행자'라는 말에 착 달라붙는 사람이고 싶어요. 그래서 저 역시 누군가의 골목을 추천받고 싶답니다. 당신의 흔하거나 흔치 않은 골목들에 대해 귀띔해주시면 아껴 적어두었다가 하나씩 찾아갈게요. 우리나라든 물 건너든 어디든요. 언젠가 거기 이를 때엔 알려주신 분 이름을 세 번 되뇌며 넙죽 폴더인사 하고 걷겠습니다.
걷는 것만으로 사랑스러운 계절이 저기서 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