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묭 Feb 07. 2021

세상에 없는 뉴스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로드맨>, <앵커로그> 기획PD를 마치며


<로드맨>과 <앵커로그>.

제가 다니는 회사의 메인뉴스인 <뉴스데스크> 주말 코너들입니다. 제가 직접 발제해서 기획하고 뉴스PD의 역할을 해왔지요. 진부한 표현 같지만 자식 같이 아껴온 코너들이랍니다. ‘이제껏 아무도 보지 못한 뉴스’를 만들겠다며 건방지게 코너 기획안을 내고, 팀원을 정하고, 첫 방송을 내보낸 뒤 2년 4개월 동안 이 일에만 매달려왔거든요.

생애 첫 휴직을 2주 앞두고, 어제  <로드맨>과 <앵커로그>의 마지막 편집을 마무리했습니다. 늦은 밤 사무실을 나서니 시원섭섭한 마음이더군요. (물론 ‘시원’은 대문자고, ‘섭섭’은 소문자 정도였지만요). 다행히 저보다 더 나은 동료 기자가 흔쾌히 제 역할을 대신해주기로 했기에 떠나는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능력자들이자 인격자들인 팀원들도 그대로 남아있고요.

2018년 가을 처음 방송된 <로드맨>은 국내 종합방송에서 처음 선보인 예능형 뉴스였습니다. 기획 단계에서 저희의 문제의식은 두 가지였어요. 먼저  ‘꼭 알아야 하는 뉴스’를 최대한 가볍고 친밀하게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당시에는 뉴스의 연성화가 비판을 받던 시기였습니다. 형식은 ‘엄근진’하면서 막상 내용은 사회적 민감도를 한참 비껴 난 생활정보형 소식들만 쏟아내고 있었지요. ‘똥폼은 다 잡으면서 할 말은 못 하네?’라는 조롱이 넘쳤습니다. 이런 시선을 뒤집어보고 싶었어요. 똥폼 안 잡고, 진지함과 무게감을 덜어내고, 대신 내용은 꼭 알아야 하는 사회적 의제에 대해 묵직하게 다뤄보자고 생각했죠.


'겉은 뉴스인데 속은 뉴스가 아니다'라고 비판 받던 시절.

다음으로 2049, 즉 사회의 가장 큰 소비 주체인 20대에서 40대까지의 시청층을 어떻게 뉴스로 끌어들일지 고민해야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뉴스데스크의 2049 시청률은 1%대로 내려갔거든요. ‘젊은 세대는 어차피 뉴스 안 봐’라고 자조할 수도 있었지만 제 생각은 달랐습니다. 젊은 세대는 뉴스를 안 보는 게 아니라 ‘방송뉴스’를 안 볼뿐이라는 생각이었어요. 분명 인터넷 텍스트 기사로, 혹은 유튜브로 뉴스를 소비하고 있을 거라 여겼지요. 이들의 시선을 어떻게 하면 방송뉴스로 되돌릴지 고민했습니다.

그 결과 뉴스 자막을 예능형 자막으로 바꾸고, 편집의 속도감을 기존 뉴스보다 빠르게 앞당겼습니다. 또 단순한 정보 전달보다 ‘공감’의 정서에 더 반응하는 세대의 특성에 맞춰, 최대한 많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고생하는 기자의 캐릭터를 탄생시켜보기로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방송뉴스와 별도로 ‘유튜브용 뉴스’를 따로 제작하기로 했습니다. 기존 방송뉴스를 재편집하는 차원이 아니기에 많은 공력과 인력이 필요한 작업이었지요. 다행히 <엠빅뉴스>라는 채널에 유능한 디지털뉴스 PD분들이 계셔서 협업이 수월하게 이뤄졌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첫 작품이 <로드맨>입니다. ‘길 위에 답이 있다’는 슬로건을 내세워, 사회적 이슈에 대한 해답을 길에서 찾아나가는 로드무비형 뉴스를 표방했지요. 로드맨 역할은 염규현 기자가 맡았습니다. 생방송에 탁월하고, 다른 기자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끼’가 흘러넘치는 동료 기자입니다. 물론 기자로서의 능력과 진정성도 넘치고요. 아마 염규현 기자가 없었다면 ‘로드맨’의 독특한 캐릭터는 절대 탄생하지 못했을 거예요. 저는 프로그램 기획pd이자 동시에 조연 캐릭터인 <팩트맨>으로 출연했고요.


로드맨 캐릭터를 완벽히 창조해낸 동료이자 친구, 염규현 기자.

<로드맨>은 지난 2년 4개월 동안 70여 차례 방송됐습니다. 제주도 난개발, 도시공원 일몰제, 공공의료, 지역균형발전과 같은 굵직한 주제들을 주로 다뤘어요. ‘입주 사기’에 가까운 선분양제, 임대주민 세대의 비상탈출구까지 막아놓은 아파트 등 고발성 뉴스도 소화했습니다. 미세먼지의 원인을 찾아 중국으로 가고, 한류의 지속성을 고민하며 태국으로 떠나는 등 해외 현지 촬영도 여러 차례 소화했습니다.


위는 '순한맛'으로 불린 TV뉴스 방송분 캡쳐. 아래는 '매운맛'으로 불린 유튜브 버전의 썸네일.

눈에 보이는 성과도 쏠쏠했습니다. 시청률은 물론, 뉴미디어 콘퍼런스에 여러 차례 강연 초청을 받았고, 뉴스 포맷을 해외에 수출하기 위해 이스탄불에서 열리는 미디어 박람회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는 로드맨 뉴스 영상이 교보재로 다수 사용되고 있지요. 무엇보다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유튜브 버전’ 뉴스들의 누적 조회수가 1700만 회를 넘어섰습니다. 이번 설 연휴에는 TV 뉴스 코너 사상 최초로 특집 프로그램으로 별도 편성이 되어 방송될 예정입니다.




<앵커로그>는 지난해 1월부터 <로드맨>과 격주로 돌아가며 방송되고 있습니다. ‘뉴스 앵커의 인터뷰 코너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지시를 받고 기획을 시작했는데요. 이제껏 다른 뉴스들의 앵커 인터뷰 코너를 분석해보니 크게 두 가지 틀을 벗어나지 않더군요. 하나는 ‘셀럽 경쟁’이었습니다. 이슈가 된 뉴스메이커를 누가 빨리 섭외하는지, 혹은 어느 방송사가 조금이라도 더 유명한 사람을 모시는지 경쟁이 치열했죠. 또 하나는 ‘스튜디오 인터뷰’였습니다. 화려한 조명이 감싸는 뉴스 스튜디오에서 멋진 정장을 차려 입고 인터뷰를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문득 이 두 가지 공식을 비틀고 싶었습니다. ‘셀럽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을 앵커가 인터뷰하면 어떨까?’ 그리고 ‘스튜디오에서 정장 차림이 아닌, 현장에 직접 찾아가서 평상복을 입고 인터뷰해보면 어떨까?’하는 발상이었지요. 문제는 시청률이었습니다. 유명하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를 오래 듣고 계실 시청자는 많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서 왜 우리가 그 사람에 주목하는지, 왜 당신이 그 인터뷰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지 충분한 명분을 내세워 설득해야 했습니다.

이미 <로드맨>의 안착으로 한층 더 단단해진 팀이 함께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먼저 ‘그동안 뉴스에서 본 적 없는 사람’들을 인터뷰 대상으로 추리기로 했습니다. 조명받던 사람이 아닌, 조명 바깥의 사람들을 찾아 나섰죠. 그리고 ‘MBC 뉴스가 이 사회에서 숨어 일해온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돌리겠다’는 메시지를 전면에 내걸기로 했습니다. ‘조명 뒤의 사람들을 조명합니다’라는 앵커로그 슬로건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앵커로그의 슬로건.

형식미에서도 변화를 추구했습니다. 방송용 카메라 대신 셀카봉에 미니 고프로 카메라를 달아서 촬영을 하기로 한 겁니다. ‘브이로그’에 익숙한 젊은 세대를 겨냥하고, 가벼운 카메라로 기동성과 현장성을 강화하고, 앵커의 시선과 시청자의 시선을 일치시키겠다는 의도였습니다. 이름 역시 이런 특성을 살려 <앵커로그>로 결정했고요.


(앵커로그 첫 화. 앵커가 뉴스 스튜디오에서 자신을 비추던 카메라 렌즈를 직접 스태프들에게 돌리는 인트로에 저희의 방향성이 온전히 담겨 있습니다.)

앵커로그는 지난해 설날 파일럿 형태로 방송된 이후 주말 뉴스데스크 코너로 정착했습니다. 지금까지 24편이 방송됐죠. 코로나 방역 임무로 일상을 빼앗긴 채 일하는 공무원들, 중증외상센터 간호사, 프로야구 불펜 포수, 섬마을 보건교사, 트라우마를 안고 달리는 기관사 등을 주말 뉴스 앵커가 직접 찾아가 인터뷰하고 함께 체험도 해보았습니다.

그 1년 사이에 브이로그 형태의 ‘셀카봉 뉴스'는 다른 방송사에도 꽤 널리 퍼졌습니다. 앵커가 직접 현장에 나가서 소시민을 인터뷰하는 형식 역시 조금씩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방송뉴스들이 <앵커로그>를 완전히 따라할 수는 없다고 자신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앵커의 진정성이에요. 재작년 여름부터 주말 뉴스데스크 진행을 맡은 김경호 앵커는 근엄하기보다는 부드럽고, 자신감보다는 겸손함이 앞서는 유형의 앵커입니다. 우리나라, 특히 남성 앵커로서는 보기 드문 캐릭터지요. 시청자를 앞에서 이끌기보다 시청자 옆에서 공감해주는 느낌의 앵커는 흔치 않으니까요.


(김경호 앵커의 브런치)


앵커의 진정성이 부족했다면 ‘앵커로그’는 완성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평상복을 입고 현장에 나섰을 때 분위기가 전혀 이질하지 않았고, 뉴스 출연이 처음이라 인터뷰에 어색해하는 시민들의 마음도 스스럼없이 열 수 있었습니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앵커의 마음가짐이 ‘앵커로그’라는 코너에 잘 녹아들었기에, 기획pd 입장에서 매번 만족할 만한 뉴스를 생산해낼 수 있었어요.


(무릎 꿇고 인터뷰이와 시선을 맞춘 앵커의 자세뿐 아니라, 앵커로그가 전하고자 하는 뉴스가 무엇인지 보여줬다고 믿는 '새벽 첫차' 편)




<로드맨>과 <앵커로그>를 기획한 2년여 동안 브런치를 통해 이렇게까지 남사스럽게 저희 코너 자랑을 한 적이 없었네요. 하필 떠나는 마당에 왜 이제 와서 자랑을 늘어놓냐고 하시겠지만, 다 까닭이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떠나기 때문입니다. 제가 몸 담고 있을 동안에는 오히려 제 뉴스를 봐달라고 말하기 낯간지럽더군요. 하지만 이제는 정든 팀원들에게 모든 걸 맡기고 휴직을 앞둔 입장입니다. 떠나는 마당에 앞으로 두 코너 모두 더 유심히 지켜봐달라고, 저를 아껴주시는 구독자 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두 번째 이유는, 설 특집 프로그램 홍보 차원입니다. 아까 살짝 말씀드렸지만 <로드맨>이 TV 뉴스 코너로는 최초로 별도의 특집 프로그램으로 편성됐습니다. 설 특집으로 단 1회만 하는 데다 이른 아침에 방송될 예정이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2년 넘게 애정과 에너지를 쏟은 코너인데 졸업 선물을 받은 기분이랍니다. 물론 제가 연출을 맡았으니 직접 졸업 선물을 만드는 꼴이지만요. 제목은 <로드맨 - 일방통행 서울민국>입니다. 서울과 수도권 쏠림 현상으로 생존 위기를 겪는 지방 곳곳을 돌아보고 지역균형발전의 해답을 찾는 과정을 담았는데요. 지난 5개월간 뉴스에서 다뤘던 내용을 재구성해 제작하고 있습니다. 특별 MC로 멋진 장성규 아나운서님까지 모셨어요. 설 연휴에 가족과 함께 즐겁게 볼 수 있도록 최대한 재밌게 완성해보겠습니다.

방송일정은 2월 12일(금) 오후 8시 45분에 유튜브 ‘MBC NEWS’ 채널에서 디지털 라이브로 먼저 공개되고, TV에는 2월 13일(토) 오전 7시 20분에 방영됩니다. 부끄럽지만 많은 시청 부탁드리면서, 이 작품을 끝으로 휴직계를 내고 홀가분하게 춘천으로 떠나렵니다.

안녕, 로드맨.
안녕, 앵커로그.
안녕, MBC.
사랑했어. 20개월 뒤에 보자.


설특집 <로드맨 - 일방통행 서울민국> 유튜브 예고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