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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Oct 31. 2021

꼭 1년 뒤, 이 가게는 문을 닫습니다.

<봄방학이 끝날 무렵엔>


 첫서재에 짧은 가을이 찾아왔다. 


 겨우내 심어놓은 남천나무와 봄에 심은 담쟁이의 잎사귀가 차례로 붉게 달아올랐다. 라일락 나무 이파리는 여름이 건네고 간 습기를 뒤늦게 내뱉으며 동그랗게 말려 올라간다. 옆집 할머니네 감나무도 며칠 전 수확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따님께서 감을 잔뜩 욱여넣은 까만 봉다리를 들고 찾아와 내 손에 툭 건네고 가셨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감 따고 계실 때 양손에 따듯한 차 한 잔이라도 내어드릴 걸. 주방과 그림책방의 쪽창문 바깥 단풍나무는 여전히 철 모르고 푸르다. 볕이 모자란 외진 땅에 심어둔 녀석들이라 계절 감각에 무뎌진 듯하다. 그래도 가을이다. 오는 손님들의 옷도 한 겹씩 두터워지고, 서향집 오후에 햇볕이 밀물처럼 덮쳐도 그리 덥지 않은 계절. 더위를 몹시 타는 내게 가을은 여름을 견뎌낸 신의 선물이다. 봄이 누군가에게 겨울의 선물이듯.

 짧은 가을을 만끽하는 사이에 시월의 마지막 날이 찾아온다. 이 하루가 지나면 가을일까, 겨울일까. 11월은 계절을 규정하기 모호한 달이다. 그것 또한 11월 만의 특권이겠지. 그래도 확실한 게 있다. 내년 11월이면, 첫서재는 사라진다. 첫눈 속에 파묻힐 비밀의 궁궐처럼 영원한 옛날이야기가 된다. 애초에 스무 달만 운영하고 닫을 요량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다. 올해 3월에 첫 문을 열었고, 내년 10월 30일 일요일에 마지막 문을 열 예정이다. 그리고 나는 휴직 생활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간다. 정해진 미래다. 그러니까 10월 31일, 이 글을 쓰는 오늘은 첫서재의 처음이자 마지막 10월 31일이 된다.

 휴직을 하고 시한부 가게를 차리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종종 첫서재의 마지막 날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왔다. 밀려들 슬픔을 미리 분할하는 나만의 방식이었다. 2022년 10월의 마지막 일요일 저녁. 마지막 손님이 찾아온다. 주문받은 음료를 마지막으로 내어드린다. 아껴 골라둔 마지막 음악을 재생한다. 저녁 일곱 시가 되면 늘 그랬듯 가게를 정리한다. 서까래와 나무 천장을 응시할 것이고, 꽂힌 책들을 응시할 것이다. 카운터 벽에 빼곡히 붙은 손글씨와, 함께 숨 쉬던 식물들과, 나를 지독히도 괴롭히던 하얀 벽의 벌레 자국을 응시할 것이다. 고목 테이블과 바닥의 나뭇결에 잠시 볼을 비빌지도 모를 일이다. 다락방 고불고불 계단도 마지막으로 올라볼 것 같다. 침대에 누워볼 것도 같다. 마지막 불을 끄고, 가게 문을 만지고, 걸어 잠근다. 그리고는 뒤돌아 서서 익숙했지만 잊힐 퇴근길을 걸어내려간다. 감정은 먼 곳에서 아래로 덮칠 것이다. 그 감정에 지지 않으려 애쓰거나 이내 승복할 것이다. 이런 뻔한 슬픔의 미래를 굳이 앞당겨 상상할 필요가 더러 있었다. 지금이 너무 행복해서 진정해야 할 때, 뜻 모를 불안이 지저분하게 마음에 번질 때 그랬다. 다 어차피 끝날 일이야, 다 알고 시작했잖아, 다독임이 필요했던 순간들이었다.

 시작할 때부터 계산한 미래였다지만, 막상 가게 문을 열고 보니 셈법을 한참 벗어난 감정들이 속속 들이닥쳤다. 예상했던 바에 비해 사람들의 온기는 더 전염성이 강했고, 셈에 밝았던 현실주의자의 이성을 더 발갛게 물들였다. 돈을 내야 하는 가게에 찾아와 불쑥 선물까지 내밀고 떠나는 사람들. 뭐라도 드시라며 먹을거리 챙겨주는 동네 손님들. 정성스럽게 남기고 간 손글씨들. 멀리서 왔다며 활짝 웃을 때 내려가는 선한 눈꼬리들. 그리고 다락방에 머리카락과 소금을 묻혀두고 떠난 5년 뒤의 인연들. 그저 ‘스무 달 동안 나 해보고 싶은 거 다 하며 살다가 문 닫지 뭐’라고 생각하며 문을 연 가게는 어느새, 겨우내 얼지 않을 작고 단단한 다정함들로 북적였다. 나는 어느새 인생을 퍽 감동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만의 것으로 시작했지만 나만의 것이 아니게 된 가게. 문을 닫는 꼭 1년 뒤에는 이런 사람들의 더운 기억까지 통째로 차갑게 식혀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걸 잠그고 뒤돌아서야겠지. 벌써부터 그날 공중에 떠오를 얼굴들이 겹겹이 포개어진다. 단순히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았다’며 홀가분해 할 수 없는 처지가 된 셈이다. 이래서 누군가와 인연을 맺는 게 두려웠어, 라고 부질없이 되뇐다. 왜 예상보다 훨씬 더 행복한 거냐고 원망할 수도, 그렇다고 이들을 위해 생계를 포기하며 첫서재에 계속 머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막연한 복잡함에서 벗어나 보겠다고 시작한 여정의 끝이 도리어 더 복잡해진 건 아닐까. 그래도 행복으로 엉킨 실타래이니 굳이 풀어내지 않고 일단 그대로 놓아둔다.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은 고마워만 하자. 얽힌 모든 것에.


 처음 춘천에 도착했을 때를 떠올린다. 유난히 추위가 가시지 않던 2월 말. 거대한 이삿짐 차량을 먼저 보낸 뒤, 빨간 캐리어 두 개에 개인용품을 싣고 12년째 몰고 있는 차를 달려 남춘천 나들목을 통과했다. 새로 들어설 집 앞에는 며칠 전 내린 눈이 녹지 않고 있었다. 계절 때문이었는지, 도시 이름 때문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학창 시절 이후 처음으로 봄방학을 맞이한 기분이 들었다. 겨울의 터널을 지나 봄에 이르는 그 짧은 방학. 이제껏 10년 넘게 직장생활을 한 데 비하면 스무 달의 휴직기간은 분명 그 정도의 짧은 쉼일 것이었다. 그렇게 봄의 도시에서, 마치 생의 봄으로 되돌아간 듯한 나날이 시작됐다. 꿈결 같은 나날들. 그리고 어느새 주어진 시간은 절반 가까이 지났다. 꼭 1년 뒤, 어른이 되어 처음 맞은 봄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나는 어디에 가 닿아 있을까. 학창 시절의 짧은 봄방학은 늘 길고 익숙했던 한 세계와의 작별이었고, 그 끝은 미지의 진입로와 맞닿아 있었다. 어김없이 그랬다. 지금의 나 역시 그때와 같을까. 길고 익숙했던 세계를 벗어나 처음 보는 삶의 모양과 운명처럼 조우하게 될까. 그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원래 자리로 무덤덤히 귀환할까. 나는 도대체 어떤 존재가 되어 있을까.

 아직은 먼 미래다. 부디 멀리할 미래. 당장 짧은 가을이 끝나면 긴 겨울이 찾아온다. 월동준비부터 하고 봐야겠다. 봄의 도시라지만 실상은 겨울이 가장 긴 도시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겨울. 어차피 맞이할 계절이라면 차라리 더 모질고 혹독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 모든 가녀린 상상과 미지근한 아쉬움까지 차갑게 식히거나 얼려버리게. 지금의 행복이 시한부라는 냉정한 현실을 앞에 두고 어떤 감정도 달구어지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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