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묭 Oct 10. 2021

‘관심’의 적정선은 얼마큼일까

<식물을 키우며 알게 된 담백한 진리>


 나의 가게 첫서재에는 스물세 식구 식물이 자라고 있다. 앞마당에는 맏이인 60년 묵은 라일락 나무가 있고, 겨울이면 빨간 열매를 맺는 아기 남천나무 스무 그루가 그 옆 아담한 뜰에서 자란다. 장독대 밑동을 뚫어 만든 화분에는 모과나무와 미선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고, 그 곁에는 계절꽃인 국화와 오색마삭이 가을의 봄처럼 피어 있다. 그림책방 통창 밖에서는 오렌지자스민과 애니시다가 매일 서향집의 햇볕을 듬뿍 받아먹는 중이다. 그늘진 뒤뜰과 비좁은 통로에 들어서면 단풍나무가 두 그루씩 늦가을의 전성기를 준비하고 있다. 실내에도 율마와 해피트리, 여인초, 피쉬본, 그리고 선물 받은 화분들에서 식물들이 저마다의 크기와 속도로 자란다. 깜짝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도록 구석구석 아담한 다육이들도 숨겨 놓았다.


 첫서재 문을 열기 전까지는 이렇게 많은 식물들을 한꺼번에 키워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아파트 베란다에 서너 종의 식물을 놓아두었는데, 대개는 크게 관심 두지 않아도 알아서 잘 자라는 것들로 사두었다. 바빠서 신경 쓸 겨를은 없고, 그래도 식물 몇 개 정도는 놔두는 게 좋을 것 같았기에 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갑자기 마당 있는 가게에서 스물세 종의 식물을 키우려니 여간 버거운 게 아니다. 종류가 많다 보니 깜빡하고 물 주는 걸 까맣게 잊는 일도 더러 생긴다. 그래서인지 까딱하면 푸르렀던 잎이 갈변되거나 갈라지기 일쑤다. 어떻게든 잘 키워보려고 처음에는 스마트폰에 일일이 물을 준 날짜와 주기를 적어두었다. 그런데 전문가가 알려준 대로 꼬박꼬박 날짜를 맞춰서 물을 주어도 금세 시들거나 썩는 경우가 많더라. 정답처럼 적어둔 노트를 원망스럽게 바라보며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고민하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그렇게 식물을 살리기 위한 사투를 벌인 지 꼬박 7개월째. 그 사이 계절이 두 차례 바뀌었다. 이제는 눈물 머금고 버리는 식물도, 뜯어 버리는 잎의 개수도 확연히 줄어들었다. 아직 자신 있다고 말하기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겨울 말고는 어떻게 계절마다 식물을 대해야 하는지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그리고 식물 키우기는 아이 키우기와 마찬가지로 정답이 없다는 진리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예컨대 오렌지자스민과 애니시다는 일주일에 한두 차례 물을 주라고 되어 있었지만, 서향집의 햇볕을 매일 정면으로 쐬는 자리에 놓였기에 그렇게 기한을 지켰다가는 말라죽기 십상이었다. 매일 한 차례씩 물을 주고, 틈틈이 잎사귀에도 분무를 해주어야 푸른 빛깔을 유지했다. 반대로 그늘진 자리에 놓아둔 여인초는 공식화된 주기대로 물을 주면 하나씩 잎이 물러서 썩어갔다. 습한 기운을 고려해 1~2주일씩 더 참는 게 나았다.


 이렇게 물 주기를 조정하는 일 말고도 또 하나 깨달은 진리가 있다. 말라죽는 식물보다 과습으로 죽는 식물이 훨씬 더 많다는 거다. 물을 깜빡하고 주지 않아 말라비틀어진 식물들은 줄기가 갈라지고 색이 변해 시체처럼 싸늘해졌다가도, 다시 꼬박꼬박 물을 주기 시작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되살아나는 경우가 많았다. 바람에 바스러지는 누런 이파리 더미 밑으로 기적처럼 푸른 잎이 돋아날 때면 마치 부활을 목도한 듯 신비로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물을 너무 많이 줘서 과습한 식물들은 한 번 썩기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었다. 물 주는 주기를 늘려 봐도, 아예 안 주고 한참 기다려봐도 성한 상태로 돌아오지 못하더라. 이파리만 썩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줄기부터 물을 잔뜩 머금은 식물들은 뿌리째 흔들려 결국 버려야만 했다.


 식물을 키워 본 사람은 누구나 알 법한 이 단순한 진리를 이제야 체득한 건 어쩌면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도 뒤늦게나마 얻은 깨달음으로, 나는 일과 주변 사람에 대한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느지막이 돌아보게 되었다. 식물에 물을 주는 행위를 사람의 감정에 비유하면 ‘관심’일 것이다. 관심은 부족해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쏟아부을 때 돌이킬 수 없는 나쁜 결과를 초래한 적이 더 많았다. 우선 직장생활에서의 나를 돌아볼 때 그랬다. 일을 게을리했을 때보다 과몰입했을 때 오히려 탈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시기는 어떤 계기로 인해 다시 불이 붙기 시작하면 금세 원상복구 되었지만, 무리하게 일을 추진하거나 에너지를 쏟아부으면 도리어 헤어날 수 없는 잘못된 길로 빠지곤 했으니까.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와 사랑하고 연애를 시작하면, 처음에는 누구나 서로에게 흠뻑 물을 주게 된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사랑과 관심을 구별해내지 못한다면 탈이 나기 시작한다. 지나친 관심을 사랑으로 포장하거나 착각해 상대를 옭아매고, 이미 축축한 마음에 원하지 않는 물을 들이붓게 된다. 그렇게 서로에게 습해지면 그 마음은 좀처럼 다시 보송해지지 못하더라. 갈구하는 마음은 뒤늦게라도 채울 수 있지만, 이미 질려버린 마음은 비워도 비워도 물때처럼 상흔이 남기 때문이다. 주변을 봐도 서로에게 관심을 덜 갖고 무미건조한 듯 사랑을 나누는 커플들이, 도리어 생각보다 관계가 오래 지속되거나 뒤늦게 진득하게 깊어지고는 했다. 연애뿐 아니라 친구사이도 그렇다. 옛 친구들을 떠올리면 한때 ‘베프’라고 자부하며 모든 것을 터놓고 진한 우정을 나누던 사이보다, 도리어 적당히 거리를 두고 예의를 갖추며 만난 사이가 더 오래 곁에 남는 경우가 많았다.


 요즘은 휴직 이후 아이 돌보는 시간이 부쩍 늘면서, 아이 키우기 역시 지나친 관심이 독이 될 수 있겠다는 자각이 덜컥 들곤 한다. 아이의 일상에 밀착해 있으면 자꾸 조급해지거나 아이의 허물을 확대경으로 들여다보게 되더라. 학교에서 내주는 숙제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받아쓰기에서 낮은 점수를 맞아서 오는 아들내미를 보면 여간 속이 타는 게 아니다. 그래놓고 집에 오면 게임이나 TV 시청에만 열중하는 조그만 뒤태를 보고 있노라면 당장 방으로 끌고 와 책상에 앉혀놓고 하나하나 다 가르치고픈 충동이 불쑥 솟는다. 그런 충동에는 ‘내가 부모로서 의무를 다 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불안이 배경하고 있을 터이다. 자녀를 무관심하게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러나 과습해 썩어가는 식물을 관찰하면서, 조금씩 그런 불안을 다독이려 애쓴다. 이제 고작 여덟 살인 아이의 일상에 지금부터 시시콜콜하게 개입하면 도리어 아이가 자생력을 잃거나, 훗날 나와 돌이킬 수 없는 관계에 이를 수도 있다. 식물에 뭔가 이상이 생길 때마다 기다려 보거나 세밀하게 대응하지 않은 채 일단 물부터 듬뿍 주고 봤던 결과는 늘 참혹했으니까.




 식물을 잘 키우는 법에 정답은 없다지만, 그나마 물 주는 주기를 가장 정확히 알아내는 방법에 대해서는 이제야 겨우 터득한 듯하다. 직접 흙을 만져보면 된다. 주변에서도 수차례 조언해줬지만 성실히 이행하기는 무척 어려웠다. 화분 하나하나 흙을 덮은 자갈을 들춰내어 그 속의 흙을 문지르고 손까지 씻는 과정이 몹시 귀찮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흙을 만져봐도 이게 얼마나 마른 건지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결국 그 방법뿐이라는 사실을 시나브로 받아들이고 있는 요즘이다. 일일이 흙을 문지르고, 마른 정도에 따라 물 주는 주기를 조금씩 달리 해가며 알아내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주기를 매번 조정해주는 식물들은 거의 예외 없이 제대로 성장했다.


 일도, 연애도, 친구관계도, 자녀교육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식물에 물 주는 행위가 관심이라면 흙을 만져보는 행위는 사랑이다. 우리는 모든 관계에서 사랑을 주는 것과 관심을 쏟아붓는 것을 온전히 구별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도 모른 채 무작정 나의 관심을 퍼붓기보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흙가루를 만지며 습한 정도를 구별해내듯 마음을 내밀하게 살펴보고 대응해야 할 터이다. 회사에서 내게 주어진 업무 역시 무작정 에너지를 쏟으며 밀어붙이기에 앞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일을 어루만지듯 다가서는 게 낫다. 그 적정선을 감지하는 게 도무지 어렵다면, 차라리 과한 느낌이 들기 전에 조금 부족한 듯할 때 멈추는 게 낫겠다. 말라죽어 가는 건 되살릴 수 있어도 과습해서 썩어버리면 돌이킬 수 없으니까. 식물도, 인간도, 그 무엇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