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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묭 Jul 12. 2023

50대 이상 남성의 혼술 사절합니다

 

 친한 선배 덕에 꽤 자주 갔던 LP 바 문 앞에 어느 날 처음 보는 공지문이 내걸렸다.


  “50대 이상 남성 혼술 사절“


 사장님은 50대 이상으로 보이는 남성이셨다. 까닭을 묻고 싶었는데 선배가 대신 대답해 줬다. 혼자 오는 사람들 대부분 조용히 음악과 술을 즐기며 시간을 보내다 가는데 꼭 혼자 오는 ‘50대 이상 남성’은 옆자리 젊은 여성에게 작업을 건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가 불편한 티를 내도 눈치 못 채거나 못 채는 척하며 계속 추근댄다고. 그걸 보다 못한 사장님이 그들의 혼술을 막아서고 나섰다는 것이다.


 ‘출입금지’는 보편적으로 자신의 정체성 바깥을 향해 내뻗기 마련이다. 아이를 키우기 시작하면 내 가게에 노키즈존 간판을 내걸기 어려워진다. ‘노시니어존’ 딱지를 대문 앞에 붙인 다른 술집도 취재하러 찾아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할아버지들의 갖은 성희롱에 못 이긴 여성 사장님이 홀로 고군분투하고 계셨다. 그런데 이 LP 바 사장님은 어쩌면 주 고객일지도 모를, 자신과 같은 성별에 같은 세대 사람들의 혼술을 금지하고 나선 것이다.


 모든 인간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나는 무척 이기적인 동물이기에 일단 내 걱정부터 했다. 선배에게 소개받은 뒤로 지난 몇 년간 종종 들를 때마다 위안을 받았던 가게다. 늘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였고, 가게 바이브에 맞는 신청곡만 틀어주는 사장님의 까다로운 선정 기준도 강단 있어 보여 좋았다. 그런데 고작 8-9년 뒤에는 혼자 가면 거절 당할 처지라니. 상상만으로도 서늘했다. 여태껏 집 바깥에서 혼술을 해본 적 없기에 그럴 일 없겠다 싶다가도 내가 50대 이상이 되면 누구와 함께 이 가게를 찾아도 왠지 눈치가 보일 것만 같았다. 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나를 그 가게에 자주 데려가준 선배였다. 사장님이 이름을 불러줄 정도로 단골이었는데 50대가 코앞에 다가왔으니 말이다. ‘저희 선배도 곧 출입금지 당하는 거냐?’고 농담 섞어 슬쩍 물으니 사장님은 “OO 씨는 혼자 온 적 없어서 괜찮아요”라며 웃으신다.


 노키즈존을 비롯해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금지구역을 정하는 모든 행위에 나는 반대한다. 피할 수 없는 선택일지라도 차별로 향하는 길이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건 이제껏 보지 못한 경우라 조금 헷갈리기 시작했다. 올드팝을 주로 트는 LP 바에 50대 이상 혼술 남성 금지라니. 무언가 신박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게다가 최근 춘천에서 서울까지 길고 긴 출퇴근길을 오가며 쌓인 경험까지 LP 바 사장님에 대한 공감을 부추겼다.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출퇴근길에 타는 itx 열차에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다가 얼른 ‘그러면 안 돼’라며 고개를 저은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 내게 추근거렸을 리는 없지만 예컨대 기차 좌석 간에 놓인 중간 팔걸이를 옆 사람 신경 쓰지 않고 당연히 자기 차지인 양 걸치고 있는 사람, 열차 좌석칸 내에서 금지된 통화를 시끄럽게 아주 오래 하는 사람은 대개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듯한 아저씨들이었다. 물론 에티켓을 잘 지키는 남성 어른이 훨씬 많다. 한두 번의 경험이 그 세대에 낙인을 찍어 내 확신을 그릇되게 부추겼을 수도 있다.


 이기적인 동물인 나에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내가 머지않아 그 집단에 속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50대 이상 남성 혼술 사절’이라는 문구는 그래서 나에 대한 잠재적인 차단이기도 하면서, 나는 왠지 그러지 않을 것 같은데 왜 나까지 싸잡아 막아서냐는 억울함마저 불러일으킬 법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왜 그 세대는 자신과 같은 세대, 같은 성별의 자영업자에게마저 출입금지당해야 했는지 곱씹어 보면 나라고 그 이유의 뿌리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평생 진보를 외치다가 몇 년 전 여성 운동이 일었을 때 몹시 거부반응을 일으키던 몇몇 회사 선배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갑자기 자신이 속한 집단이 공격의 대상이 되는 순간 그 흐름에서 무얼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기보다 무조건 반격하기 바빴던. 나라고 그렇게 되지 말란 법 없다.


 아직 마흔 갓 넘은 나이. 내겐 출입금지 당하기 전에 시간이 꽤 남아 있다. 그전에 이 가게가 먼저 문을 닫거나 그 공지문을 내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나의 입장 정도는 미리 정해두기로 했다. 나는 받아들이려 한다. 좋아하는 LP 바 사장님께 싸잡아 혐오받는 듯해 억울하지만 그 혐오를 어디에도 반사하지 않고 흡수하는 50대 남성으로 자라고 싶다. 내가 곧 속할 집단에 대한 조롱과 비난을 나에 대한 사전 공격으로 인식하기 이전에 왜 그런 사회적 시선이 굳었을지 골몰하고, 거기에 은연중에 숨어 있던 나를 찾아 꺼내어 주고 싶다. 그건 위화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감내하는 방식이기도, 스물두 살에 나의 곱게 쌓아 올린 정신세계를 뒤흔들었던 존 쿳시의 소설 <추락>에서 얻은 힘겨운 해답이기도 하다. 타인에게 아무 피해 주지 않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앞으로도 종종 함께 가던 선배와든, 다른 누구와든 그 가게에 들르게 될 것 같다. 그만큼 취향에 꼭 맞는 공간이다. 언젠가 혼술을 할 용기가 나면 50대가 되기 전에 이 가게 문부터 두드려 보고 싶기도 하다. 더불어 언젠가 가게 사장님도 단골손님의 늙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50대 이상 남성의 혼술을 이제는 받아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날이 오기를 기원한다. 그 생각에 내가 아주 작은 씨앗이라도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는 마음으로, 곧 나를 겨누게 될 사장님의 서늘한 원칙을 기꺼이 수용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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