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생 친구가 생겼다

프롤로그 - 어쩌다 수동 필름카메라

by 나묭


'다시 태어나는 옛 동네'의 사진을 찍고 다니기로 결심한 계기는, 그러니까 도쿄에 출장을 간 바람이었다.


일을 마치고 귀국하기 직전에 일을 저질렀다. 기계치에 카메라 문외한 주제에 덜컥, 중고 필름카메라를 사버렸다. 자주 찾던 여행용품점(트래블팩토리)에 진열된 카메라였는데, 기능 따위 확인하지도 않고 오로지 생긴 것만 보고 만 엔을 질렀다.


붉은 합성가죽을 반쯤 입힌 카메라는 누가 봐도 낡아 보였다. 가죽커버 안쪽은 곰팡이와 얼룩으로 누렇고 퍼렇게 물들어 있었다. 그 수십 년은 묵었을 법한 꾀죄죄함과 고품스러움이 내 속을 홀랑 벗기었다. 빨간 카메라를 갖고 싶던 평소의 소소대대한 바람도 충동구매 욕구를 간지럽혔다. 그렇게 그는, 누군가들의 오랜 손을 거쳐 내 품에 안겼다.


안녕? 앞으로 잘 지내자.


한국에 돌아온 뒤, 내게 입양된 이 카메라의 기원을 수소문했다. 알고 보니 1963년에 생산되기 시작한 제품이란다. 언제 단종됐는지는 못 찾았다. 그러니까 나이가 많게는 57살인 삼촌뻘 카메라 되시겠다. 이름은 ‘캐논 칼라 데미.’ 데미는 프랑스어로 half를 뜻한단다. 이름처럼 이 카메라는 하프카메라였다. 그러니까 36장짜리 필름을 사면 72장을 찍을 수 있는 대신, 필름 한 장에 두 컷씩 붙어서 나온다는 거다. 물론 하프카메라란 게 있는 줄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예컨대 이런 식으로 나온다. 갬성갬성(통영 봄날의 책방에서)


선배 카메라기자 S에게 물어보니 친절히 설명해주신다. 필름 한 장에 사진이 두 장씩 나오니 아무래도 화질은 떨어질 거야. 게다가 수동카메라야. 초점, 셔터스피드, 조리개를 사진 찍을 때마다 일일이 맞춰야 해. 물론 액정화면 따윈 없으니 니가 그것들을 다 잘 맞췄는지 확인할 길은 없어. 오직 필름을 인화한 뒤에야 가려지겠지. 아무리 잘 맞춰서 찍었다 해도 50살 넘은 기계에게 뭘 바라겠니, 선명하지는 않을 거야. 대신 그 감성이 좋을 수도 있지, 라신다.


그 답답함과 예측불가능성에 나는 더 이끌렸다. 그게 삶 같고, 내가 사는 사회 같아서. 언제 우리가 매 순간을 실시간으로 확인받으며 살았는가. 내 행동에 대한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늘 기다려야 했고, 기다림 끝에 얻는 결실이 허무할 때도 많았으니. 그리고 원래 인생은 수동이고, 세상은 초점 없이 흐리게 볼 때 더 아름다우니까. 너무 선명하게 들여다볼수록 추잡하니까. 1초마다 확인이 가능하고 수백 장을 마구 찍은 뒤 지울 건 지워버리는 폰카(& 디카)가 오히려 비현실적인 기계 아닌가? 언제 내 삶이 그렇게 선명했다고. 언제 내가 지울 건 쉽게 지워버리며 살았다고.


답답한 네가 알 수 없이 좋아. 둘리처럼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아무튼 처음엔 무작정 배운 대로 찍어서 현상까지 해봤다. 강릉 바다로 떠나 사람들과 바다 풍경을 향해 셔터를 눌러댔다. 찍을 때마다 볕의 양에 맞춰 조리개를 열고 사물과의 거리를 고려해 초점을 일일이 맞춰야 하니, 한 번 셔터를 누르기까지 거의 1분씩 걸렸다. 찍고 싶은 순간을 포착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냥 찍는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움직이지 말고 거기 그대로 머물러주길 바랄 뿐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처럼.


첫 작품. 작품명 '공식' (부제:해변x소주=종이컵)


그렇게 여차여차 첫 필름을 뽑아서 확인하던 날. 나는 확신했다. 얘랑 나랑은 꽤 오래갈 운명임을. 이 쌍팔년도 스타일 색감에 좀처럼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물론 초점은 엉망이었고 빛도 기괴하게 많이 들어왔지만 상관없었다. 그건 배워가면서 고치면 되지 뭐. 어쨌든 그날 바로 결심했다. 시간 날 때마다 이 녀석과 함께 좋아하는 동네들을 거닐면서, 초점 흐린 세상 풍경을 담아보기로. 네가 그간 수십 년을 누구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 나한테 와주어 고마워. 네 이름도 지어줄게 곧.


너의 이름은...?


어쨌든 이런 연유로 이 브런치 매거진을 별도로 열었다. 필카에 담기 위해 동네를 탐방하고, 간 김에 그 동네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듣고 와 여기 남겨둘 생각이다. 동네 선정의 기준은 '이 필카와 얼마나 어울리는가'로 하겠다. 2019년에 쓰이는 1963년생 필카처럼, 옛날에 태어났지만 지금도 다시 태어나고 있는 그런 동네들 말이다.


다만 내가 워낙 초보라서 그 동네 고유의 정서를 사진에 온전히 담을 수 있을지 걱정되긴 한다. 그래도 뭐, 괜찮다. 인생 원래 다 초보니까.


첫 번째 동네 예고편. 여기는 어디?(출사 함께 할 분 대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