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내리보며 나누어 사는 마을

<필카로 동네탐방 01> 서울 후암동

by 나묭



(1963년제 수동 필름카메라로 찍습니다. 초점흐림주의)


점심시간이 막 끝난 서울역 뒷골목. 칼라필름 대신 ISO 200짜리 흑백필름을 끼워 넣었다. 광화문 근처에서 근무하는 옛 직장 동료에게 귀한 시간을 내달라고 강요했다. 걷는 모델이 필요하다며.


남산 아래 첫 마을, 후암동.



하프카메라(필름 1장은 반으로 나눠 쓰는 카메라)라서 이렇게 두 장씩 나란히 인화가 된다. 한 장 짜리 사진은 인화된 뒤에 인위적으로 자른 것.



후암동은 아주 높은 마을이다.

남산 자락에 있으니까 당연하다. 지나가다 마주치는 웬만한 가정집 어디에서도 서울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지만, 그만큼 오다니기는 고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뜨내기 도보여행자에게는 이만한 풍경이 없다. 숱한 계단을 오르내렸지만 지루하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가을 날씨도 도왔고.



골목 어딜 가나 나오는 '남산' 간판들



높은 마을이니 풍광은 아름답지만, 살기는 고되었을 터. 그래서 후암동은 전자가 좋아 스스로 정착한 주민의 으리으리한 대저택과, 후자에 의해 정착되어진 빈민의 슬레이트 지붕집이 공존해 있다.





전력량계가 벽 하나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분명 누군가의 벽일 텐데, 자리를 뼘씩 내어준 듯.



건강히 젊게 살아라... 금연 문구 치고 참 따듯하게 무서운 말.



후암동은 나눠 쓰는 마을이다.

사진 속 전력량계들도 한 벽에 나란히 붙어 있고, 지붕까지도 공유하는 집들이 많다. 그래서인지 유독 ‘대소변 금지’ 따위의 옛 공동체스러운 캠페인 문구도 많이 붙어 있다.


좁고 가파른 언덕에서 나지막이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함께 살게 된 사람들. 그들에게 강요되었을 공유의 문화가 정겹게 보이는 것 역시, 뜨내기 여행객의 왜곡된 시선일까.



이 풍경을 놓칠세라 최근 들어 레트로 카페나 빈티지 펍들이 골목골목마다 많이 들어섰다. 아무 데나 들어가도 이 정도 풍경은 감상할 수 있다. 두 장을 나란히 찍었는데 하나는 노출이 너무 됐고, 하나는 너무 덜됐다. 딱 중간으로 한 장만 더 찍을 걸.



풍경 안주 삼기 in 포티튜드 에이. (ppl 아님)



하늘 위에 떠 있는 듯한노천카페도 다음 번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잠시 뒤 누군가들이 내 소망을 대신 이뤄주고 있더라.



높다란 마을이다 보니 걷는 내내 쉴 틈 없이 계단이 등장한다.



올라오는 사람들 틈으로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본다.



중턱에는 아예 버려져 폐허가 된 집들도 있다. 서울 한복판에.



이 108계단을 내려오면 아랫마을이자 평지다. 108계단을 오르내리는 승강기도 있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노출도 셔터스피드도 초점도 다 엉망이다. 이렇게 사진이 엉망인 걸 인화한 뒤에야 확인할 수 있다는 답답함이, 바로 필카의 뭉근한 매력이다.



아랫마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이 건물이다. 최근에는 청년들이 이곳을 비롯한 후암동 곳곳에 공유공간을 열었다고 한다. 공간을 임대해서 여기는 서점, 다른 곳은 공유주방이나 공유영화관 등으로 쓰고 있단다. 벽 하나에 나란했던 전력량계와 꼭 닮은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 후암동스럽고, 왜 후암동에서 그들이 이런 작당을 했는지도 알 것만 같았다.



아랫마을은 평평하다. 높다랗던 해도 내 걸음을 따라 아래로 내려왔다. 해도 나도 오늘 산책을 마치겠지.


이 길의 끝은 숙대입구역이다. 그러니까 후암동은 남산 아래, 숙대입구역과 서울역 사이에 있는 가파른 마을이다.



흑백필름은 색을 밝은 것과 어두운 것으로만 나눈다. 하지만 밝음과 어두움 사이에는 수만 프레임의 밀도가 있다. 거기에 흑백필름의 매력이 숨어 있는 것 같다. ‘빨간색, 파란색’처럼 색깔의 이름이 있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세상에 존재하는 색들이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색들, 이를테면 아주 살짝 하얀색, 덜 하얀색, 조금 어두운 색, 살짝 검은색, 되게 검은색 같은 것들로 세상이 그럭저럭, 때로는 충분하게 표현된다.


하지만 다음번엔 칼라필름을 쓸 거다. 저 햇살의 노람을 담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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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Pics by canon de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