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예술인들을 배출한 작은 항구마을

<필카로 동네탐방 02> 경남 통영

by 나묭


(1963년제 수동 필름카메라로 찍습니다. 무보정. 초점흐림주의)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


나름대로 여행 좀 다녔다는 내게 불특정 다수가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이다. 대개 나는 모르겠다고 한다. 나도 헷갈려서. 어제는 마라케시였다가 오늘은 요쿨살론이었다가 한다. 그리고 허술한 대답 끝에는 종종 이렇게 덧붙이기도 한다.


“국내에서는 통영이요.”



2014년 처음 통영을 만난 뒤 네 차례 더 이곳을 찾았다. 통영 홍보대사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 만큼 여기저기 통영사랑을 과시하고 다니는 편이기도 하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렇다.


"통영은 말이지, 박경리, 유치환, 윤이상, 김춘수… 위대한 예술인들을 숱하게 배출한 동네야. 굳이 여기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화가 이중섭, 시인 백석도 통영에서 대표적인 작품들을 남겼지. 강구안의 풍경을 바라보거나, 서피랑에 오르거나, 봉숫골의 아늑함을 만끽하다 보면 왜 그들이 위대한 작품을 남길 수 있었는지 언뜻 고개가 끄덕여질 거야. 우리나라에서 가장 일조량이 풍부하고, 수산물이 가장 많이 나는 동네이기도 해. 또…"


나머지는 사진으로 감상하시라. ISO 400짜리 로모그래피 필름을 썼고, 이제는 어엿한 여섯 살(?)로 성장한 아들내미가 모델이 되어주었다.


오늘 이 구역의 모델은 너야 ay!




색감이 예쁠 것 같아서 먼저 찾아간 동피랑.

통영에서 가장 잘 알려진, 그래서 이제는 북적임에 찌들어 보이는 언덕이기도 하다.


동피랑에서 내려다 본 강구안 풍경. 언제봐도 질리지 않긴 하다.




골목의 알록달록함이 내 서툰 사진 솜씨도 멋지게 덮어준다.



아이의 뛰는 모습. 옛날 수동카메라라 움직임에 매우 약하다. 초점이 있는 대로 흐려졌지만 그 빛번짐이 오히려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 것 같은 건 나만의 느낌적인 느낌인가...



아이폰으로 찍은 선명한 색깔의 사진들은 결코 이 동네의 예스러운 정서와 분위기를 녹여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필름카메라로 찍어보고서야 하게 되었다.





다음은 이순신 공원(앞바다).



이순신 공원은 예상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이순신이라는 이름이 워낙 강하고 거칠어서 이런 소박하고 예쁜 바다가 펼쳐질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몇 차례 통영에 머물면서도 한 번도 들르지 않았었는데.



인화를 하고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여기서 찍은 바다 사진을 확인했을 때였다. 노출이 안 맞아서 이 바다의 반짝거림이 담기지 않았을까봐 걱정 많이 했는데.



이번 여행의 공식 모델은 열심히 제 역할을 하고 있다. 밥값은 하는구나 이제.





이튿날 찾은 곳은 ‘봄날의 책방’이다.



출판사 편집장 아내분과 동네 건축가 남편분이 함께 운영하는 동네책방. ‘봉숫골’이라 불리는 동네에 자리 잡았는데, 이 책방이 들어서면서 동네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통영을 사랑하는 젊은 예술가와 상인들이 속속 근처로 모여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가 꿈꾸던, 일상과 예술이 뒤섞인 마을의 자연스러운 태동을, 이 분들은 통영에서 이미 실현해내고 계신 듯했다.


통영 출신 예술인에 관한 기록과 문구가 책방 구석구석을 메우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2년 전 봄, 이 서점에서 한 때 운영하던 게스트하우스에 며칠을 묵으면서 처음으로 여행책을 쓰기로 하고 펜을 든 인연이 있다. 그 결과물은 아직 나오지 못했지만. 어쨌든 다시 찾아간 책방에서 두 부부는 나와 우리 가족을 따듯하게 맞이해주셨다.



한글도 잘 모르는 아이는 책을 펴고 앉아 몇 분씩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책방을 감도는 ‘읽는 기운’이 아이에게 스며든 것일까.


색감은 예쁜데 초점이 너무 흐리다. 수동카메라로 초점 맞히기는 언제쯤 가능할까.



참고로 봄날의 책방 주인장이 운영하는 출판사 <남해의 봄날>은 눈여겨볼 만한 책을 참 많이 출판한다. 출판 라인업도 일관적이다. 주로 지역성과, 청년의 대안적 비전에 관한 책들이다. 2년 전 마을기업 만들기를 꿈꾸기 시작할 무렵 읽었던 <우리는 섬에서 미래를 보았다>도 이 출판사에서 냈는데, 개인적으로 더 많은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인근에 있는 쌀롱에도 들렀다. ‘내성적싸롱 호심.’



이름부터 기발한 이곳은 유명 일러스트레이터 밥장님이 통영에 정착해 운영하는 곳이다. 낮엔 카페로, 밤엔 바(bar)로도 운영되며, 2층에는 강연을 듣거나 토론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유럽의 고급 원목 저택처럼 꾸며진 인테리어도 빛나고, 옛 통영문화원장의 사택이었다던 건물 외관과 정원도 일품이다.


무엇보다, 머무는 것만으로 주인장의 철학이 읽히는 공간이라서 좋았다.


잘 꾸며진 정원.


주인장 밥장님은 내가 사진을 찍고 휴식을 취하는 동안 나의 아이를 데리고 한참을 놀아주셨다. 정원에 있는 우물에 데려나가 개구리를 찾고 곤충 이야기도 해주셨다고.


여행을 마치고 아이한테 통영에서 뭐가 제일 재밌었냐고 물었더니, 밥장님과 나란히 앉아 얘기하던 순간을 꼽더라. 내가 루지도 태워주고 놀이터와 바다도 데려갔지만 결국 자기 얘기를 열심히 들어주고 재밌는 얘기를 해준 사람과의 시간을 최고로 즐거워한 거다.





마지막 날 들른 카페 ‘마당’.

중앙시장 인근에 있는 카페인데, 120년 된 적산가옥을 개조해서 만들었다. 역시 2년 전에 이어 다시 들렀고, 다시 기억이 났을 만큼 매력적인 곳이었다.



무엇보다 주인장이 어렸을 적 자란 집이라는 게 그랬다. 자신이 자란 집을 고쳐 카페로 만들어 손님을 받으면 어떤 기분일까. 카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볕이 쏟아지는 아름다운 앞마당에서 갈릭새우버터를 열심히 먹으며 그의 기분을 상상했다. 물론 두 눈으로 본 그(주인장)는 기분을 낼 새도 없이 바빴지만.


거울과 나 사이의 카메라.




‘비공식 통영 홍보대사’ 답게, 나는 통영에 언젠가 꼭 살 생각이다.


한 달이라도, 1년이 되었든, 10년이 될지도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스러운 마을의 조건을 전부 갖추고 있는 도시라서 그렇다. 아담한 항구, 봉긋한 언덕, 푸른 산과 바다, 신선한 해산물, 아늑한 날씨, 옛 예술인들의 자취, 지금 예술인들의 삶까지 모두 걸어서 한 시간 이내 거리에 품고 있는 동네를 전 세계 그 어디서 또 찾을 수 있을까. 심지어 10년 뒤엔 KTX까지 들어선다니, 유일한 단점이자 너무도 큰 단점이었던 ‘서울과의 거리’도 좁혀질 듯하다.



이런 동네의 풍경을 갓 사랑에 빠진 1963년생 필름수동카메라에 담을 수 있어서 생광스러웠다. 새로운 연인에게 나의 옛날을 보여주는 기분이랄까. 필카로 인화된 통영은 마치 1963년 같았고, 통영은 그 자체로 1963년의 가을스러운 2019년을 보내고 있었다.

.

.

2019년 10월.



Pics by canon de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