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비타 디 반노레죠(Civita di Bagnoregio)
[5월 13일(화)]
새벽에 눈을 떴다. 나는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제 렌터카 업체에게 당한 것도 가스라이팅의 일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튜브나 지인들을 통해서 유럽의 렌터카 업체의 횡포에 대해서 하도 듣다 보니까 으레 그러려니 하고 포기하는 마음이 깔려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런 정보가 없었다면 렌터카 업체가 벤츠를 권할 때 무슨 개소리냐 하면서, 예약해 놓은 차를 내 놓으라고 도끼눈을 뜨고 따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때 업체에서, "미안하지만 원래 예약해 놓은 차가 없다, 대신 전액 환불해주겠다"고 나왔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미 그 때는 늦은 시간이라서 다른 렌터카 업체 사무실은 문 닫을 시간이다. 설령 문을 열어놓았다고 한들 예약없이 바로 차를 빌릴 수 있을까?
결국 이것은 공급과 수요의 문제다. 전세계에서 관광객들이 유럽의 주요도시에 밀려오니까 이런 횡포가 가능하다. 여름 한 철의 피서지 바가지처럼. 시장경제에 모든것을 맡기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 정부가 개입해야할 지점이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극성하고 있는 소매치기를 사실상 방치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유럽의 각국 정부는 손을 놓고 있다. 그래도 어차피 관광객은 물밀듯이 몰려온다. 또한 소매치기, 렌터카 업체 횡포의 대상은 주로 관광객들이므로, 즉 자국민들이 피해를 입는 것도 아니므로 정책 우선순위에서 뒷전일 것이다.
자동차 매뉴얼은 이탈리아어만으로 되어 있었다. 네비게이션 언어도 이탈리아어만 나왔다. 핸드폰 구글맵을 열었다. 차에 핸드폰 거치대가 없으므로 조수석에서 아내가 핸드폰을 들고 있어야 했다.
우리가 일주일 후에 배를 타야 할 치비타베키아 항구부터 가보기로 하였다. 토스카나 여행이 끝나면 렌터카를 로마공항에 반납해야 하고 로마공항에서 크루즈 터미날이 있는 치비타베키아 항구까지 이동해야 한다. 약 60km의 거리를 이동할 방법을 앞으로 연구해야 한다. 택시는 너무 비싸서 못타고 셔틀버스가 있다고 하는데 1인당 100유로이다. 말도 안되는 가격이다. 기차를 타야 하는데 무거운 짐가방을 들고 환승까지 해가면서 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차를 출발시켰다. 차의 모니터에서 계속 무슨 메세지가 떴다. 차를 옆에 세우고 핸드폰의 번역 앱으로 화면을 찍었다. 핸드폰을 차량에 연결해라는 뜻이었다.
대박이었다. 시키는대로 했더니 핸드폰의 구글맵이 모니터에 떴고 차량 스피커로 구글의 길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새 차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깡통차가 이런 효도를 하다니 기특한 일이었다.
그 때부터 토스카나 여행을 하는 동안 모니터에서 구글맵이 우리나라 말로 안내를 해 줬으므로 길 찾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한국에서의 내 차에서도 당연히 되는 기능이지만 이곳 이탈리아에서, 처음 타는 차에서, 한국에서처럼 핸드폰 연결이 자동으로 되니까 (더구나 전혀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신기하기도 했고, 고맙기도 했다. 전 세계의 과학자와 공대생들이여, 축복받으소서!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고속도로를 탔다. 수도인 로마와 연결되는 고속도로도 편도 2차선에 불과했다. 갓길도 없다. 이제 앞으로 우리 부부는 토스카나 지방을 여행하고 로마로 돌아오는 약 일주일 동안, 평소 한국에서 운전할 때 쓰던 에너지의 2배 정도를 쓰게 된다.
고속도로를 제외한 모든 국도는 편도 1차선이다. 심지어 고속도로도 편도 1차선인 곳이 많다. 갓길은 커녕, 길의 여백이 없다. 뒷차가 바짝 붙어 따라올 때 양보하고 싶어도 차를 오른쪽으로 붙일 공간이 없다. 길을 잘못 들어 유턴을 하고 싶어도 차를 오른쪽으로 빼서 돌릴 수가 없다.
제한속도는 뒤죽박죽이다. 편도 1차선이라도 130km가 제한 속도인 곳도 있고 얼토당토 않게 40km가 제한 속도인 곳도 있다. 우리나라처럼 속도위반 단속카메라가 많지는 않다.
도대체 우리나라처럼 속도 위반 단속 카메라가 많은 나라가 있을까? 나는 부정한 로비활동으로 그렇게 많은 단속 카메라가 설치되었다고 본다. 방범역할을 하는 CCTV는 구석구석 있어야 하지만 저렇게 고속도로에 온통 속도 위반 단속 카메라를 설치할 바에는 아예 자동차에 장치를 해서 시속 110킬로 미터 이상은 속력이 못나오게 만드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일 것이다. 그렇게 하면 세계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지만.
렌터카는 벤츠답게, 새차답게 드라이빙하는 맛이 났다. 커브길을 돌 때 미동도 없었다. 우리나라 차나 일본 차는 안락하지만 고속으로 커브길을 돌 때는 흔들리는 느낌이 든다.
치비타베키아 항구를 대충 둘러보고 오늘의 첫목적지인 치비타 디 반노레죠(Civita di Bagnoregio)로 향했다.
이탈리아의 국도는 도로폭이 좁은데다가 끊임없이 커브길이 나온다. 산을 깎거나 뚫지 않고 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자연보호의 정신때문인지 도로건설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인지 그 이유는 모르겠다. 차량통행이 그리 많지는 않으므로 후자의 이유같다.
또한 회전교차로가 수시로 있다. 그래서 신호등을 거의 볼 수가 없다. 좌회전 신호는 아예 없고(회전교차로에서 좌회전 하는 차들이 알아서 빠져 나간다) 직진 신호도 거의 없다. 넓은 땅이지만 사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교통 질서는 엉망이다. 한국 교통질서는 이곳에 비하면 상급이다. 오토바이는 중앙선에 붙어서 다닌다. 예사로 중앙선을 넘어서 반대차선으로 들어와 추월한다. 중앙선 좌우로 1미터는 오토바이 전용차선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도로가 넓지도 않은데도 그렇다. 처음에는 내 앞으로 역주행해 오는 오토바이를 보고 깜짝 놀랐지만 나중에는 적응이 됐다. 예외가 계속되면 일상이 되는 법이다.
반노레쬬에 도착했다. 주차장을 찾았다.
미리 말하지만 피렌체를 포함하여 내가 앞으로 여행하게 될 모든 도시에서 주차공간은 극히 찾기 어렵다.
최소한 몇백년 전에 지은 건물들을 그대로 보존하고(당국의 허가 없이는 허물지 못한다. 당국은 허무는 것을 허가하지 않는다.) 마차길로 쓰던 것을 자동차 도로로 만들고 하다 보니 공간을 만들 수가 없다. 치워야 공간을 만드는데 못치우니 공간을 못만든다.
피렌체 같이 복잡한 도시에 있는 호텔은 부속 주차장이 없다. 역시 옛날 건물들이고 지하주차장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호텔과 뚝 떨어져 있는 별도의 건물에 차를 차곡차곡 우겨 넣는다. 손님이 호텔 정문 앞에 차를 세우면 기다리고 있던 주차장 직원이 차를 가지고 주차장 건물에 차를 갖다 놓는다. 그리고 손님이 차가 필요하면 주차장 직원이 호텔 앞으로 차를 가지고 온다. 호텍 숙박비와 주차료는 당연히 별개다. 주차료도 당연히 비싸다.
반노레죠의 공영주차장에서 주차료 정산기계에 자동차 번호판의 문자와 숫자를 입력하고 주차예정시간을 입력하였다. 해당 금액을 신용카드로 결제하면 티켓이 발부된다. 그 티켓을 대시보드에 놓아두면 된다. (단속직원이 순찰하면서 대시보드에 놓인 티켓을 확인한다. 그렇지만 사실은 단속직원이 없는 것 같았다. 즉 사람들의 양심에 맡기는 것이다.)
그런데 신용카드 승인이 된 후에도(내 핸드폰으로 신용카드 승인을 알리는 문자가 왔다) 티켓이 안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신용카드 결제 취소 문자가 왔다. 이런 짓은 계속 되풀이하였다. 거의 30분간은 그렇게 한 것 같았다.
한참 후에 이탈리아 사람들이 주차를 하러 왔다. 고통을 호소하면서 내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것인지 알려 달라고 하였다. 이유는? 결제가 되면 신용카드를 먼저 빼야만 티켓이 나오는 시스템이었다. 나는 신용카드를 빼지 않고 티켓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기계는 신용카드를 빼지 않으니 신용카드 결제를 취소하면서 티켓을 주지 않았던 것이었다.
기계에 이탈리아 말로 신용카드를 빼라는 문자가 표시 되었었다. 핸드폰을 열어서 이탈리아 사전을 통해 그것이 무슨 말인지 검색하면 되는 것 아니었냐고? 인터넷이 되어야 검색을 할 것 아닌가. 내가 다닌 곳에서 로밍이 안되는 지역이 많았다. 피렌체처럼 제법 큰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설사 된다고 하더라도 엄청 늦었다.
다른 도시의 주차장에서는 들어갈 때 티켓을 빼면 출입 차단봉이 올라가서 주차장에 들어갈 수 있고 나갈 때는 신용카드를 집어 넣어 결제하면 출입 차단봉이 올라가는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신용카드를 아무리 밀어 넣어도 출입 차단봉이 올라가지 않았다. 이 카드, 저 카드 다 동원해도 마찬가지였다. 뒤에서 기다리던 차들은 자기 차들을 뒤로 빼서 옆의 출입문으로 나갔다. (경적을 울리지는 않았다.)
마이크 표시가 된 것을 눌렀더니 여자 목소리가 나왔다. 이탈리아의 일반인들은 영어를 아예 못한다. 이탈리아 말로 뭐라고 신경질적으로 떠들어댔는데 나는 당연히 한마디도 못 알아 들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차단봉이 올라 갔다. 즉 주차료를 지불하지 않고 그냥 나온 것이었다. 찝찝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 주차장에는 직원이 아무도 없었다. 원격으로 조종했던 모양이다.
이 미스터리는 다른 주차장에서 풀렸다. 그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이 번에는 그 옆에 있던 이탈리아 청년들이 글자를 영어로 번역해서 읽어주었다. 신용카드 비밀번호를 먼저 입력해야 하는 것이었다.
반뇨레쪼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려면 다음의 사이트에 들어가면 된다. 치비타베키야에서 동북쪽으로 약 90km 정도의 거리에 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에 ‘천공의 성, 라퓨타(Castle in the sky)’라는 것이 있다. 거장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다. 거기에 나오는 ‘천공(天空)의 성(城)’이 반뇨레쪼의 모습을 보고 영감을 얻어서 그린 것이라고 한다.
반뇨레쪼를 멀리서 보면 진짜 하늘에 떠 있는 하나의 성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보면 돌벽으로 만들어진 건물들로 구성된 마을이다. 이후로 우리 부부가 가게될 토스카나 지방의 소도시는 모두 이런 형태다.
언덕에 있는 마을이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이유는 그 주변이 평원이기 때문이다.
성이든, 마을이든, 모든 구조물의 색깔은 황토색으로 통일되어 있다. 지붕은 좀 더 짙은 황토색이다. 예외가 없다. 모두 비슷한 색깔이다. 이곳 토스카나 지방의 넓고 푸른 들판과 동일한 색으로 통일된 건물들은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단순한데 멋있다.
반뇨레쪼 마을의 돌벽 건물들도 건축된지 1000년이 넘는다고 한다. 마을 안에 들어가면 아무렇게나 만든 듯이 보이는, 볼품없고 좁은 탁자들을 바깥에 내 놓은 카페나 레스토랑이 줄이어 있는 골목들이 있다. 거기에 사람들이 앉아 커피를 마시거나 파스타를 먹는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 온 관광객들이다.
다음에 갈 곳을 피엔차(Pienza)로 정했다. 피엔차는 반뇨레쪼에서 100km 정도 떨어져 있다. 오후 늦게 도착해보니 아름답고, 세련된 도시였다. 잘 곳을 찾아야했다. 블로그나 유튜브에서는 아그리투리스모(Agriturismo)에서 자 보라고 소개했다. 아그리투리스모는 농가민박이다. 농장의 일꾼들이 숙식하던 장소를 개조한 것이라고 했다. 이탈리아 농장들의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따라서 부려야 할 일꾼들도 많았을 것이다.
피엔차 주변에도 아그리투리스모가 많았다. 몇 군데 돌아다니다가 피엔차 중심부와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는 Agriturismo La Collina에 자리잡았다. 주인에게 열쇠를 받아들고 우리가 오늘 자게 될 방을 찾아갔다. 별채 중에 하나였다.
안에 들어간 순간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명은 촛불을 킨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컴컴하고 욕실의 샤워부스는 문턱도 없어서 물이 흘러넘치기 십상이었고 침구도 낡았고 콘센트도 제대로 없었다. 공간만 넓을 뿐이었다. 유일한 장점은 호텔보다 싸다는 것인데 그래도 하룻밤에 150유로이었다.
다시 시내로 나가본들 주차할 곳을 찾기도 쉽지 않을 것 같기에 이곳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스테이크 코스였는데 당연히 맛이 없었다.
저녁식사를 하고 방에 돌아오니 벌써 밤 10시였다. 익숙하지도 않은, 위험한 길을 300km 가까이 운전한 날이기도 하였다. 자고 일어나면 이 남루한 숙소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빨리 잠들기를 바라면서 잠을 청했다. 피곤하였던 만큼 금방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