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 꼴등의 청소년기
2009년 어느 날, 엄마 친구분의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고 있었다. TV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님의 서거 소식이 흘러나왔고, 중학교 2학년이던 나는 수줍음이 많아 머리를 자르는 동안 거울을 한 번도 쳐다보지 못한 채 땅바닥만 보다가 밖으로 나가 자동차 사이드미러에서 그제야 머리가 잘 잘렸는지 확인하며 “구레나룻은 덜 잘라주셨으면 좋았을 텐데...”라며 혼잣말만 하고 한숨으로 마무리하던 학생, 시험지를 받으면 1분 안에 아무 번호나 찍고 잠드는 무기력한 학생, 꿈이라곤 어머니께서 엔지니어가 좋은 직업이라고 말씀해 주셔서 엔지니어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이왕이면 대한민국 최고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 ‘대한민국 최고의 엔지니어’가 되겠다는 꿈을 꾸던 학생. 그게 나였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머리를 자르던 중 엄마 친구분께서 자신의 딸에게 “영주야, 남호 오빠처럼 안 되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 돼.” 라고 말했다. 당시 나는 그 말이 무례하다고 생각하기보다, 오히려 내 자신이 부끄러웠고 별 볼일 없는 나 자신을 인정했다.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나는 우리 집이 가난한 것도, 가난하기에 타인에게 무시당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여기며 살아왔다.
어릴 적 우리 집은 아버지께서 해태 유통업을 크게 하시며 당시 히트를 친 ‘비락식혜’ 덕분에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하지만 IMF 이후 집안 사정이 급격히 안 좋아지면서 한 집에 두 가정이 살기도 하고, 화장실이 집 밖에 있는 창고에서 살아보기도 했으며, 압류가 두려워 이곳저곳으로 이사 다니며 살아왔다. 그렇게 ‘사모님’ 소리를 듣던 엄마는 초등학교 1학년, 3학년이던 누나와 나를 두고 이른 새벽 집을 나서 저녁 10시가 넘어서야 돌아오는 공장 생산직 일을 하셨고, 아버지는 보험 영업에 뛰어들며 우리 가족은 각자 위치에서 서로 생존하기에 급급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다음편: 중학교 3학년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