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중학교 3학년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다.'

by 행동가 이남호

유년 시절을 떠올리면 행복한 기억보다 장난감이 하나도 없어 서글펐던 기억이 더 선명하다.


흔한 골드런, 미니카, 레고 같은 장난감이 남의 집에 가면 다 있었지만, 내게는 없었다. 아홉 살쯤이었을까. 서울 이모부네에서 사촌 형의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는데, 이모부께서 형이 아끼던 ‘황금사자 레온카이저’를 내게 주셨다. 형은 극구 말렸지만 이모부는 새 장난감을 사주겠다며 형을 달랬고, 나는 비록 중고였지만 생애 첫 로봇 장난감이 생겼다는 사실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다. 그렇게 금색 도색이 벗겨질 만큼 나는 그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초등학생 때는 서울에 사는 쌍둥이 이모네에서 물려준 옷을 두고 누나와 자주 다투기도 했다. ‘푸마 나시’를 서로 가지겠다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아버지가 양보하라며 중재하시다가 서로 양보하지 않자 결국 가위로 옷을 잘라버리셨던 순간을 보며 서글퍼서 울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기도 하다.


나는 꽤 오랫동안 장날에 어머니 손을 잡고 만 원짜리 옷과 신발을 사 입으며 자랐다. 그때는 메이커 옷을 입지 않아도 남과 비교하지 않았고, 내가 무엇을 입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던 것 같다. 하지만 중학교에 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평소에는 모두 교복을 입고 다녔지만, 소풍 가는 날이면 친구들은 온갖 메이커 옷으로 멋을 냈고, 그 모습이 부러웠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데리고 큰 마음을 먹고 생애 처음으로 아디다스 매장에 가서 4만 원짜리 파란 후드티를 사주셨다. 하지만 어머니의 바람과 달리 나는 그 후드티를 자랑스럽게 입지 못했다. 친구들은 리바이스 연청바지에 빅뱅이 신던 하이탑을 신고 있었고, 나는 여전히 시장에서 산 신발을 신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3학년이 되자 전국에 노스페이스 패딩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패딩 하나에 25만 원이나 하던 시절, 학생들은 마치 유니폼처럼 그 옷을 입고 다녔다. 나는 그저 부러워할 뿐, 부모님 형편을 알기에 바라지도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주말에 누나와 나를 노스페이스 매장으로 데려가시더니, 25만 원이 넘는 ‘노스페이스 700 패딩’을 사주셨다. 누나와 내 것까지 합쳐 50만 원이 넘는 돈이었다. 열여섯 살이던 나는 그 돈이 어머니에게 얼마나 큰돈인지, 그리고 그녀가 매일 새벽 나가 밤늦게 돌아와 쉬지도 못하고 번 돈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해 12월쯤, 이번에는 ‘나이키 루나 글라이드 2’가 전국을 휩쓸었다. 싸이월드에 올라오는 친구들 사진마다 루나가 보였고, 사춘기였던 나는 더 이상 천쪼가리 컨버스로 만족할 수 없었다. 부모님께 신발을 사달라고 조를 형편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기에,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때 교회 집사님이 운영한느 패밀리마트에서 저녁 아르바이트를 하던 누나가 떠올랐고, 나도 편의점에서 일하면 나이키를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부모님께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말씀드렸고,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그렇게 내 인생 첫 아르바이트가 시작됐다.


학교를 마치고 다섯 시에 편의점으로 가서 밤 열 시까지 일을 했다. 당시에는 최저시급이 있어도 제대로 주지 않는 곳이 많았는데, 기억으로는 4,110원 중 3,500원을 받았던 것 같다. 남들은 영어 단어를 외울 때 나는 담배 이름을 외우고 물류를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고, 한 달이 흘러 드디어 생애 첫 월급을 받았다.


월급을 받은 날 설레는 마음으로 나이키 매장으로 달려갔다. 멋들어진 스우시 로고를 보며 꿈에 그리던 루나를 결제하고, 주황색 박스를 가슴에 품고 집으로 뛰어오던 그 순간이 아직도 선명하다. 생에 첫 나이키를 신은 날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마음이 벅찼다.


그렇게 나는 부모님의 의존에서 벗어나, 원하는 것이 있다면 포기하지 않고 방법을 찾아 이뤄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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