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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효진 Apr 14. 2017

이상한 나라를 준비하는 참고서

해외 생활, 갭이어를 준비하는 당신을 위한 미국 유학생 와이프들의 조언

 디즈니 애니메이션 ‘Alice in Wonderland’의 한 장면
"앨리스는 도대체 어떻게 다시 빠져나올 건지는 생각조차 안 하고 토끼를 쫓아 굴로 뛰어들었다. 토끼굴은 터널처럼 곧게 이어지는 듯하더니 갑자기 아래로 푹 꺼져버렸다. 너무 갑작스러워 멈추어야겠다는 생각조차 할 시간이 없어서, 상황을 알아차렸을 때에는 이미 아주 깊은 우물 속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 내려가고, 내려가고, 내려가고, 끝도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 그때 갑자기, 쿵! 쿵! 앨리스는 나뭇가지와 마른 잎 뭉치에 떨어졌고 이제 떨어지는 것은 끝났다. 앨리스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고, 곧바로 깡총 뛰어 일어섰다. 위를 바라보았지만 어둠뿐이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중에서)


해외에서 박사과정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자부심이 있기 마련이다. 내가 원하는 학문을 박사까지 공부한다는 만족감, 긴 시간 직장에 근무하며 재정을 마련해 드디어 목표하던 박사과정을 한다는 뿌듯함, 거기에 내 자식과 가족이 박사가 된다는 주변 사람들의 자랑스러움까지. 그런데 그 사람 옆에는 그 박사과정으로 인해 정말로 특이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박사 과정의 배우자들, 예를 들어 ‘미국 유학생 와이프’.


서울과 싱가포르에서 일하다가 작년 8월 미국 애틀랜타에 온 후, 조지아텍이 해외에서 온 학생들의 배우자들을 위해 개설한 수업에 참석했을 때, 나는 지금까지와 너무 다른 만남을 경험했다. 10명 전후의 학생들 중 절반에 가까운 한국 여자들. 그들이, 아니 우리가 서로를 소개하는 방식은 내가 내 일을 하며 만났을 때 서로를 소개하던 방식과 전혀 달랐다. 얼마 전까지 한국에서 좋은 학교와 좋은 직장을 가졌음에 분명해 보이는 얼굴과 차림새의 그들이 자신의 전공과 직업은 소개하지 않은 채 남편의 전공과 남편의 박사과정 연차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친해졌을 때 나오는 똑같은 고민들.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 무엇을 하고 싶어도 쉽지 않은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생 최고의 도전을 하는 사람과 인생 최고의 혼란을 겪는 사람이 함께 살며 인생 최고의 도전을 하는 사람을 위해 밥을 하고 나를 맞춰야 하는 상황이 여기에 있었다. 한 사람의 선택에 의해 도시를 정하고 난 후, 그곳에서 내가 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하는데, 섬유디자이너로 일하던 친구나 헬스케어 전문 서비스 디자이너로 일하던 내게 애틀랜타는 척박했다. 각자의 직업을 위해서라면, 친구는 뉴욕으로 갔어야 했고, 나는 보스턴으로 갔어야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래서 많은 부부들이 종종 다툰다고 했다. 육아 휴직을 하고 와 돌아갈 곳이 있는 엄마들은 고민이 적지만,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을 따라 새로운 땅에 온 여자들의 9월은 혼란과 불안의 달이었다. 아니, 미국에 오기 전부터 시작했던 우리들의 걱정은 미국에 온 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긴 고민 끝에 일부는 근처의 학교에 지원을 하고, 또 다른 일부는 임신과 육아로 방향을 잡았다. 그 어느 길을 가든, 이 혼란스러운 시간에 박사과정 남편들과 여자들의 부모님들은 지속적으로 묻는 듯했다. “너 앞으로 어떻게 살래?”


인터넷에서 ‘미국 유학생 와이프’로 검색해보면 두려움 섞인 질문들이 나온다. 예를 들어, “남편은 유학생으로 장학생이고 숨 쉬는 생활비만 받게 되는데 너무 걱정이 됩니다”와 같은. 그에 대해 유학원들과 이민 변호사들이 해주는 조언은 꽤 냉정하다. 우리가 그동안 들어오던 “너는 할 수 있어”라든가 “괜찮아, 다 잘 될 거야”와 같은 격려는 없다. 결국 내가 동의하고 결단해서 시작한 시간이지만, 쉽게 행복해지지 않고 내 뜻대로 살기 어려운 불확실한 삶이 끝없이 이어진다.


긴 시간 자기 길을 쌓아왔지만 새로운 환경 안에서 또 한 번 백지를 마주하는 시간. 한국에서 치과의사이던 사람이 미국에 와서 곧바로 치과의사가 되지 못한다.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던 나는, 회사에 속해 있지 않은 지금 여전히 디자이너라고 말할 수 있는가. 더 이상 출근하지 않아도 되고 어디든 갈 수 있지만, 그 누구도 어떻게 하라고 알려주지 않는 시간. 세상은 변해가고, 나는 혼자 서 있고, 시간은 흘러간다. 과연 난 언제 어떻게 다시 나만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런데 이를 그냥 개개인의 문제로만 봐야 하는가. 갈수록 더 많은 한국인들이 해외에서 살게 될 텐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 불확실한 시간을 신분의 한계와 개인의 능력 부족을 탓하며 버티듯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이 디자인 리서처인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리고 이러한 어려움이 단지 ‘미국 유학생 와이프’만의 일이던가. 갑작스럽게 직장을 그만둔 경우나 구직 중이지만 기대와 다르게 직장을 찾는 일이 쉽지 않은 경우, 비록 사는 곳은 한국이라고 해도 ‘미국 유학생 와이프’의 불안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했다. "대안은 ‘발견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안은 만들어지고 창조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저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황을 주어진 그대로 내버려 두기를 거부할 때 탄생하며, 상황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성장합니다."


이 글은 디자인 리서처이면서 또 한 명의 ‘미국 유학생 와이프’인 내가, 미국 애틀랜타에 거주하는 한국인 ‘미국 유학생 와이프’ 11명을 리서치하고 디자인 방법론을 활용해 구성한 대안적인 지침에 관한 보고서이다. 낯설고 이상한 나라에서 생활과 진로를 다시 한번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복합적인 상황에 대해,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과 불확실성을 넘어 자신의 길을 이어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행동지침과 아이디어를 나누고자 한다.

방법론 소개

리서치에 참가한 '미국 유학생 와이프'들과 진행한, 리서치 종합분석에 대한 피드백 세션

디자인은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론이다. MRI와 CT와 같은 의료기기, 아픈 환자들을 돌보는 가족들을 위한 더 나은 사회복지 서비스를 디자인하기 전에, 제품들이 사용되고 서비스가 이루어지는 장소와 과정, 만들고 사용하고 지원하는 사람들, 관련된 도구와 소품들에 대해 리서치하고 이를 통해 디자인 전략을 정하고 컨셉을 디자인하는 과정이 있다. 문제와 해법을 찾는 과정 사이에 제대로 문제를 이해하고 적절한 해결 방향을 찾는 리서치가 있다. 그동안 스마트폰, 병원의 의료기기와 서비스, 사회복지 정책과 서비스를 위한 디자인 리서치를 리드하고 디자인 전략을 만들었던 내게 ‘미국 유학생 와이프’는 또 하나의 문제이자 가능성으로 보였다. 


디자인 리서치를 통해 파악한 11명의 경험을 비교 분석하면서 ‘하던 일을 떠나 해외에 거주하면서 다음 진로를 모색하는 기간’ 중의 사람들이 겪는 경험의 형태와 이슈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직장을 떠나 홀로 서는 시간의 준비와 실행, 진로, 가족, 주위 사람들에 대한 10개의 인사이트를 도출했다. 그리고 이 인사이트들을 바탕으로 다음 진로를 고민하고 준비하는 시간에 힘이 될 수 있는 대안들을 디자인했다. 새로운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고, 진로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고, 일하지 않는 기간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가족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디자이너로서 다른 디자이너와 팀을 이루어 아이디어를 만들었고, 만든 아이디어들에 대해 ‘미국 유학생 와이프’ 친구들과 같이 토의했다.


이 리서치에 참여했던 ‘미국 유학생 와이프’ 친구들은 얘기했다. 돌아보면 그 시간이 있었기에 내가 이 만큼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나온 그 시간들은 지옥 같았고 암흑 같았다. 만약 그 힘들었던 시간을 내가 여태까지 배운 것을 알고 겪었더라면 조금 덜 불안하고 조금 더 즐겁지 않았을까. 이 글은 이런 배움을 나누는 참고서다. 진로를 찾는 불확실한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당신에게 들려주는 현실적인 조언. 당신이 결국 자신의 자리를 찾고 더 단단해질 것이라고 격려하는, 앞서 겪은 이들로부터의 통찰과 대안이다.




'이상한 나라를 준비하는 참고서' 목차

'이상한 나라를 준비하는 참고서' 소개
1. 배경
2. 다양한 경로와 이슈들
3. 11명의 ‘미국 유학생 와이프’들에게서 찾은 인사이트
4. 이상한 나라를 준비하기 위한 지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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