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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효진 Apr 17. 2017

1.1. 우리 안의 ‘미국 유학생 와이프’

미국 유학생 와이프의 삶은 치열하다. “남편 따라 미국 가니 팔자 좋다”는 얘기는 그 앞에 놓인 거대한 혼란을 모를 때나 가능한 말이다. 처음에는 일을 떠나 여유를 즐기는 삶이 신선하고 즐거울 수 있으나 이내 불확실한 자기 진로에 불안하고 혼란스럽다. 유학생의 와이프로서 취업이 금지되는 신분의 제한이 있고 거주하는 나라의 언어에 능숙하지 않으면, 단순히 새로운 나라에서 진로를 계획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진로를 위한 신분을 만들고 말을 배워야 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많은 것을 이룬 듯한 때에 갑자기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 상황은 말하자면, 진로의 최전선이다.

조지아텍을 걸어가다 포착한 순간. 남들과 다른 속도로 사는 일에는 과감함이 필요하다.

우리들 대부분은 계속 걸어가는 삶에 익숙하다. 잠깐 멈추는 법에 대해 배우지 못했고, 주위의 사람들을 통해 그런 삶을 보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직장과 경력이라는 무대에서 내려와 잠시 쉬고 싶어도 다시 올라가지 못할까 무서워 내려오지 못한다. 그리고 막상 걷던 길에서 멈춰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당황할 수밖에 없고, 다시 일어서지 못할까 두렵다. 그렇지만 걷던 길을 멈추고 새로운 경험을 하며 다음 길을 찾는 일은 갈수록 당연한 일이 되고 있다.


갭이어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말리아 (The New York Times)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큰딸 말리아가 2016년에 하버드대 입학을 1년 미루고 갭이어를 갖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우리나라에서도 갭이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갭이어는 원래 영국, 미국 등에서 대학 진학을 앞둔 학생들이 여행이나 인턴십, 봉사활동 등을 하면서 진로를 탐색하는 기간을 일컫는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갭이어는 이미 학교를 다니고 있는 대학생뿐만 아니라 회사에 다니고 있는 직장인이 휴직이나 사직을 한 후 잠시 원하는 일을 하며 진로를 다시 탐색하는 시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적성과 상관없이 획일화된 입시와 경쟁이 치열한 취업을 통과한 직장인들이 자신의 꿈과 인생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보고자 갭이어를 선택하는 움직임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직장인들의 갭이어는 부모와 사회의 기대대로 입시와 취업을 거친 젊은이들이 자신의 인생과 꿈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기 위해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취업 후 자신의 적성과 상관없는 일에 지치거나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다 돌파구로써 갭이어를 선택한 후 비로소 자기 삶의 주체로서 다른 사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직업과 인생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 교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주위의 기대에 맞춰 자라온 우리 20대들은 서른 즈음에야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도전하는 경향을 보인다"며 "갭이어족의 증가는 이런 한국 사회의 특성을 잘 반영”하는 것이라 분석했다(기사 링크).  


퇴사 준비


경기침체로 인한 고용불안, 일과 삶의 불균형, 강압적인 조직문화 등으로 인해 현재 직장의 대안을 적극적으로 고민하는 직장인들도 늘고 있다. 은퇴가 아니라 이직이나 창업을 위해 퇴사를 고려하는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퇴사를 준비하는 것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회사가 평생을 보장해줄 수 없고 고용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은 시대에, 회사에 취직한 사람이라면 언젠가 만나게 될 퇴사를 보다 일찍 준비하고 또 다른 기회로 활용하자는 취지다.

<퇴사 학교>란 책을 쓴 장수한 씨 등이 설립한 ‘퇴사 학교'에서는 “지금 퇴사를 할 수도, 이대로 회사를 다닐 수도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어른들이 막연한 퇴사가 아니라 준비된 퇴사를 할 수 있도록 수업, 팀 프로젝트, 개별 코칭을 제공한다. ‘퇴사학개론’, ‘주말 창업 워크숍’, ‘회사 다니며 내 가게 창업’과 같이 퇴사 후를 제대로 준비할 수 있는 가이드와 함께, 퇴사를 준비하는 선배와 동료들을 만날 수 있다. 또 여행 스타트업 트래블코드는 콘텐츠 크라우드펀딩 사이트 퍼블리 Publy를 통해  '퇴사 준비생'을 위한 여행 콘텐츠 ‘퇴사 준비생의 도쿄 - 진짜 출장은 지금부터다’를 출간했다. 자기만의 비즈니스를 만들기 원하는 퇴사 준비생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사업 관점으로 도쿄를 여행하며 발견한 인사이트와 아이디어를 제공하고자 했다. 


경력단절과 재취업


여성들의 임신-출산-육아 부담으로 인한 퇴사와 이로 인한 경력단절은 우리 사회의 큰 이슈이다. 한국고용정보원 장서영 박사의 ‘고학력 경력단절 여성의 노동시장 재진입 과정에 관한 질적 연구’에 따르면, 1980년대에 한국의 대학 정원이 증가하면서 여성들도 빠르게 고학력화 되어 왔다. 남자들과 똑같이 경쟁하며 공부해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 애써온 여성들은 결혼 후에도 평생 일할 수 있는 직업을 갖기를 원한다. 또한 일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자아실현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결혼한 여성이 육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한번 일을 그만두면 다시 일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 더욱이 가사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현실은 자신의 일을 계속하기 원하는 여성들이 전업주부의 역할로만 만족하며 살기 어렵게 만든다.


위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고학력 경력단절 여성들의 재취업은 만만치 않다. 아직까지도 경력단절 후 찾을 수 있는 직업들에는 저학력, 저숙련, 저임금 직종이 많다. 고학력 경력단절 여성들을 위한 취업시장이 발달되어 있지 않다는 얘기다. 또한 결혼 전의 취업과 달리 육아와 직장을 병행해야 하는 현실은 새로운 구직 과정에서 악조건이 될 수 있다.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경력단절과 재취업 과정에서 여성들이 겪는 진퇴양난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출산 전 홍보대행사에서 일을 하던 82년생 김지영 씨가 경력단절 후 마트의 아이스크림 가게 아르바이트 기회를 두고 고심하는 모습은 내가 미국에서 만난 유학생 와이프들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해외 이주와 trailing spouse


치열한 취업 경쟁과 취업 후 긴 노동시간 등으로 인해 젊은 세대에서 해외 이주에 대한 관심이 증가해왔다. 해외유학 및 해외연수의 경우, 2016년 국외 한국인 유학생은 22만 3천908명으로 2015년보다 4.3% 증가했다. 대학 이상의 학교에 유학하는 학생들의 수를 집계한 것으로 어학연수를 포함한 수치다(기사 링크). 유네스코 통계연구소의 2014년 자료에 따르면, 학위 취득을 목적으로 전문대를 포함해 대학이나 대학원에 1년 이상 유학한 학생들의 수를 출신국별로 비교했을 때 한국은 대학생 이상의 해외 유학생 수가 중국, 인도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많았다(기사 링크). 


해외에서 직장을 찾거나 학교에 입학하는 사람이 있으면, 많은 경우 그 사람을 따라 같이 이동하는 가족이 있게 마련이다. 배우자가 직장을 구한 지역으로 함께 이사 가기 위해 자신의 일을 그만둔 사람을 영어로 trailing spouse라고 부른다. Trailing spouse라는 말은 직역하면 ‘뒤쫓아가는 배우자’라는 말로, 1981년 The Wall Street Journal의 Mary Bralove가 배우자를 따라 같이 지역을 이동하면서 자신의 진로를 희생하는 현상을 포착해 붙인 표현이다. 어떤 이들에겐, 배우자를 따라 새로운 나라에 가는 것이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에게 이는 경력과 정체성을 뒤흔드는 걱정스러운 상황이다. 2013년에 Permits Foundation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117개국에 거주 중인 3,300명의 trailing spouse들 중 65%가 새로운 나라에서 일을 하고 싶어도 일할 기회를 찾지 못했다. 본국에 있을 때는 3,300명 중 79%가 취직을 했었고 10%는 자영업을 하고 있었고,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11%에 지나지 않았었다. 이러한 상황은 배우자를 따라 이동한 또 다른 배우자들의 삶뿐만 아니라 둘 사이의 관계에 부담이 된다. 2012년 Global Relocation Trends Survey에 따르면, 해외근무가 실패로 끝나는 주요 이유 중 하나가 배우자의 커리어 문제였다. 


주위의 얘기를 들어보면, 해외에 사는 일은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 시도할 수 있는 ‘배를 타는 일’과 같다. 좋은 조건이 주어진다면 언제든 ‘해외’라는 배를 타겠지만 또 필요하다면 그 배에서 내려 한국으로 돌아와 삶을 이어갈 수 있다. 결혼 후 성인 2명이 진로를 개척하다 보면, 내가 원하지 않았어도 익숙한 곳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나 또한 한국과 이태리에서 공부한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싱가포르로 옮겨가 일을 하다가 남편을 따라 미국에 왔다. 미국은 내게 심리적으로 가장 먼 나라였는데, 가족으로서의 삶을 위해 결정하다 보니 어느 날 미국에 오게 됐다. 해외여행을 가는 일이 어렵지 않고, 다른 나라에 사는 친구의 삶을 날마다 전해 들을 수 있는 지금, 해외에서 사는 일은 더 이상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일이 아니다. 그만큼 자기의 진로를 이어가고 다시 시작하는 일은 한 사람이 살아가며 몇 번씩 만나게 되는 익숙한 과제가 될 수 있다. 



'이상한 나라를 준비하는 참고서' 목차 및 이전 글 보기 

(월요일 저녁마다 업로드 예정입니다.)

'이상한 나라를 준비하는 참고서' 소개
1. 배경

    1.1. 우리 안의 ‘미국 유학생 와이프’

    1.2. 기대와 다른 현실

    1.3. 이상한 나라를 만드는 요인들
2. 다양한 경로와 이슈들
3. 11명의 ‘미국 유학생 와이프’들에게서 찾은 인사이트
4. 이상한 나라를 준비하기 위한 지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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