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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효진 Sep 29. 2020

모두에게 똑같지 않은, 건강보험 회원카드

미국 헬스케어의 다섯 가지 아이콘

미국에서 헬스케어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다른 나라들과의 차이를 선명하게 느낀 다섯 가지가 있다. 처음에는 신기했고 때로는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이들을 가만히 보면 미국 헬스케어의 특징과 사고방식이 보이고, 이를 통해 미국 헬스케어를 둘러싼 주요 이슈들을 살펴볼 수도 있다. 그래서 헬스케어 디자이너로서 감히 이름을 붙여봤다, 미국 헬스케어의 다섯 가지 아이콘이라고.


모두에게 똑같지 않은, 건강보험 회원카드


미국의 건강보험 회원카드는 한국으로 치면 국민건강보험공단의 건강보험증과 비슷해 보이지만 결코 똑같지 않다. 한국의 국민건강보험이 저소득층 대상의 의료급여 수급권자를 제외한 모든 국민에게 똑같은 건강보험증을 주는 것과 달리, 미국의 건강보험 카드는 상품을 가입한 회원에게만 제공하는 멤버십 카드이다. 그래서 보험사마다 보험상품마다 카드의 모양과 혜택이 다르다.


차가 있어야 이동이 자유로운 미국에서는 보통 운전면허증이 신분증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헬스케어 서비스를 이용할 때는 건강보험 회원카드가 바로 신분증이다. 그래서 운전면허증과 건강보험 회원카드는 미국에서 늘 지갑에 넣고 다녀야 하는 필수 소지품이다.


미국에서 무보험으로 지내다 남편의 인턴십 회사를 통해 정확히 인턴십 기간 동안 건강보험을 처음으로 갖게 되자 집으로 신용카드 사이즈의 회원카드가 도착했다. 받아 보기 전에는 존재조차 몰랐던 카드였다. 처음 받은 미국 건강보험의 회원카드가 신기해 지갑에 넣고 어디든 가지고 다녔다. 그러나 진료를 받거나 처방약을 살 일이 없었기에, 누군가에게 내 건강보험 카드를 꺼내 보여줄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러다 임신과 함께 남편의 학교를 통해 한 학기의 건강보험을 구입했다. 며칠 후 집으로 배달된 새로운 건강보험 회사의 건강보험 회원카드는 이전 카드와 사이즈는 같았지만 색깔도 담긴 내용도 전혀 달랐다. 카드의 앞면에는 회원 번호, 그룹명, 보험상품명 등의 코드와 함께 서비스별 가입자 분담금(copay) 비용이 표시되어 있었고, 뒷면에는 고객 센터, 24/7 간호사 상담 등의 전화번호가 나와 있었다. 적나라하고 구체적인 글자들을 손에 쥐고 미국 헬스케어 서비스를 본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산부인과를 고르고 골라 진료를 예약했다. 일단 건강보험을 통해 진료를 받고자 한다면, 최소한 건강보험의 그룹명과 회원 번호를 알아야 예약을 시작할 수 있었다. 예약 담당자는 내가 선택한 의사의 예약 가능한 시간 앞으로 예약을 잡아주기 위해 나의 건강보험 정보를 하나하나 물었다. 나는 보험 카드를 손에 쥐고 내 이름과 생년월일, 건강보험 회사명과 회원 번호, 그룹명과 보험상품명 등의 숫자와 알파벳을 또박또박 발음했다. 암호 같은 코드들이었다.


클리닉의 예약 담당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예약자의 건강보험 행정처리를 위한 정보를 정확히 모두 파악하는 일인 듯했다. 미국에서 처음 간 클리닉에서도 가장 먼저 할 일은 건강보험의 회원카드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리셉션의 직원은 내가 건넨 회원카드를 통해 나를 확인한 후 새로운 환자가 진료 전에 읽고 서명해야 할 서류들을 넘겨줬다.


본격적으로 클리닉에서 의사를 만나고 각종 검사를 받으면서 보험 카드가 단순한 플라스틱 카드 이상의 의미를 지님을 알게 됐다. 산부인과에서는 내 건강보험에 따라 검체를 보내는 외부 검사기관을 달리했다. 난임클리닉은 예약 때 입수한 정보에 따라 진료 전 이미 내 건강보험의 난임 관련 커버리지를 확인해 알고 있었다. 약국들은 동일한 처방약에도 건강보험에 따라 사람들마다 다른 비용을 요구했다. 건강보험 회원카드가 마치 한 사람이 어떤 대우를 받을지를 결정하는 신분증 같았다.


여러 보험 회사들을 이용하면서 보험회사의 성격이 회원카드에 담기는 정보에도 차이를 만듬을 보았다.


사진. 2017년 8월부터 1년 간 이용했던 BCBS GA 건강보험의 회원카드

주치의를 거치지 않고 자유롭게 여러 과의 전문의를 만날 수 있는 이전 보험의 경우, 이용자가 이용하는 클리닉과 병원들은 여러 보험회사의 다양한 보험상품을 가진 환자들을 받는다. 이때의 회원카드의 앞면에는 내가 가진 보험의 정보와 가입자 분담금 액수가 빼곡히 기록되어 있었다. 내 보험을 가지고 응급실을 방문했을 때, 일반의(OV, Office Visit)나 전문의(SP OV, Specialist Office Visit), 카이로프랙터를 만났을 때, 처방약을 조제했을 때 등의 코페이 비용이 나와 있다. 그래서 클리닉에서 진료를 받은 직후 코페이 지불을 요구받아 회원카드에 적힌 금액을 보여주고 그에 따라 비용을 바로 지불한 적도 있다.


사진. 2019년 9월부터 현재까지 이용하고 있는 Kaiser Permanente of Washington의 회원카드

그와 달리, 현재 이용 중인 Kaiser Permanente의 회원카드는 무척 단순하다. 카드 앞면에는 내 회원 번호, 네트워크 이름과 약국 정보만이 표시되어 있고, 뒷면에는 문의를 위한 각종 연락처가 표시되어 있다. 사실, 진료를 위해 KP Medical Center를 방문하거나 온라인으로 상담을 받는 경우, 대부분 실물 카드를 보여줄 필요가 없다. 나의 회원 번호와 이름, 생년월일을 묻고 대답해 신원 확인을 끝낸다. KP는 건강보험사인 KP가 헬스케어 서비스를 직접 운영한다. 직원들이 각 회원의 회원번호 만으로도 회원에 대한 정보와 분담금 수준을 바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기에, 보험 카드에 구구절절한 설명을 담지 않는다. 보험 카드에 담긴 정보의 양 만으로도 보험사의 운영 방식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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