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헬스케어의 다섯 가지 아이콘
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등장인물이 욕실이나 부엌 한쪽의 캐비넷을 열면 원통형의 오렌지색 플라스틱 약병들이 줄지어 서있는 모습이 보일 때가 있다. 작은 원통형의 오렌지색 플라스틱 약병은 미국에서 가장 일반적인 처방약 조제 방식이다.
그림. 미국 가정의 약병 보관 예
(출처. 유튜브 CVS Health 채널 Introducing Prescription Schedule (2017/9/19))
한국의 약국은 처방약을 조제할 때 한 번에 같이 먹을 약들을 투명한 비닐이나 흰색의 반투명 종이로 된 조제포에 함께 담아 준다. 이와 달리, 미국에서는 처방약을 약 종류 별로 개별 약병에 각각 담아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미국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처방약의 약병 색상이 오렌지색 또는 갈색인 이유는, 이 색상들이 자외선으로부터 약병의 내용물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외부에서 내용물을 충분히 확인할 수도 있다. 또 눈에 잘 띄기 때문에 캐비넷이나 서랍, 가방에서 찾기가 쉽고, 오렌지색 병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약병이라 생각하게 된다.
출산 후 병원에서 이틀 밤을 잔 후 퇴원할 때 받은 처방전에 따라 약국에서 오렌지색 약병 3개와 일반의약품 약병 2개를 받아왔다. 밤낮없이 신생아를 돌보며 좀비 같은 삶을 사는 시간에 복용 시간이 제 각각인 약들을 시간에 맞춰 개별 약통에서 하나씩 꺼내 먹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약을 먹는 과정의 번거로움은 고려하지 않고 약 종류 하나에 오렌지색 약병 하나로 성실하게 약을 담아준 약국이 원망스러웠다. 최종 사용자(end user) 입장에서 오렌지색 약병은 조제 과정의 편의를 극대화한 공급자 중심의 디자인이었다.
사진. 출산 후 처방전에 따라 받아 온 약병들. 통증이 심할 때를 대비해 받아온 마약성 진통제인 옥시코돈을 제외한 다른 4개 약들을 정해진 시간 간격으로 복용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미국의 약국들에서 처방약 구입 시 받는 약병은 약국마다 사이즈와 색상에 차이가 있기는 하나, 다들 한 손으로 집을 수 있을 만큼 크기가 작아 쉽게 휴대하거나 보관이 가능하다. 병의 사이즈는 작지만, 겉면에 감아 붙여주는 스티커에는 약국 이름, 약국 주소 및 연락처, 약의 이름, 환자 이름, 처방 번호, 처방 의사 이름, 조제일, 투약 주의사항, 제조사, 약의 유통기한 등의 정보가 빼곡하게 담겨있다. 한국처럼 약사(Pharmacist)로부터 약의 주의사항과 복용 방법에 대해 설명을 듣는 복약지도를 받는 대신, 약사와 함께 일하는 Pharmacy Technician으로부터 약과 약에 대한 별도의 설명지를 건네받고, 특별한 질문이 없다면 약사와의 대화 없이 약국을 나서게 될 수도 있다.
사진. 처방약병과 함께 받은 약 정보. 해당 약에 대한 복용법, 부작용, 주의사항 등이 담겨 있다.
약국에서 처방약을 통에 덜어 받는다고 해서, 한 번에 받는 알약의 수가 병을 채울 만큼 많은 것은 아니다. 건강보험들은 환자의 안전과 비용 억제를 위해 한번에 조제되는 약의 양을 한 달 단위와 같이 제한한다. 마약성 진통제와 같이 주의가 더 필요한 약물은 한 주 단위로 분량을 제한할 수 있다. (참고. CVS to Limit Opioid Prescriptions to 7-Day Supply (NBC News, 2017/9/21)) 그래서 처방전에 포함된 리필(refill) 횟수 안에서 약을 추가로 구입하기 위해 약국을 다시 방문해야 하고, 처방전이 허용하는 리필 횟수를 다 채운 경우 의사에게 새로운 처방전을 요청해야 한다.
만성질환이 있어 여러 개의 약을 장기 복용해야 하는 사람들의 경우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여러 처방약을 받았다면 오렌지 약병에 담긴 약들을 받아온 후 집에서 복용일과 시간에 따라 약들을 조합해야 한다. 2015~2016년 자료에 따르면, 미국에서 40~79세 성인의 22.4%가 5개 이상의 처방약을 복용한다. Amazon에서 Pill Organizer를 검색하면 수많은 상품이 나오는 것은 그만큼 수요가 많기 때문이다.
2018년에 아마존이 인수한 온라인 약국 필팩(PillPack)은 이런 복잡한 약 복용 경험을 보다 쉽고 편하게 만들고자 했다. 디자인 회사인 IDEO와의 협업을 통해, 개별 오렌지색 약병이나 일/월/화/수/목/금/토가 표시된 플라스틱통(Pill Organizer)을 사용하는 대신, 복용 시간에 함께 복용할 처방약과 영양제를 시간 순서대로 담긴 팩을 집으로 배달받는 서비스를 개발했다. (참고. The Pill Pusher - A better way to dispense prescriptions, (The Atlantic, 2014/12)) 처방약을 개별 약통에 각각 담는 대신 같이 복용할 약들과 함께 한 팩에 담아 제공하는 방식은 미국에서는 일부 독립 약국들만 환자의 편의를 위해 제공하던 방식이었다.
PillPack의 디자인은 단순히 함께 먹는 약을 한 팩에 같이 담는 것을 넘어, 약의 복용 시간과 약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보여주는 정보 디자인과 이를 시간 순서대로 한 팩 씩 꺼낼 수 있는 제품 디자인을 포함한다. 또 처방전에 따라 매달 자동으로 처방약을 리필해서 배송해주고, 처방전 갱신이 필요하다면 이용자를 대신해 의사에게 연락하는 처방전 관리 서비스를 제공한다.
사진. 복용 시간 순대로 팩에 담긴 약을 하나씩 복용하는 PillPack의 포장 방식
(출처. https://www.pillpack.com/)
PillPack의 디자인이 호응을 얻자 CVS도 유사한 방식의 SimpleDose 옵션을 소개했다. SimpleDose 방식의 약 포장을 선택하는 고객에게 복용 시간과 순서에 따로 팩 별로 약을 담고 약 팩들을 보관함에 담아 제공한다. 또 고객이 가지고 있는 CVS 약들과 처방자의 지시를 확인해 복용 일정을 자동으로 생성해주는 ScriptPath라는 이름의 새로운 처방약 관리 도구를 선보였다. 만들어진 처방약 일정표는 약병에 붙이는 라벨에 포함되고 종이로도 제공되어 벽에 붙여놓고 확인할 수 있다. 나이 든 사람도 내용을 정확히 확인할 수 있도록 글자 크기를 보다 크게 조정했고 아이콘에 컬러코드를 적용했다.
화면. CVS의 SimpleDose 패키지 제공에 대한 유튜브 광고
(CVS - Pre-sorted Prescription Packs Delivered to Your Door at no added cost (2019/10/22))
사진. 약의 복용 일정을 표시한 ScriptPath 라벨 및 일정표
(출처. Simplifying Medication Schedules with ScriptPath (CVS Health, 2018/9/12))
PillPack에서 CVS로 이어진 약병 디자인의 변화는 약국이 약의 판매를 넘어 처방전과 약의 리필을 관리하고 약을 보다 편하게 복용할 수 있도록 역할의 범위를 확대했다. 약병 또한 약의 보관 뿐만 아니라 약을 보다 쉽게 복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로 진화했다. 여러 개의 약을 시간 순서대로 팩에 담는 것, 처방전에 따라 약을 추가로 배송하고 새로운 처방전을 요청하는 것, 복용 중인 모든 약의 일정을 계산해 개인화된 시간표를 만들어주는 것 모두 자동화 없이는 힘든 일이다. 미국에서 약병의 변화를 통해 봐야하는 것은 결국 약국의 변화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