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가 된 자리에서
2019년 9월.
나는 다시 버클리 캠퍼스에 있다.
여기에 다시 오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지난 1년 동안
아무 일도 없었고,
그래서 더 많은 일이 있었다.
10년 넘게 함께한 사람과 헤어졌다.
사람들은 우리를
천생연분이라고 했다.
그는 나에게 참 잘 대해주었고,
나도 그가 참 좋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더 이상
함께가 아니어야 했다.
그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나의 불안증과 공황장애는
그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그럴수록
죄책감이 커져갔다.
그와 있을수록
이상하게도
불안은 점점 더 커져갔다.
처음 캐나다에 교환학생으로 갔을 때,
나는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를 만났고,
그는 나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나와 결혼할 거라고 확신했다.
사실 난 그를
로맨틱한 의미의 ‘남자’로
사랑해 본 적은 없었다.
그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다정함과 스마트함,
충직함과 반항적인 기질,
미래를 바라보는 거시적 태도,
긍정적이고 열정적인 그의 모습은
나를 매료시켰다.
지금 와서야 깨달았지만,
그 선택의 시작에는
‘아빠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나의 오래된 결핍이 있었다.
아빠처럼 눈앞의 돈을 좇지 않고
큰 그림을 그리던 그가 멋있었다.
그와 함께 있을 때
처음으로
아이처럼 보호받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나는 5형제 중 넷째 딸이었다.
부모님은 늘 바빴고,
나는 뭐든 혼자 해내는 아이였다.
겉으로는 씩씩했지만
사실은 관심이 고팠다.
엄마는 내 성적표를
자세히 들여다볼 시간이 없었고,
아빠는 아들에게만
온통 관심을 쏟았다.
그 결핍을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채웠고,
항상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낯선 나라에서
그 역할을 해준 사람이,
어릴 적 내 결핍을 채워준 사람이
그였다.
문제는
그 관계가 점점
의존과 과잉보호로 변해갔다는 것이다.
영어가 서툴러 전화가 두려우면
그가 대신 바로 나섰고,
운전을 연습해야 할 때도
내가 걱정된 그는
연습할 틈을 주지 않았다.
학교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데려오는 일을
매일 반복했다.
과제가 어려우면
함께 붙잡고 해결하려 했다.
나는 점점
실수할 기회를 잃어갔다.
대학에서
친한 친구 한 명을
만들 틈도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내 세계에는 그 사람만 남았고,
나는 고립되고 있었다.
어린 아이가
실수를 통해 배우고
성장하듯,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과정을 겪지 못한 나는
작은 실수 하나에도
몸이 먼저 반응했다.
무서워 공황이 오고,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그와의 관계가 흔들릴 때면
어느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었다.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는
힘든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3년, 5년, 10년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이민자로서
겪지 못한 게 너무 많았다.
처음에는
문제가 우리 관계라는 걸
알지 못했다.
시애틀에서 사표를 내고,
심리상담을 받고,
명상을 깊게 하면서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결핍과
그의 불안에서 시작된
의존적인 구조.
되돌리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었다.
작년, 버클리까지 왔다가
심각한 공황장애로 자퇴했던 건
우연이 아니었다는 걸.
그와 함께
이곳에서 다시 시작하면
안 된다는 걸
내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이별을 말했을 때
그는 무너졌다.
“평생을 함께 할 거라 확신했는데, 어떻게….”
우리는 3개월 동안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이별을 받아들였고,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7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가족처럼 편한 친구가 되어
웃으며 말한다.
“헤어지고 이렇게 좋을 줄 알았으면 진작 헤어질걸.”
하지만 그때의 우리는
정말 죽을 것처럼 힘들었다.
이별 이후,
나는 다시 버클리에 지원했다.
전혀 계획에 없던 선택이었다.
3차 지원 마감을
하루 앞둔 밤,
침대에서 갑자기 벌떡 일어나
두 시간 만에
지원서를 써서 제출했다.
미친 사람처럼.
그리고 나는
3차 마지막 세 명의 합격자 중 한 명으로
다시 버클리 MBA에 입학했다.
그래서 지금,
나는 다시
이 버클리 캠퍼스에 있다.
신입생으로.
내일은
오리엔테이션이다.
나는 혼자다.
그 사실이
예전만큼 무섭지 않다.
이번에는
해볼 수 있을 것 같은
단단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