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m.news.nate.com/view/20250703n25481?mid=m02
언어학, 특히 인지언어학과 의미론, 화용론을 연구해 온 그의 학문적 배경이 법학적성시험(LSAT)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그는 "물론 일정 부분 선천적인 요소도 있겠지만, 충분히 훈련해서 극복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라고 덧붙였다.
훌륭한 일이다. 학제 간 융합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게 들리는 시대에, 언어학을 전공한 이가 법학이라는 또 다른 언어의 질서에 도달했다는 점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특히 화용론과 의미론은 법적 언어의 해석, 함의, 문맥을 이해하는 데 실질적인 통찰을 제공할 수 있으니, 이론이 실천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말이 그리도 반갑지만은 않다. 훈련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선천성보다 후천성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그 말은 누구에게나 같은 무게로 적용되지 않는다. 훈련이라는 말 속에 감춰진 시간, 비용, 자원, 지적 환경의 차이는 왜곡된 평등의 얼굴로 가장된다. 결국 '훈련 가능성'을 말할 수 있는 이는 이미 훈련할 자리를 확보한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법학적성'이라는 이름을 붙인 그 시험이 과연 적성의 무엇을 제대로 재단하는지, 묻게 된다.
그것은 법률가로서의 직관, 윤리, 통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제한된 시간 안에 정해진 형식의 언어를 해석하고 추론하는 능력을 겨루는 시험이다. 특정한 방향의 언어감각, 특정한 구조적 사고에 익숙한 자들이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그 시험은 누군가에겐 ‘적성’이고, 누군가에겐 그저 ‘결격사유’일 뿐이다.
나는 법학을 사랑했고, 그 언어의 정합성과 철학, 인간과 제도의 긴장을 이해하고자 오랫동안 씨름해왔다. 그러나 그런 나의 사랑은, 점수 몇 줄 앞에서 수차례 좌절당했다. 그것이 진정 적성이 부족한 탓인지, 아니면 제도의 감각이 너무 협소한 것인지 아직도 판단이 서지 않는다.
이 시대가 진정 ‘적성’을 찾고자 한다면, 시험지를 넘어서는 세계를 더 넓게 바라보아야 한다. 누군가의 ‘훌륭한 일’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유감스러운 일’이 될 수 있다는 점, 그 간극 속에 얼마나 많은 진심들이 사라졌는지를 잊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