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은 중도화를 했다기 보다는 중도층을 끌어당김 내지 중도층이 어쩔 수 없이 택하게 된 형국에서 선택을 받게 된 것이다.
중도 포지셔닝에 성공해서 즉 중도층이 실제로 이재명을 신뢰하거나 최소한 대체로 할 만한 사람이다 라고 보아서 택했는지 어땠는지는 의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여론조사상 '중도층'에는 중립과 중도가 혼재되어 있다.
1. 양쪽 다 별로고 의견 없음
2. 양쪽 다 그럭저럭인데 의견 없음
3. 양쪽 다 별로고 내 의견이 새로 있는데 그것이 결론적으론 양쪽의 사이 어딘가 (어느 한 쪽에서 더 나간거면 좌익~극좌나 우익~극우일테니)
4. 양쪽 다 그럭저럭인데 그 2개를 시너지 내도록 창조적으로 합쳐보자
통상 중도층은 1, 2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실상 중립층이거나 정치무관심ㆍ정치혐오 등에 가깝다.
3, 4는 드물지만 진정한 의미의 중도층이라 할 수 있다.
통상 학자, 실무자나 정치인들 중에 있고 일반 국민들 사이엔 잘 없을 것이다.
종래에는 그들이 3, 4를 바탕으로 중도좌파 or 중도우파 중 어느 한쪽을 아우르면서 자파에 가까운 중도층과 극단층(좌익~극좌 or 우익~극우)을 끌어가는 식이었다.
이제는 양대 진영의 강경파나 극단층이 중립ㆍ중도까지 끌고 가려고 줄다리기를 하며 선택을 강요하는 상황이 되었다.
정치에서 '중도'와 같은 포지셔닝의 실효성이란 화자의 선언이 아니라 청자의 인식에 달렸다.
그 인식은 말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정치적 누적으로 형성된다.
강한 이미지와 분열적 리더십으로 정체화된 정치인은 중도라는 언어를 써도, 사람들은 그를 중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본인이 철학적ㆍ한국정치 내 스탠스적으로 진지하게 중도라 생각하건, 보수 내지 진보 표심을 일부라도 잡아보려는 공학적 시도건 간에.
중도란 말은 누구나 쓸 수 있지만, 그 말을 들었을 때 사람들이 최소한 ‘그래, 그럴 수 있지’라고 느껴야만, 비로소 그것은 중도로서의 정치적 기능을 한다.
내 생각에 이재명은 이미 호불호나 인식이 어느 정도 갈리고 결정된 정치인이라 '중도보수론'은 민주진보진영 내에 있던 프로파간다ㆍ프레임의 발달이었을 뿐, 거국적으론 별 의미나 실효성이 없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