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에 대한 몰이해

by 남재준

[조금 전, 진성준 의원의 “10억원 대주주”에 대한 비판여론을 근엄하게 비난하는 글을 봤습니다. 그냥 감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시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말하고 있었고, 다른 글들을 보니 진보담론을 연구하는 전문 학자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니 들끓는 여론에 대한 비난도 상당히 설득력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깐 생각했습니다. 뭐가 틀린 걸까? 맞는 말인데 왜 이렇게 불편할까?
이전부터 느꼈던 것인데, 사회과학이나 인문학 전문가의 분석이, 분명 전체적인 논리구조에 큰 이견이 없는데도 불편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드디어 오늘, 그 글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지금을 자연과학이 진리로 숭배받는 시대라고 다들 생각합니다만, 재미있게도,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이 절대적인 진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언제든지 반박될 수 있다는 사실을 계속 상기합니다. 그것이 가능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진실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절대적 기준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자연과학은 실험과 관측으로 진리인지 여부가 판별됩니다. 그리고 지금은 진리라고 생각되는 이론도 언제든지 다른 관찰에 의해 부정될 수 있습니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면 과학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은 아닙니다. 특히 철학적, 이념적 측면이 강한 분야일수록 이론이 갖는 교조성이 강합니다. 그리고 그런 도그마틱한 성격이 강해지면, 이론이 현실을 꾸짖는 일이 벌어집니다.

제가 학부때였습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전국단위 선거가 있었는데, 진보세력들의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걸 분석하는 학술대회가 열린다고 해서 잠깐 가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나오는 말들이 제 입장에서는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결국 하는 말들이 모두 아직 우리 국민이 부족하고, 덜 깨우쳐졌다는 식의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다 들을 수가 없어 중간에 나오면서, 같이 갔던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민주주의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전제하는 정치체계고, 선거의 결과는 그 국민들의 집단적 선택이 나타난 것인데, 민중이니 민주니 하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그 결과를 일단 받아들이고 접근해야지, 국민이 틀렸다고 말하는 게 맞을까? 저게 맞는 태도일까?”

오늘 본 글도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다 맞는 말이고 내적으로는 정합성이 있는 분석입니다만, 사회는 그렇게 정합성 있는 일관된 이론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매우 복잡한 비선헝계이고, 마르크스주의부터 그랬던 것처럼, 사회를 분석하는 모든 이론들도 다시 사회 자체의 되먹임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예측이 되먹임으로 작용하지 않는 대기 현상도 일주일 이상 정확히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한데, 모든 예측이 다시 되먹임으로 작용하는 system을, 그것도 민주주의를 따른다는 학자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교조적으로 내세우면서 분석하는 게 맞을까요? 적어도 수학적, 물리학적으로는 인정될 수 없습니다. 수학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이론이 세상을 제대로 설명하고 분석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계속 불편하게 느꼈던 것은 결국 현실, 관측을 이론이 꾸짖는 모습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전 이게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훨씬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건“과학”을 이해하는 관점의 문제였습니다.

제가 되먹임 이야기를 했는데, 진성준 의원의 가장 큰 잘못은, 시장이 되먹임 계라는 것, 그리고 정부의 방침이 매우 중요한 되먹임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걸 예측하지 못한 것도 문제지만, 결과가 나타난 후에도 받아들이지를 못했으니까요.

저도 이론물리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이론의 중요성을 정말 잘 압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이론도 실제 시스템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시장이 그렇게 요동친다면, 국민들이, 적어도 국민들의 심리가 그렇게 반응한다면, 그런 사실을 인정하고 방법을 찾는 것이 과학적인 접근입니다.]


1. 진성준 의원은 학자가 아니라 정치인이다. 나는 진성준 의원과 친문의 '윤리적' 경제정책(사회국가)에 회의적이긴 하지만 나름의 명분과 정합성은 있다고 본다. 그 뿐이지, 지금의 친명처럼 정합성도 없으면서(친시장적 언어와 반시장적 정책의 혼종) 저희들이 도그마를 가지고 도그마적이라고 진성준 의원을 공격하는 것을 보니 기가 막힌다. 무슨 과학이니 하는 것까지 끌어와 메시지가 아닌 메신저를 공격하면서도 정작 본인들은 그 잘못을 모른다.

2. 인문사회 이론이 도그마와 해석ㆍ분석의 경계에 서 있는 것은 맞다. 문제는 잠재적으로라도 반증 패러다임이라는 게 있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일례로 거시정책에 대한 케인스학파와 시카고학파의 견해 차이는 근본적으로 대공황의 원인부터를 실물에서 찾느냐 통화에서 찾느냐에서부터 나누어졌다. 이건 지동설처럼 명백하게 잘라 결론 내리기 어려운 사안이다. 본질적으로 경험적 방법론으로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연구자 본인도 그 맥락 안에 있으니. 결국엔 서로 끊임없이 논쟁하는 수밖엔 없다. 게다가 인문사회는 태생적으로 고통에서 벗어나기, 정부를 설계하기 등 실천적 과제들과 불가분이었다. 평가와 대안 제시는 불가피한 과제이며 경우에 따라선 인문사회 분야의 존재 이유이다.

3. 우리가 민주사회에 살고 있다고 해서 민의가 반드시 옳다고만 할 순 없다. 다수의 의지에 대한 무비판적ㆍ감성적 가치 부여야말로 독단적 도그마만큼 위험하다. 나아가 소수의견을 반민주적ㆍ엘리트주의적ㆍ도그마적이라고 바로 비약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자꾸 진보 운동권과 연관 짓지만, 되려 지금 실용이니 하는 것을 강조하는 민주당 주류가 운동권의 폐단만을 그대로 극대화한 집단이다. 진성준 의원의 주장에 일리가 있거나 없거나만 가지고 논하면 그뿐이지, 일단 타당하고 정합적임을 인정하면서도 감정적으로 못마땅한 것을 끌고 가 과학이니 교조니 하며 감정을 궤변으로 치장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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