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희망하며

by 남재준

생각과 감정이라는 게 읽지 않고 쌓아 둔 책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10년 가까이 부침을 겪으며 돌고 돌아 계속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가다가 더는 갈 힘이 없어졌다. 내가 무너지는 순간이 강제로 쉬게 되는 순간이었다. 쉬다 보니 내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마음속 깊은 어딘가에 묻어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테면 쉰다는 것 자체에 대한 불안감과 죄책감 같은 것. 무언가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지 않으면 나를 위해 희생하는 누군가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도피처였고 그런다고 죄책감이 덜어지는 건 아니었다. 더디더라도 쉬고 가야 할 때는 쉬고 가면서 최종적으로는 내게도,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맞는 길로 가는 게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일이, 결국엔 나 자신의 회복력과 감정 자본이 없으면 그냥 소위 번아웃만 더 악화시키는데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아무리 사소한 아르바이트라도 일보다는 사람과의 관계가 항상 더 스트레스라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나중에 보니 내 일만이 아니라 학원강사들은 누구나 잡무나 학습관리 등에 관한 사소한 간섭을 받는 모양이었다. 정말 감정을 담지 않고 조금 부당한 일이 있어도 그냥 다 내가 마음속으로만 안고 가려고 했는데, 도저히 그렇게 되지 않았다 – 아니 더 견디기가 힘이 들었다. 지금도 아이들에게는 미안하게 생각한다.


옛날 드라마를 참 좋아하는데, <가문의 영광>에 보면 종손인 하수영(전노민 배우 役)은 감정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그건 종가(宗家)로서 전통을 지켜나가는 가풍에 대한 담담한 수용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사람에 대한 무관심, 무감정 같은 것 그러니까 하나의 ’저항‘이기도 했다. 그 무관심과 무감정은 자신보다 여섯 살 위의 아내 영희(김예령 배우 役)의 감정적 고통과 불륜이라는 극단적 행위 표출까지 유발하지만, 수영은 분노를 터뜨리지 않고 자기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하면서 결혼을 이어가기 위해 아내 앞에 무릎까지 꿇고 영희는 그 모습에 더 고통스러워 한다.


결국 두 사람은 이혼을 하는데, 떠나기 직전에 영희가 자신에게 가슴 설렌 적 없었냐고 설의법으로 물은 뒤에 이렇게 말한다.


’다르게 살아봐요, 수영씨..‘


정말 이유를 모르겠지만 그 한 대사를 계속 다시 보며 울컥했다.


나는 수영과 같이 특별히 엄격한 집안 전통이나 가풍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무언가를 참고 산다는 생각이 마음 한 켠에 늘 자리 잡고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학교 때 후배가 마음먹자마자 그다음 날 바로 여행을 떠났다는 말에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했더니 ’그냥‘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 ’그냥‘이 나는 왜 이리 안 됐던 건지. 어쩌다가 내가 뭘 좋아하고 뭘 느끼고 있는지조차 모르겠고 나의 예전이 어땠는지를 더듬어가야 할 정도로 기억이 나지 않게 된 건지..


올해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1년에 한 번 정도 울까 말까 했었다. 그러고 보면 나 자신을 돌아볼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찾아온 감정은 슬픔 정확히는 자기 연민 비슷한 거였다. 항상 열심히만 산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 나름대로 싸우고 견뎌 가며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의 내 짧은 인생에 뭐가 남은 걸까. 그런다고 해서 세상이건 운명이건 뭐건 간에 최소한의 배상은커녕 오히려 불행이 달려오는 가속도만 더 붙을 뿐이었는데..


하지만 필요한 과정이라고도 생각한다. 나는 이토록 주위에 친구가 없는 것을 일종의 콤플렉스로 생각했었고 상당 기간을 내 사회성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정말 배워야 하는 건 내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이었다. ’좀 편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3년여를 함께한 의사 선생님은 마지막 세션에서 내게 말했다. 나 자신도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목표를 추구해 성과를 내고 다른 사람들과 활발히 원만하게 지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 글을 푸념이나 고백이라는 땅굴 파기로 끝내고 싶진 않다. 그렇게 보이기는 죽어도 싫고 너무 민망해서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진 않았다. 이 글을 쓰는 것이 회복의 과정의 일부가 되기를 나는 소망한다. 한 번 흔들려 본 사람은 적어도 그다음 흔들림에 대한 마음속 예비 같은 것이라도 있게 되는 법이니까. 그리고 내 인생의 새로운 챕터로 가기 위해 책장을 넘기는 힘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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