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손연의 난 진압(238)과 학살
얼마 뒤에 비가 그치니 사마의의 지휘하에 위군은 흙산을 쌓고 지하도를 파는 등의 수단까지 동원하면서 가열 찬 공성전을 펼쳤다.
최종적으로 공손연이 항복을 청하기로 하고 자신이 왕으로서 임명한 왕건, 유부를 사마의에게 보냈다.
공손연은 포위를 풀면 자기 스스로 결박된 몸으로 사죄하겠다고 요청해왔다.
사마의는 이를 불허하고 왕건, 유부 등을 참수했다.
그러고는 공손연에게 격문을 보내 말하기를 ‘옛날에 초와 정이 같은 반열의 제후국이었으나 결국 정나라의 군주가 살을 드러내고 양을 끌며 맞이하였다. 나는 왕실의 신하로서 지위가 상공에 해당하는데 왕건 등이 감히 나더러 포위를 풀고 철수하라고 하니, 이것이 어찌 초와 정의 예이겠는가! 이 두 사람은 늙어 정신이 흐려져 내 뜻을 잘못 전했을 것이니, 이미 그들을 대신해 목을 베었다. 그대의 뜻이 아직 가라앉지 못하였다면, 다시 젊고 밝은 자를 보내 결정토록 하라.’
공손연이 다시 위연을 보내 기일을 정해 인질을 보내겠다고 말했는데, 사마의는 이 역시 냉정하게 거절한다.
이때 사마의의 말은 우리나라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이 자살하기 직전에 설원에게 한 ‘우리 화랑 시절 그 노래’로 등장한다.
본래 그 말을 한 사마의는 승자의 입장이었는데, 미실은 패자(敗者)의 입장에서 그 말을 하니 느낌이 묘하다.
‘군사상의 큰 줄기는 다섯 가지이다. 싸울 수 있으면 마땅히 싸우고, 싸울 수 없으면 마땅히 지키고, 지킬 수 없으면 마땅히 도망가는 것이다. 나머지 두 가지는 오직 항복과 죽음뿐이다. 그대가 자신을 묶고 나오지 않는 것은 곧 죽음을 택한 것이니, 인질을 보낼 것도 없다.’
사마의의 최종 의사를 확인한 공손연은 포위망을 돌파하려고 했으나 사마의가 병력을 보내 공손연의 군대를 완전히 패배시키고 공손연을 참수했다.
그런 후 사마의는 양평에 입성하여 15세 이상 남성 7,000여 명을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쌓아 경관(해골/머리로 만든 탑)을 세우고, 공손연이 임명한 신하들을 참하고, 장군 2,000여 명을 효수한다.
또한 처음에 공손연이 칭왕하였을 때 가둔 공손강을 석방하고, 공손연의 칭왕을 반대했다가 죽은 윤직과 가범 등의 무덤을 잘 정리하였다.
그러면서 영을 내려 말하기를 ‘옛날에 나라를 토벌할 때는 수괴들만을 주벌했을 뿐이다. 공손연 때문에 그릇된 길로 이끌린 자들은 모두 용서하노라. 중국 사람들 가운데 옛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자는 마음대로 돌아가게 하라.’
이로써 공손연의 난이 완전히 진압되고, 위가 요동을 직접 통제하게 되었다.
정사 <삼국지>와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때 위군은 장마로 곡식이 썩어 식량난이 심각했고, 장기간의 포위로 병사들의 피로가 극심했다고 한다.
공손연의 진영이 망한 것은 자중지란 탓이 컸다.
그러니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사마의의 공은 다소 과장된 부분도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2. 조예의 사망(239)과 조상-사마의의 공동 보정 체제
조예는 말년에 궁궐을 크게 수리했는데, 상시 전쟁 상태에 처해 있었던 백성들의 피폐함이 극심해졌다.
사마의는 이미 요동 원정을 떠나기 전에 이 점을 지적했고 이전에 언급했듯 진군도 죽기 직전까지 그리 했으나 조예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공손연의 난 진압 전후에 조예는 사마의에게 조서를 내려 관중을 지키라고 하였는데, 가는 도중에 또 황제가 손수 쓴 조서가 와서는 사마의를 소환하기에 이르렀다.
오가는 조서가 5번에 이르고 수명(受命)자의 입장에서는 혼란을 느낄 정도였다.
이에 사마의는 무언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끼고 서둘러 수도로 갔다.
불과 35세밖에 되지 않은(그렇다 하더라도 당대의 상황을 보면 매우 젊다고 하기도 애매하긴 했지만.) 황제는 목숨이 다해가고 있었다.
조예는 7세에 불과한 조방에게 제위를 넘기면서 후견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 그는 조진의 아들들인 조희(차남)·조훈(삼남) 등에게 이 역할을 맡기려고 했다.
당시 병약해진 황제의 곁에서 서무(書務)를 맡아보며 실권을 장악한 유방과 손자 등은 그들과 정치적으로 거리가 있어 조예를 부추겨 조진의 장남 조상에게 고명대신이 되도록 하면서 사마의를 공동 후견인으로 하였다.
조방 즉위 후 사마의는 시중, 녹상서사(황명 출납 등을 맡아보는 황제의 비서실장) 등으로 임명되고 조상과 함께 각각 병사 3,000여 명을 거느리게 되었다.
조상은 황제에게 올라오는 문서들을 자기 통제 하에 두어 실권을 독점하고 싶었고, 황제에게 아뢰어 사마의를 대사마로 옮기도록 하였다.
본래 전국을 통일한 진(秦) 왕조 때 군대 대장의 하나로서 태위를 두었는데, 전한 때에는 삼공의 하나로서 병권을 맡아보았다.
초대 태위는 혜제 때 임명된 주발(여씨의 난을 진평과 더불어 제압한 그 사람이다)이었다.
뒤에 한 무제 때에는 태위가 한동안 공석이어서 사실상 폐지와 같았다가, 위청과 곽거병을 나란히 두기 위해서 위청을 대장군으로 임명하면서 동시에 표기장군이었던 곽거병에게 대사마를 내렸다.
뒤에 곽광이 권신이었을 때는 대사마와 대장군을 겸하여 스스로 병권을 독점했는데, 곽광 사후 선제가 곽씨 가문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곽광의 아들 곽우에게 대사마를 내리면서 병권은 주지 않아 사실상 명예직이 되었다.
후한이 건국된 후 광무제 치세에 대사마는 다시 태위로 바뀌었는데, 후한 말에 유우가 대사마로 임명되면서 부활하였다.
다만 이때 태위와 대사마는 따로 존재하였다.
삼국시대가 시작된 후 대사마는 삼공(사도-사공-태위)과 더불어 명예직이 되었는데, 이는 일찍이 조조가 재상들의 힘을 빼놓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
조상의 입장에서 보면, 군권을 오래 맡아보았으며 자신과 같은 고명대신인 사마의를 치우긴 해야겠는데 높지만 실권은 없는 자리가 필요했고 그것이 대사마였다.
그런데 조정에서 앞뒤로 대사마를 역임한 자들이 모두 재임 중에 죽은 예가 있어서 적절치 않다고 하였고, 그래서 최종적으로 사마의는 태부(太傅)로 임명된다.
태부는 삼사(태사-태부-태보)의 하나로서 ‘천자의 스승’이라는 영예로운 명예직이었다.
그러나 실권은 없다는 점은 더욱 확실해졌다(태부는 대사마에게 있는 형식적 군권마저도 없으니).
더하여 사마의에게는 소하와 같이 전각에 들어갈 때 종종걸음을 하지 않고, 조회할 때 이름을 부르지 않으며, 검을 차고 신발을 신은 채로 어전에 오를 수 있게 하였다.
이는 더 바랄 것이 없는 영예이긴 하였지만 그 이면에는 사마의를 실권으로부터 철저히 배제하려는 의도가 있었고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이를 알았다.
이때 사마의는 60세에 이르렀다.
사마의의 자제들에 대해서도 관직과 작위가 내려졌으나 사마의는 이를 사양했다.
241년에 오가 침공해 들어왔을 때 사마의는 출정을 자청하였지만 위 조정은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수성전, 장기전으로 기본 전략을 세웠다.
사마의가 말하기를 ‘변방의 성이 적을 받았는데 조정이 편히 앉아있는 것은 국경을 소란케 하여 민심을 의심케 하니 이는 사직의 큰 근심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국경으로 적이 쳐들어오는데도 중앙에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변경의 민심이 악화될 것’이라는 취지로 읽힌다.
결국 사마의는 직접 남정하여 오와 대치한 끝에 수성에 성공한다.
사마의에 대한 대우와 평판이 매우 높아진 상황이었으나 그는 겸양하는 태도를 보였다.
가질수록 낮추어야 하는 이치를 안 것도 있었고, 스스로 낮추어야 적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는다는 점도 그는 알고 있었다.
사마의가 자제들에게 종종 말하기를 ‘가득 차면 비는 법이다. 사계절도 항상 바뀌거늘, 내가 무슨 덕으로 이 영화를 감당하겠는가? 줄이고 또 줄여야만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마의는 계속해서 243년에 오의 권신 제갈각을 방어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244년에 사마의가 귀환했을 때 조상의 일파인 등양, 이승 등이 조상이 공을 세우도록 하기 위하여 촉을 치도록 권하였다.
사마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출정한 조상은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철군한다(흥세 전투).
246년에 또다시 오가 북진해 들어와 10,000여 가구가 면수(현재의 한수인 강) 이북으로 도망을 갔다.
사마의가 말하기를 ‘면수 이남은 적과 가깝다. 백성들을 다시 남쪽으로 돌려보내면 적에게 당할 것이다. 지금은 임시로 머물게 해야 한다.’라고 하였으나 조상이 말하기를 ‘남쪽 방어도 하지 못하면서 백성들만 북쪽에 붙들어 두는 것은 장기적 전략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사마의가 반박하기를 ‘그렇지 않다. 무릇 물건은 안전한 땅에 두면 안전하고 위태로운 땅에 두면 위태로운 법이다. 그런고로 병서에서 이르기를, 성패는 형(形)에 달려있고 안위는 세(勢)에 달려있다고 했다. 형세는 여러 사람을 부리는 일의 요체이니 상세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적이 2만 군사로 면수를 끊고서 3만 군사로 면수 이남의 아군과 서로 대치한 채 1만 군사로 조중(오가 쳐들어온 곳)에서 마음대로 날뛴다면 어찌 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하지만 조상은 백성들을 남쪽으로 되돌려 보냈고 결국 오군의 급습으로 10,000여 명이 죽었다.
247년 4월에 하안, 등양, 정밀 등이 계책을 내고 조상이 이를 수용하여 황태후였던 명원황후 곽씨(조예의 2번째 황후)를 영녕궁으로 옮기고 군권과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다음 달인 5월부터 사마의는 칭병하며 정무에 불참하기 시작했다.
3. 조상의 짧은 집권기(247~249)와 사마의의 칩거
사람들이 기이한 노래를 불러 퍼뜨리기 시작했다.
‘하안, 등양, 정밀이 낙양을 어지럽힌다.’
조상 일파는 사마의를 의심했고, 이승이 형주로 부임하여 가기 전에 사마의에게 문안하러 간다는 핑계로 염탐하고 떠보기 위하여 방문한다.
사마의는 거짓으로 중풍에 든 환자처럼 행동하여 두 여종이 옷을 입히면 떨어뜨리고, 목이 마르다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나 잔을 잡지 못하여 가슴으로 흘러내리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정신이 혼미한 것처럼 행동했다.
이승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태부의 지병이 재발했다고 말하더니, 어찌하여 몸이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라고 하였다.
69세의 사마의는 간신히 숨을 잇는 목소리로 답하기를 ‘늙고 병들어 죽음이 코앞이다. 그대는 병주로 가면 북방의 오환과 흉노를 경계하도록 하라. 나는 이제 그대를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다...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 형제를 부탁하노라.’라고 하였다.
이승이 말하기를 ‘저는 병주가 아니라 형주로 갑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사마의가 일부러 말까지 혼동하며 넣기를 ‘아... 그래, 그대는 병주로 가시오...... .’라고 하였고 이승이 다시 형주라고 하였으나 사마의는 ‘아...... 노쇠하여 말을 혼동하니,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아무튼 본주로 가서 공을 세우시오!’라고 하였다.
황석영·이충호 만화 삼국지에서는 이승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이것 봐라! 천하의 사마의가 완전히 정신 나간 늙은이가 돼버리지 않았는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승이 간 것을 확인한 사마의는 사마사, 사마소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래... 이제 머지잖아 틈을 보이겠지. 그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이승은 조상에게 말하기를 ‘사마 공은 이미 혼이 몸을 떠난 듯하여 전혀 우려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하였고, 다음 날에는 한술 더 떠서 ‘태부는 이미 회복할 수 없고, 사람이 연민을 느낄 지경입니다.’라고 하였다.
4. 고평릉의 변 (249)
249년 정월에 조상은 조방과 더불어 조예의 황릉인 고평릉에 참배를 하러 낙양을 떠난다.
사마의는 재빨리 행동하여 명원황후에게 조상 형제를 폐하고 권한을 박탈할 것을 상주하였고, 사마사는 중호군으로서 궁문에 주둔했다.
이 장면은 <대군사 사마의>, <삼국>(2010) 등에서 묘사되는데 개인적으로는 전자보다 후자가 더 좋았다.
전자는 사마의 본인이 주인공 보정을 받아서 거의 영웅적 바이브를 가진 듯하며 대단히 감각적으로 묘사한다.
냉정한 가운데 비장함 같은 것이 느껴진다.
후자는 비장함은 그다지 없다.
후자에서는 사마의가 제갈량과 더불어 최후반부의 메인 등장인물이긴 하지만 주인공으로서의 특혜는 없어서 더 냉정한 모습들이 그대로 느껴진다.
또 사마의의 이중적 면모가 아주 잘 묘사되어 있다.
이 극 중에서 사마의는 조예 생전에 이미 매우 노쇠한 듯 천자의 안배로 마차를 타고 궁 안에 들어온 후 지팡이를 짚고 가면서 구부정하고 숨이 가빠한다.
거기에 조예가 사마의를 슬쩍 떠 보니 무서운 듯 벌벌 떨며 자신과 자제들의 관직 등을 모두 박탈하고 다만 목숨만 부지하게 해 달라고 감정적으로 나오며 엎드려 빈다.
그러나 고평릉의 변을 일으켰을 때, 궁의 계단을 오르는 사마의는 거침없이 2~3개의 층계를 한 번에 오르기도 하며, 자세도 전혀 구부정하지 않고 무표정하다.
그 계단을 올라 명원황후를 맞이할 때도 놀란 태후가 일어서자 아주 자연스러운 듯 그녀가 앉아있던 자리에 자신이 앉고 태후는 서 있게 한다. (명원황후의 생년은 미상이지만, 조예의 후궁이었다가 황후가 된 점을 볼 때 그녀가 조예보다 연상이었더라도 사마의보다는 한참 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마의가 태부라 하더라도 엄연히 태후에게는 아랫사람이다.)
또 사마의가 조상의 죄상을 고하며 그를 처단할 것을 명해달라고 하니, 이 상황의 본질을 이미 안 듯 명원황후가 눈시울을 붉히며 조상은 상관없지만 폐하만은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조방은 출생이 불분명한데, 왜 명원황후가 그를 감싸도록 설정했을까? 조씨 황실의 일원이라는 그녀의 충심 때문에?) 한다.
하지만 사마의는 무표정을 유지하며 사실상 대답하지 않고('영명하십니다. 태후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태후의 손에 들려 있던 조서를 낚아채듯 가져가면서 그녀를 지나쳐 가는데 돌아보지도 않는다. (물론 극중에서나 실제로나 조방을 폐위시킨 것은 사마의가 아니다. 후계자 사마사가 조방을 끌어내렸지만, 사마의의 무반응은 적어도 묵시적으로 조방의 안위를 장담해줄 생각이 없음을 시사한다. 실제로도 그랬을 것 같고.)
다시 정사를 보면, 사마의가 궁궐 아래에 병력을 배치할 것을 지시하고 조상의 진영이 장악한 문을 지나치는데, 조상 수하 장수 염세가 누각 위에서 쇠뇌를 당겨 사마의를 쏘려 했지만 손겸이 ‘상황이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른다’라며 말렸다.
염세는 3번이나 시위를 당겼지만, 손겸이 팔꿈치를 눌러 모두 막아 버렸고 결국 쏘지 못했다.
환범이 낙양을 빠져나가 조상에게 달려가니 장제가 사마의에게 ‘꾀주머니가 갔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사마의가 말하기를 ‘조상과 환범은 사이가 멀고, 환범의 지략도 조상에 못 미친다. 조상은 결단을 못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마의는 고유에게 사도와 대장군 업무를 맡겨 조상 진영을 장악토록 하고, 왕관으로 하여금 조상의 동생 조희의 군대를 접수토록 하였다.
사마의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낙수 부교(다리)에 진을 치고, 조상/조희/조훈 형제의 병사들을 모두 해산시키고 본래 작위만 남긴 채 귀가시켜야 한다는 취지로 소를 올렸다.
조상은 이 소가 올라가지 못하도록 막고 밤을 새워 버티면서 나무를 베어서 전투용 장애물(녹각)을 만들고 수천 명의 군사를 동원해 지키게 하였다.
환범은 조상에게 조방을 데리고 허창으로 가서 병력을 증강해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조상은 결단하지 못하다가 사마의의 의중을 떠보려고 허윤과 진태를 보냈다.
사마의는 조상에 대해 ‘지금은 단지 면직만으로 그칠 것’이라고 말했고 이 말을 돌아가 전하면서 진태는 ‘사마의의 소를 수용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
사마의는 추가로 조상이 신뢰하는 윤대목을 보내 직접 설득하게 하면서 낙수를 두고 맹세하며 안전을 약속했다.
환범 등의 극력 저지 시도에도 불구하고 조상은 끝내 사마의의 덫에 넘어간다.
폭행 사건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상충하는 맹세를 들은 조선 태종 이방원이 ‘이래서 맹세 따위는 믿을 수 없다’라고 한 말과 다르지 않다.
맹세라는 것은 맹세를 받은 자에게 레버리지가 없으면 맹세한 자는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는 것이고, 인간은 그런 존재이다.
인간은 진실 여부에 대해 맹세를 할 때 거짓인 내용을 진실이라고 하기도 하고, 조건의 이행 여부와 관한 맹세를 할 때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얼마든지 거짓말을 한다.
물론 조상의 입장에서 보면, 그가 위의 병권을 오래 맡아 본 조진의 장남이고 조진은 미묘할 수는 있었겠지만 사마의와 동료였으며 황족이므로 설마 쉽게 죽이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면수 관련 논쟁 등에서 알 수 있듯, 조상은 사람이나 대국을 보는 혜안이 부족했던 것 같다.
정확히 말해 이 경우, 그 모든 요소들을 사마의는 얼마든지 무시해버릴 수 있는 비정한 사람이라는 점을.
조상은 순진하게 ‘사마의는 내 권세만 빼앗으려는 것이다. 내가 후로 돌아가 집에서 잘 살기만 해도 족하다. 부잣집 남자로 살면 되지 않나?’라고 했지만 환범은 통곡하면서 ‘그렇게 하다가는 우리 집안까지 멸족된다!’라고 한다.
조상은 소를 황제에게 올리도록 하였고, 곧 조상 형제들과 하안, 이승, 환범 등 조상의 일파들도 모두 체포된다.
이후 한동안 타이밍을 보던 사마의는 결국 조상을 주살한다.
관련자들은 물론이고 그 삼족을 멸하였다.
장제는 조진의 제사를 지내줄 사람이 필요하다며 말렸지만 사마의는 묵살했다. (장제가 조상에게 신변의 안전을 보장했으므로, 장제는 결국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병사한다)
그런데 끝까지 조상의 항복을 말린 노지와 양종이라는 자들은 살려주었는데, 사마의가 말하기를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한 자들을 권장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
5. 사마의의 짧은 집권기(249-251)와 왕릉의 난
조방이 사마의를 승상으로 임명하고 구석을 내렸으나 사마의는 모두 사양했다.
사마의는 칭병하며 조정 회의에 잘 나오지 않았지만, 황제가 그의 집에 찾아가 자문을 구할 정도에 이르렀다.
70세에 이른 사마의는 이렇게 화려하게 다시 권력의 중심으로 돌아오면서 명실상부 위의 권신으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사마의는 생의 마지막까지도 계속 싸워야 했다.
251년에 수춘삼반 중 첫 번째 사건인 왕릉의 난이 일어났던 것이다.
연주자사 영호우와 태위 왕릉이 초왕 조표를 세우겠다고 꾸민 일이었다.
왕릉은 오의 핑계를 대며 병사를 내어 달라고 청했지만 사마의는 낌새를 눈치채고 불허했다.
본격적으로 거병하기 전에 영호우가 죽어버렸고, 사마의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왕릉을 쳤다.
결국 왕릉은 스스로 몸을 묶고 투항하며 말하기를 ‘내게 죄가 있다면 편지 한 장만 보내 부르면 될 것을, 어찌 직접 오셨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사마의가 답하기를 ‘그대는 편지 한 장으로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왕릉은 172년생(사건 당시(251년) 79세)으로, 사마의보다 약간 연상이다.
다시 말해 이 사건은 원로가 주동하여 일으킨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거병하지 않은 상황에서 사마의와 왕릉이 서로를 경계하고 있는데, 만약 사마의가 새삼스럽게 갑자기 왕릉을 불러들인다면 왕릉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사마의의 입장에서는 급습을 하고 군을 동원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또 사마의는 이미 출병하면서 왕릉을 사면한다고 하였는데(249년 12월에 사마의 정권에서 왕릉을 태위로 임명했다. 태위 임명 조치도 왕릉을 경계하면서 안심시키려는 의도로 생각된다. 다만 조위에서 태위는 사실상 명예직이었다.), 이는 조상과 비슷하게 왕릉을 안심시키려는 조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마의는 왕릉을 낙양으로 돌려보냈지만 왕릉은 중간에 독약을 먹고 죽었다.
사마의의 지시로 이 사건에 대한 수사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조표를 비롯한 나머지 연관자들도 삼족을 멸하고 고사에 따라 왕릉과 영호우의 묘를 파헤쳐 관을 자르고 그 시신들을 3일간 저자에 보이고 인수와 조복을 불태우고 시신을 그대로 흙에 묻었다.
조씨 친족들은 모두 업으로 옮겨져 감시를 받게 되었다.
왕릉의 난을 진압한 그해에 사마의는 향년 73세로 병사한다.
그 뒤는 장남 사마사(司馬師, 208-255)가 승계하고, 사마씨 가문은 본격적으로 찬탈을 향한 가도에 들어선다.
6. 사마의라는 인간
사마의는 공손연의 난, 고평릉의 변, 왕릉의 난 등에서 여러 번 학살을 했다.
그의 권력 집중을 두고 후에 동진 건국을 주도하며 사마씨 황실을 복원한 재상 왕도는 ‘이런 방식이라면 진이 오래 가기 어렵다.’라고 하였다.
사마의의 능력, 자질, 정치적 조심성은 탁월했어도 후반에는 의심, 잔혹성, 권력욕이 강해졌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것이다.
본래 나는 후환을 남기는 일은 가능한 한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사마의의 경우는 약간 다르다고 생각된다.
물론 그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일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다만 사마의의 잔혹함은 본질적이라기 보다 반사적인 것에 가깝다고 본다.
대개 사마의가 학살을 할 때는 윤리적 고려를 제외하고 보면 유력한 정치적 선택지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공손연의 경우, 난을 일으키며 스스로 칭왕할 정도면 요동이라는 지역 기반은 애초에 삼국 정립 이후에도 위와 상당히 독립적으로 존재했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다른 곳과 달리 빌미가 생기면 일반적으로 조정의 통제를 받는 다른 지역들보다 난을 일으킬 가능성이 상당함을 의미했다.
물론 조정이 요동의 민심을 잘 안무하면 좋겠지만 이 당시는 아직 삼국이 분립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중원의 백성들도 모두 징병과 병농일치(둔전제) 등의 통치가 상시화된 체제에 살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마의의 학살은 공포를 통한 사전 예방과 비슷한 성질을 가진다.
조상의 난의 경우는 결국 사마의가 실질적으로는 정변을 일으킨 입장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49년은 위가 건국된 지 약 30년 정도밖에는 되지 않은 때였다.
그 전의 한이 몇백 년을 간 것(장기간 유지를 통한 정통성 차원의 문제)과 아직 위가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중원을 장악하고 고도의 관료제와 방대한 자원을 보유했다고 하더라도 내구성에는 한계가 있었다고 본다.
그러한 상황에서 기존의 정권을 뒤엎고 집권한 사마의의 입장에서는 무언가 확실하게 쐐기를 박는 것이 필요했다.
칼을 뽑지 않았다면 모를까, 일단 칼을 뽑았다면 최대한 화근의 싹까지 밟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사마의는 당시 이미 70세였기 때문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사마사와 사마소는 사마의 사후 결과적으로는 정권을 지속해 역성혁명에까지 성공했지만, 사마의가 막 정변으로 집권했을 때는 정말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후일을 위해 확실하게 안배를 해야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왕릉과 관련자들에게 그토록 가혹했던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평시의 아량은 평화를 가져오지만, 비상시의 아량은 죽음(특히 본인의)과 혼란을 가져오는 법이다.
사마의의 경우는 난세에 실제로 끝까지 살아남아 승리하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를 무섭도록 보여준다.
그는 인정(人情)으로 움직이는 인간이 아니었고, 감정조차 모두 계산해 가며 사용했으며 남의 인격을 이용했다.
전장을 누비며 지켜본 수많은 죽음들을 생각하면, 아마 그가 범한 학살들은 그렇게 다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마의가 후일 결국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서진이 팔왕의 난, 영가의 난으로 사마염(서진 세조 무제) 사후 빠르게 몰락하고 멸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히 계속되는 성세는 없는 법이고, 사마의가 죽을 때까지도 촉한과 오는 아직 건재했다.
사마소의 집권기에 이르러서야 촉한을 멸망시켰고, 사마염이 제위에 오른 후에야 오를 멸망시켰다.
사마의가 죽은 시점은 불과 집권 2년 차 정도였다.
그러니 사마의에게 제일 중요한 건 우선 사마씨 정권을 공고화하는 일이었다.
그 뒤의 문제는 후손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통일 왕조조차 아니었던 상황에서 사마의가 그 모든 것을 예상하고 대처할 수는 없다.
이러한 제약조건들을 고려하면 사마의의 자식 농사와 미래 안배는 사실 대성공이었다.
사마사와 사마소가 계속 정권을 이어갔고, 결국 최종적으로 손자인 사마염이 정권을 이어받고 최종적으로 삼국을 통일했으며 나아가 동진까지 사마씨 황실이 계속 이어졌으니까.
이는 이전의 성공적인 권신들이었던 곽광, 조조나 이후의 권신들인 환온, 유유(유송 고조 무제), 소도성(남제 태조 고제) 등과는 분명 다르며 더 우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