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사마의(司馬懿, 179-251, 서진 고조 선제 (추존))는 가장 좋아하는 역사 인물 중 하나였다.
아마 다른 무엇보다 ‘최후의 승자’였다는 점이 가장 끌렸던 것 같다.
지금도 특히 중국 삼국시대의 인물 중에서 사마의를 제일 좋아한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느끼는 것인데, 어느 곳에서나 사람과 인과를 잘 아는 사람은 최소한 생존에 성공한다.
계책이나 병법이라는 것의 성패도 사실 궁극적으로는 사람이 어떻게 사고·행위하고 인과가 어떻게 귀결될 것인지를 아는 혜안이 전제되는 것 같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마의는 거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다.
사마의의 열전은 정사 <삼국지>에는 없다.
그 이유는 사마의가 삼국통일을 이룬 서진(西晉)의 시조가 되는 셈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사마의는 황제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그의 전기는 열전이 아닌 본기로서 <진서> 선제기가 1차 사료가 된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사마의의 73년 인생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삼국지>나 <자치통감> 등도 교차 검토하는 등의 노력이 있어야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힌다.
이는 특히 주로 군사령관으로서 경력을 쌓은 사마의의 군공이 다소 과장된 묘사가 많기 때문이다.
본래 <진서>는 당 태종이 방현령 등에게 명하여 편찬토록 한 것인데, 그들이 편찬할 때 기초한 사료들은 서진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므로 자국의 시조에 대한 미화와 과장이 컸다.
이 글에서는 사마의의 긴 일대기를 모두 다루기보다, 내가 인상 깊게 본 몇 개의 장면들을 중심으로 나름의 해석을 제시하고자 한다.
사마의가 죽기 2년 전에 고평릉의 변으로 정권을 탈취하고 사마씨 정권을 수립하기에 이르기까지, 사서에서는 그가 일반적인 인재나 위나라의 중신이 아니었음이 여러 번 드러난다.
사마의는 명문 사마씨 가문 출신으로서, 그의 아버지 사마방은 ‘사마팔달’이라 하여 사마의를 포함해 재능이 뛰어나다고 평가받은 8인의 아들들을 두었다.
일찍이 196년에 조조(조위 태조 무제 (추존))가 협천자를 시작한 후에 사공으로 있을 때, 사마의의 소문을 듣고 그를 등용하려고 했다.
아직 20대 초반에 불과했던 이 약관의 청년은 일찍부터 범상치 않았다.
사마의는 다른 많은 인재들이 그랬듯 후한의 국운이 쇠했음을 알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씨에게 몸을 굽혀 섬기고 싶지 않아’ 칭병하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조조는 사마의를 의심해 몰래 사람을 보내 밤에 살펴보게 하였는데 사마의는 끝까지 누운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조조는 208년에 승상으로 임명된 후에 다시 사마의를 불러들이면서 ‘만약 또 응하지 않으면 바로 잡아들이겠다.’라고 엄포를 놓기에 이른다.
이에 사마의는 별수 없이 본격적으로 출사하게 되었다.
사마의의 초기 경력은 다름 아닌 조조의 후계자가 되는 조비(조위 세조 문제)의 측근이 된 데에서부터 시작된다.
조비는 후일 사마의를 고명대신으로 삼을 만큼 그를 신임했다.
조조가 한중으로 장로를 토벌하러 갔을 때, 사마의가 말하기를 ‘유비는 속임수와 무력으로 유장을 사로잡았으니, 촉 사람들은 아직 그에게 완전히 귀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멀리 강릉을 다투고 있으니, 지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지금 한중에서 더 나아가 익주를 압박하면 유비의 세력이 와해될 것입니다. 성인(聖人)도 때를 거스를 수는 없으나, 때를 놓치지는 않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조조가 반응하기를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구나! 이미 농우(한중 방면의 전초 거점)를 얻고도 또 촉을 얻고 싶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결국 사마의의 건의는 수용되지 않았다.
이 대목은 매우 유의미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조조와 사마의의 차이를 어느 정도 보여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조는 간웅, 효웅으로 불리지만 꽤나 인간적인 면모도 많이 있었던 것 같다.
문학인으로서 그는 아들 조비, 조식과 더불어 건안문학을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대업에 있어서는 사마의와 같이 인정사정없이 기회가 왔을 때 확실히 끝까지 밀어붙여야지, 그러지 않는다면 단지 천하를 얻지 못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계속해서 더 많은 백성과 병사의 피를 볼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조조의 이러한 면모가 그가 천하통일을 이루지 못한 하나의 원인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사마의는 또한 조조가 시행한 둔전제를 백성들을 변경으로 이주시켜 개간을 장려하는 민둔만이 아니라 군사들로 하여금 복무와 동시에 농사도 병행하도록 하는 군둔으로 확장했다.
조비 즉위 후 손권(동오 태조 대제)이 서진했는데, 양양이 길에 있었으므로 표적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위 조정에서는 그곳을 지키던 조인을 불러들여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사마의가 아뢰기를 ‘손권은 막 관우를 격파했으니 지금은 관계를 다지려는 때로 반드시 해를 끼치지 못합니다. 양양은 수륙의 요충지로서 적을 막는 중요한 곳이니 버릴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조비가 수용하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조인이 철수했으나 손권은 침공하지 않았으므로 조비가 후회했다.
조비가 대규모로 수군을 일으켜 오를 칠 때 사마의에게 후방을 맡기면서 그를 소하에 비견했다.
조비 사후 사마의는 조비의 유명으로 조진, 진군 등과 함께 차기 황제인 조예(조위 열조 명제)를 보좌하게 된다.
조예 즉위 후 사마의는 무양후로 봉해졌고, 조예 재위 2년 만에 맹달의 난을 토벌하는 공을 세운다.
220년에 촉한의 장수 맹달이 관우를 돕지 않아 그가 죽게 된 일로 유비(촉한 열조 소열제)의 진노를 산 것이 두려워 위로 투항했었다.
이때 위 조정은 그를 후대했으나 사마의는 맹달을 믿을 수 없다고 여겨 이러한 취지로 상주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맹달을 후로 봉하면서 신성태수로 임명하였다.
조예 즉위 후 입지가 점점 좁아지면서 입장이 미묘하게 되니, 맹달은 오, 촉과 접촉하면서 앞날을 도모하였다.
촉한의 승상 제갈량이 접촉해 촉군이 북벌에 나서면 맹달이 내응하도록 하고자 했다.
하지만 동시에 제갈량은 맹달이 배신을 반복했으므로 믿을 수 없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갈량은 곽모를 위에 거짓 투항하도록 하여 맹달과 원한이 있던 위흥태수 신의에게 맹달과 촉한 간 모의를 들키도록 하였다.
이에 급해진 맹달은 군사를 일으키려 했는데, 사마의가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장군은 예전에 유비를 버리고 우리나라에 몸을 의탁하였고, 나라는 장군에게 변경을 맡기고 촉을 도모하는 일을 위임하였소. 그러니 촉의 사람들은 어리석건 지혜롭건 그대에게 이를 갈고 있을 것이오. 제갈량은 그대를 반드시 깨뜨리고자 하나 길이 없을 뿐이오. 곽모가 말한 일은 작은 일이 아닌데, 제갈량이 어찌 가볍게 이를 드러내도록 하겠소? 이는 쉽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요컨대 제갈량이 일부러 흘린 계책에 충동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에 맹달은 기뻐하면서도 동시에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동안에 사마의는 재빨리 군을 움직여 맹달을 토벌하기 위해 나섰다.
제장들이 말하기를 ‘맹달은 촉, 오 두 적과 함께 모의하고 있으니, 형세를 지켜본 뒤 움직여야 합니다.’ 라고 하니, 사마의가 말하기를 ‘맹달은 신의가 없는 자이니 지금 사이에서 의심하고 있다. 결정되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사마의가 이끄는 위군은 속행하여 8일 만에 신성군 내의 상용성 아래에 도달했다.
촉과 오에서는 각각 지원군을 보냈으나 사마의의 행동이 더 빨랐다.
그러나 맹달의 인식은 안이하기 그지없어서 이전에 제갈량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기를 ‘완성에서 낙양까지 800리이고, 다시 완성에서 내가 있는 상용까지는 1,200리입니다. 내가 일을 일으키면 위 조정에 보고가 갈 것이고 한 달이면 성의 방비가 충분할 것인데, 내가 있는 곳은 험하고 깊습니다. 그러니 사마의는 틀림없이 스스로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른 장수들이 온다면 나는 걱정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마의가 직접 온 데다 약 일주일 만에 상용에 도달하니 맹달은 크게 당황한다.
상용성은 삼면이 물로 막혀 있었고 맹달은 성에 목책을 두르기까지 했으나 사마의는 최종적으로 이러한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성의 바로 아래에 이르렀다.
결국 더 버티지 못하고 맹달의 조카 등현 등이 성문을 열고 항복했고, 사마의는 맹달을 참수해 그 머리를 도성에 보냈다.
한편 앞서 제갈량이 곽모로 하여금 맹달과의 모의를 들키게 한 신의도 문제가 있었다.
그는 자기 관할 지역인 위흥에서 권세를 휘둘렀으며 지휘 계통을 무시하고 권한을 남용했다.
맹달 사후에 신의는 의심을 품게 되었는데, 사마의는 맹달 토벌 후 이를 축하하기 위해 여러 군현의 수령들이 축하하러 오는 맥락을 이용해 신의를 권유해 오도록 하여 그가 도착하자마자 바로 체포하여 낙양으로 보냈다.
후일에도 계속 나타나는 특징이지만, 사마의는 상대방이 방심하게 한 후 재빠르게 쳐서 깨뜨리는 전술을 즐겨 썼는데 맹달과 신의를 제압하는 과정은 이를 잘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한편 사마의는 나름의 융통성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경이 불안정했으므로 새로 귀순한 이들 중 호적이 없는 자가 많아서 조정에서는 실제 인구를 조사하고자 했다.
이에 관하여 조예가 사마의에게 물으니 그가 답하기를 ‘도적들은 촘촘한 그물로 아래를 얽어매었기에 아래가 그들을 버린 것입니다. 널리 큰 법도를 편다면, 저절로 편안히 즐길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민심을 얻는 데에는 관대한 통치를 펴되 신상필벌을 명확히 하는 것만 한 것이 없다.
또 조예가 묻기를 ‘오와 촉 중 어느 쪽을 먼저 토벌해야 하겠는가?’ 하니 사마의가 답하기를 ‘오는 우리가 수전에 익숙하지 않은 점에 의지하여 동관에 흩어져 있습니다. 적을 공격할 때는 반드시 그 목구멍을 틀어막고, 그 심장을 치는 것이 옳습니다. 하구와 동관이 바로 오의 심장과 목구멍이니, 육군을 환성으로 보내 손권을 동쪽으로 유인하면서 수군으로 하구를 공격해 허를 찔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전략은 예리하긴 했지만 사마의 생전에는 시행되지 못했고, 280년에 삼국통일을 위해 사마의의 손자인 사마염(서진 세조 무제)이 오를 정벌할 때 실행된다.
231년의 4차 북벌(기산 전투), 234년의 5차 북벌(오장원 전투)에서 사마의의 활약상은 <진서>에서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
제갈량의 북벌이 다시 시작되자 조예는 사마의로 하여금 장합, 곽회 등과 더불어 그를 막도록 하였다.
이 전투에서 위와 촉 양측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는데, 촉군은 노성 일대에 진을 치고 양쪽 고지를 점거하고 수로를 끊는 등의 포위 태세를 취했고 위군은 공격을 시도했으나 지형적 불리와 촉의 쇠뇌 등에 크게 막혔다.
양측이 결전을 피한 채 대치하다가 이엄이 수송에 실패한 뒤 제갈량을 모함해 성도로 귀환하도록 유도하면서 촉군이 야간 철수를 하게 된다.
이때 장합이 깊숙이 쫓아가다가 촉군의 화살에 맞고 전사했다.
선제기에서는 사마의가 제갈량의 포위를 깨부수고 촉군을 추격해 수만을 참하였다고 하고 있으나 그렇게까지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234년의 5차 북벌 때 이르러 제갈량과 사마의는 오장원에서 대치한다.
사마의는 일찍이 ‘제갈량이 만약 용감하게 나선다면 무공 방면으로 나와 산을 끼고 동진하겠으나, 만약 서진하여 오장원으로 올라간다면 제군은 걱정할 것 없다.’라고 하였다.
제갈량은 결국 대치 중에 사망했는데, 그 전에 워낙 급하다 보니 사마의에게 결전을 도발했었다.
그러나 위 조정은 ‘촉군은 먼 곳에서 온 군대이니 서둘러 전투에 돌입하면 우리에게 이롭긴 하지만, 무겁게 지키고 변화를 보라.’라고 사마의에게 명했다.
사마의는 처음에는 움직이지 않았는데, 제갈량이 사마의에게 여인들의 머리 장식과 치마를 보내 조롱하자 사마의가 격노하여 조정에 출전을 청했다.
조예는 불허했고 신비를 보내 사마의를 막도록 했다.
제갈량이 재도전하자 사마의가 출병하려 했으나 신비는 군문에 서서 앞길을 막았고 사마의는 결국 멈추었다.
이 소식이 촉군에 전해지니 강유가 말하기를 ‘신비가 위의 명까지 들어 막아섰으니, 저들은 더 이상 나오지 못합니다.’ 하였고 제갈량이 답하기를 ‘사마의는 본래 싸울 뜻이 없고, 그저 군에 위엄을 보이려고 계속 상부에 결전을 청했던 것이다. 장수가 군대에 있을 때는 임금의 명을 모두 따를 수만은 없다. 정말로 우리를 제압할 수 있었다면 어찌 천 리 밖에서 전투를 청하는 일이 있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부분은 약간 더 유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위가 이미 중원을 차지했고 또 촉, 오보다 국력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촉과 오 어느 일방으로서는 위를 혼자 상대하기 벅찼으므로 양자가 힘을 합한 것이다.
위의 입장에서는 촉의 험준한 지세와 제갈량의 존재를 감안하면 섣불리 촉을 칠 수도 없었다.
더구나 조비 때에는 이미 촉보다는 사정이 낫겠지 싶어 오를 쳤으나 대참패로 끝났다.
가후나 사마의의 말대로 촉과 오는 쉽게 깨뜨릴 수 없고 오히려 내실을 다진 후에 후일을 기약해야 하는 장기전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사마의는 신중한 성격에 대국을 보는 스타일이었는데 이는 전투에서도 수비전/장기전을 즐겨 쓰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더구나 사마의는 제갈량이 동진하지 않고 서진하여 오장원에 이른 것을 두고 걱정할 것 없다 하였다.
제갈량이 오장원에 나아갔다는 것이 이미 촉군이 자신감이 많이 하락한 것이 아닌가 했거나 최소한 우리가 더 유리할 수 있겠다는 예상은 어렴풋이 했을 것 같다.
이를 놓고 볼 때, 오장원에서 제갈량이 잔 수를 부려 자극한 것에 사마의가 덜커덕 넘어가서는 감정적으로 흥분해 출전하려 했다는 것은 사마의의 평소 성격에 비추어 위화감이 든다.
사마의와 조예, 위 조정의 입장은 모두 일관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위의 대촉/대오 전략/전술은 큰 틀에서 수비전/지구전이었다.
결과적으로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수비 위주냐 공격 위주냐는 대국적 차원에서 보면 무의미하다.
오장원 전투 때 사마의는 대군의 총사령관이었기 때문에 거시적/전략적 방향은 천자와 조정이 세우더라도 그 아래 전투에서의 전략/전술 차원은 그의 폭넓은 재량이 있었다.
그러니 제갈량의 말대로, 사실 도전장에 응하려면 못 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장기전이 많다 보면 군중의 장수 중에서도 나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고, 조정에서는 사마의가 내빼기만 한다고 비난하고 참소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물론 당장 군령이 서지 않거나 천자가 사마의를 불신하거나 하지는 않더라도, 일단 군의 사기와 사마의의 입지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하면 ‘쇼’가 필요하기는 했다.
그래서 사마의가 결전을 청한 행위에 대해서는 제갈량의 생각이 맞았을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본다.
‘이것은 단지 나의 의지가 아니라 조정 무엇보다 천자의 뜻이고, 또 나는 결전 여부에 관하여 조정에 보고를 올린 후 행동했다.’라는 정치적 명분과 변론이 설 수 있었다.
사마의가 출정한다고 하면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천자도 감안하고 신비를 보낸 듯하고, 사마의 입장에서도 ‘못내 뒤돌아서는’ 모습을 보이도록 해줄 사람이 필요했을 것 같다.
제갈량 사후에 촉군이 영채를 불태우고 도주하니 백성들이 이를 고하여 사마의가 출병해 추격했다.
양의는 깃발을 다시 세우고 북을 울리며 마치 사마의와 맞서려는 듯 행동했는데, 사마의는 궁지에 몰린 적을 억지로 공격하지 않고 양의가 진을 갖추고 철수하도록 두었다.
며칠 뒤 촉군의 진영이 있던 자리를 보니 제갈량이 남긴 도서와 군량이 매우 많았다.
사마의는 제갈량이 죽었음을 확신하고 ‘천하의 기재였구나.’라고 하였다.
신비가 아직 확신할 수 없다 하니 사마의가 답하기를 ‘군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군서, 계책, 병력, 군량을 모두 버리고 갔다. 어찌 오장원을 버린 채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빨리 추격해야 한다.’라 하였다.
그리고 나아가서 제갈량이 죽었음을 최종확인했다.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노래가 돌았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달아나게 했다.’
2010년 드라마 <삼국>에서는 사마의가 이를 듣고 침대에서 구르며 수치스러워 한다.
그런데 선제기에서는 사마의가 그 노래를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살아있는 자는 계산할 수 있지만, 죽은 자는 계산하기 어렵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백성들의 노래에는 기본적으로 제갈량 측의 감정과 자존심 같은 것이 섞여 있다.
그 노래는 제갈량의 위엄을 치켜세우고 사마의를 격하시키는 말이니까.
하지만 사마의의 응수를 보면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에서 사고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어디까지나 제갈량이라는 적을 맞는 군사령관의 입장에서 제일 타당한 판단과 선택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무서워서 도망가 놓고 사후에 이미지 관리를 하려는 것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사마의는 본래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기보다는 감정을 이용하는 사람이었다.
사실 사마의가 진심 그대로 행동한 것이 몇 번이나 될까 싶기도 하다.
사마의는 냉혹한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후에 공손연의 난을 진압한 후 요동인들을 학살하고, 또 고평릉의 변으로 집권한 뒤 조상을 비롯한 그 일파와 일족들을 멸문했다.
사마의가 학살에 완전히 무감했다기 보다는 '일단 칼을 뽑은 이상, 화근은 싹을 아예 밟아야 한다.'라는 계산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사마의가 제갈량을 인정한 말(‘기재’ 발언)을 보면, 딱히 열등감을 느꼈던 것 같지도 않다.
이전에 제갈량의 사신이 왔을 때 사마의가 묻기를 ‘제갈 공은 기거가 어떠한가? 밥은 몇 되나 드시는가?’ 하니 사신이 답하기를 ‘하루에 3~4되쯤 드십니다.’
또 정사를 물으니 사신이 ‘20가지 이상의 벌칙이 있는 일은 반드시 스스로 살펴보십니다.’라고 하였다.
사마의가 이 말을 듣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공명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 예측대로 되었다.
제갈량 사후에 사마의가 가장 크게 전공을 세운 것은 앞서 언급한 238년에 발생한 공손연의 난을 제압한 것이다.
공손씨 가문은 이전부터 위의 번속 세력으로서 요동에 웅거해 왔는데, 공손연은 숙부 공손강과 갈등한 끝에 공손강을 가두어 버렸다.
공손연은 오와 위 사이를 오가다 결국 위를 배반하고 스스로 연왕을 칭했다.
조예가 사마의를 불러 공손연 측이 어떻게 나올 것 같은지를 묻자 사마의가 답하기를 ‘성을 버리고 미리 달아나는 것이 상책입니다. 요수를 의지해 대군을 막는 것이 중책입니다. 앉아서 양평을 지키는 것은 사로잡히는 길이니 하책입니다.’
조예가 다시 묻기를 ‘그렇다면 그들의 계책은 어디로 귀결되겠는가?’ 하니 사마의가 답하기를 ‘그들에게는 깊이 형세를 판단하고 미리 버릴 것을 버릴만한 식견이 없습니다. 우리 군이 멀리서 와 있으니 그들은 우리가 오래 버티지 못한다고 보고, 반드시 먼저 요수를 막고 그 다음에 성을 지킬 것입니다. 이는 중책과 하책입니다.’
또 사마의는 1년 남짓이면 반란을 토벌하는데 충분하다고 하였다.
사마의는 우금 등과 더불어 보병과 기병을 합쳐 4만을 거느리고 낙양에서 출정해 요수에 이르렀는데, 공손연이 보병과 기병 수만을 보내 요수 나루를 막는 동시에 높은 성채를 지켜 남북으로 길게 사마의의 군대를 막았다.
사마의는 병력을 크게 벌려 깃발을 많이 세우고 남쪽으로 이동했는데, 공손연의 군대가 정예병을 모두 끌고 나와 그쪽으로 갔다.
그 틈을 타서 사마의는 몰래 배를 띄워 북쪽으로 건너가 공손연의 진영에 가까이 다가가고 그 배를 가라앉히고 다리를 불태운 후 요수 강가를 따라 긴 포위를 설치하고 적의 본진을 둔 채 공손연 본인이 있는 양평을 향해 나아갔다.
이를 두고 장수들이 말하기를 ‘적을 치지 않고 포위부터 두르는 것은 무리에게 위엄을 보이는 도리가 아닙니다.’라고 하니 사마의가 답하기를 ‘적이 진을 견고히 하고 높은 보루를 쌓은 건 우리를 지치게 하려는 속셈이다. 우리가 공격하면 그 계략에 빠지는 것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적이 비록 높은 성을 쌓고 있어도 반드시 나와 싸울 수밖에 없는 곳을 치면 된다고 하였다. 적의 대군이 여기 모여 있으니 그 수뇌가 있는 곳은 텅 비었을 것이다. 내가 곧장 양평으로 나아가면 그들은 두려워하여 스스로 싸우려 들 것이니 그렇게 되면 격파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과연 사마의의 말대로 요수 강가를 지키던 방어군이 사마의가 뒤로 나아가자 싸우려 들었고 이에 사마의가 그들을 쳐서 승리했다.
요동군은 양평으로 물러나 성을 지켰고 사마의는 진군하여 양평을 포위했다.
위군이 출정했을 때 공손연은 손권에게 구원을 요청했는데, 손권이 답장하기를 ‘사마의는 용병에 능하니 그대를 깊이 근심한다.’라고 하면서 군대를 출동시켰으나 원조하는 척만 했다.
대치 상태에서 장마철이 되자 진을 옮기자는 말이 나왔으나 사마의는 이를 엄금하고 하관들이 명을 어기고 진영을 옮길 준비를 하자 그들을 참수했다.
요동군이 물에 의지하여 뗄나무를 베고 방목하는 일을 평소대로 하니 장수들이 그들을 사로잡자고 주장했지만 사마의는 불허했다.
진규가 말하기를 ‘옛날 상용을 칠 때는 밤낮을 쉬지 않고 진군해 열흘 남짓 만에 성을 함락시키고 맹달을 참수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먼 길을 와서 도리어 느긋하게 계시니 어찌된 일입니까?’ 하였다.
그러자 사마의가 말하기를 ‘맹달의 병력은 적었지만 곡식은 1년 치였다. 우리 군은 맹달의 4배였지만 양식은 한 달 치도 되지 못했다. 그러니 어찌 서두르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 지금은 반대로 적이 많고 우리가 적으며, 적은 굶주리고 우리는 배부르다. 지금 비가 많이 내려 우리 군에 불리한데도 저들이 아직 나오지 않으니 재촉해 공격한다 한들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출정할 때부터 내가 염려한 것은 적들이 공격해올까가 아니라 적들이 도망칠까였다. 지금 포위 상태에서 양식이 거의 바닥났으니, 만약 뗄나무 베러 온 자들을 습격한다면 되레 그들을 도망치게 하는 것이다. 병법이란 속임수요, 처지에 따라 변화를 잘 타는 것이 귀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능력이 없는 척하며 그들을 안심시키는 것이다. 작은 이익을 얻기 위해 그들을 놀라게 함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참고) <진서> 선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