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평전 6. 진군 陳羣

by 남재준

시대에 가장 필요한 인물이 누구인가는 그 시대의 맥락과 과제 등에 따라 결정된다.

보통 난세에는 제도 설계자보다는 군사 영웅이나 책략가 등이 선호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 역사를 보면 ‘시대의 수요’는 조금 더 미묘했던 것 같다.


중국 삼국시대에는 군웅(軍雄)이나 책사(策士)만이 아니라 관료들도 상당히 역할을 했다.


물론 정확하게 말하면 책사와 관료는 겸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예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지리멸렬하던 유비를 일으키고 손권과 손을 잡도록 하여 삼국정립에 큰 영향을 끼치면서 동시에 촉한의 제반 행정을 책임졌던 제갈량이다.


이 글에서 다루는 진군(陳羣, ? ~ 236)은 조위(曹魏)의 재상이었는데, 책략가로서의 면모보다 행정가로서의 면모가 돋보인다.


진군은 구품중정제(구품관인법)을 입안한 사람이며, 조조-조비-조예 3대에 걸쳐 조씨 왕조를 섬기면서 여러 유의미한 정책과 간언을 냈다.


그는 맨 처음에 유비를 섬겼다.

이때는 유비가 예주에 있었는데, 도겸이 병사한 후 서주 사람들이 유비에게 오도록 청했다.


이에 유비가 서주로 가려고 하였으나 진군이 말하기를 ‘원술이 아직 강한데 지금 동쪽으로 가면 반드시 그와 다투게 됩니다. 여포가 장군이 떠난 뒤에 서주를 습격한다면 장군께서 비록 서주를 얻는다 해도 일은 반드시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하지만 유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동쪽으로 가서 원술과 싸웠고, 진군의 말대로 그 틈을 타 여포가 하비를 급습하고 병력을 보내 원술을 지원하여 유비의 군대를 크게 격파했다.


유비는 진군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진군은 처음에 천거되어 관직에 임용되었지만 응하지 않았다가 아버지 진기를 따라 서주로 피난을 갔다.

진군은 진식의 손자였는데 진식은 두 아들 진기, 진심과 함께 삼군자라 불리며 유명했다.

진기와 진심의 아들이 서로 자신의 아버지가 더 뛰어나다 다투다 할아버지에게 물으니 진식이 답하기를 ‘진기는 형이 되기 어렵고, 진심은 아우가 되기 어렵다.’라고 하였는데 이로부터 난형난제(難兄難弟)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여포가 패배한 후에 비로소 진군은 조조를 섬기게 되었다.

조조는 그를 발탁하여 사공부(조조 본인이 사공이었다) 속관으로 두었다.


진군은 사람을 꿰뚫어 보는 역량이 뛰어났다.


어떤 사람이 왕모와 주규라는 사람들을 천거하여 조조가 그들을 불렀지만 진군은 이를 반려하며 ‘두 사람은 덕이 더럽고 종말에는 반드시 패망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조조는 듣지 않았다.


후에 왕모와 주규가 죄를 지어 처형되니 조조가 진군에게 사과했다.


반대로 진군이 천거한 진교와 대건은 명신이 되었는데 특히 대건은 오나라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조비는 세자였을 때부터 진군을 공경하고 친구의 예로 대했는데, 즉위 후 진군을 창무정후로 봉하고 상서로 옮겼다.


이때 진군은 구품관인법을 입안했으며, 이후 조비는 다시 진군을 시중, 상서령, 진군대장군 등에 임명하여 중용했다.


조비 사후 진군은 조진, 사마의 등과 함께 고명대신으로서 어린 새 황제 조예를 보좌했다.


어느 날 조진이 여러 방면에서 촉을 공격하고자 사곡으로 들어가기를 청했는데 진군은 다음과 같이 아뢰며 신중론을 폈다.

‘태조(조조)께서 예전에 양평에서 장로를 공격할 때 많은 콩과 보리를 거두어 군량에 보탰는데도 장로가 항복하기 전에 이미 식량이 부족해졌습니다. 지금은 식량 사정이 좋지 않은데다 사곡은 험준하여 진퇴가 어렵습니다. 수송로는 반드시 약탈을 당할 것이고, 주요 지점에 병력을 많이 남겨두면 전투 병력이 줄어듭니다. 이러한 점을 깊이 숙고해야 합니다.’


이에 조예가 진군의 의견을 수용했다.


이후에 조진이 다시 자오도를 치자고 했는데 진군은 또다시 그 불편함과 경비(經費)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아뢰었다.


조예는 이 의견을 조진에게 내려 참조토록 하였고 조진은 출정을 했다.


하지만 장마가 장기간 이어졌고 진군이 다시 철군의 명을 내리는 것이 좋다고 아뢰니 조예가 이를 수용했다.


진군은 전체적인 판세와 구체적인 인과 등을 매우 세밀하게 따지고 수지타산을 잘한 듯하다.


이는 경세가에게는 필수적인 자질이다.


진군의 말년은 근심으로 채워져 있었다.

진군은 조예가 사망(239)하기 3년 전에 사망했는데, 말년의 조예는 궁궐을 크게 짓는 등 사치에 빠졌다.

이에 진군은 원로대신이자 고명대신으로서 지속적으로 간언을 올렸다.


조예의 황녀가 아기 때 죽었는데 매우 슬퍼하며 미성년자인 그에게 성인의 예로 장례를 치르고 시호를 내리며 황제가 친히 능을 보고 장례 행렬을 직접 인도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진군은 이러한 장례 절차의 과도함을 지적하며 조정 대신들이 장례를 치르도록 하고 황제가 장례 행렬을 인도하지 말기를 청하였다.


또 조예는 도참설을 의식한 것인지 길흉화복에 따라 거처를 옮기고자 하였다.


이에 진군은 길흉화복은 사람에게 달려 있고 흉사가 있는 것은 다만 천명에 따른 것일 뿐이니, 구태여 온 궁중이 들판에 나가 머무르면서 농사와 의례를 방해하지 않아야 한다고 아뢰었다.


또한 황제가 그러한 행동을 하면 촉과 오가 위를 크게 쇠했다고 여길 것이고 비용도 매우 클 것이며, 선비는 집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도를 지키고 천명에 따라야 편안해지는 것인데 하물며 천자의 움직임은 조용하면 천하가 편안하게 움직이면 천하가 어지러우니 가볍게 행동하셔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조예는 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예가 새 궁궐을 건설하고 기존의 궁궐을 수리하도록 하니 백성들이 농사철을 놓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진군은 또다시 상소를 올려 우임금은 전성기를 이었음에도 검소하게 생활하였는데 하물며 지금은 큰 전란기여서 백성이 적고 변방의 장병들이 고단하니 내실을 다져야 한다고 아뢰었다.


또 급한 일을 제쳐두고 궁실을 먼저 지으면 민생이 고달파지니 장차 적에 대처할 수 없는데 이는 촉과 오가 좋아할 일이니 국가의 안위가 걸린 문제라고도 하였다.


조예는 퉁명스러운 뉘앙스의 답변을 내렸는데 다음과 같았다.


‘궁은 마땅히 함께 갖추어 세워야 하는데 도적을 평정한 뒤에는 수비만 두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다시 큰 공사를 일으키겠는가? 소하도 궁실을 갖추는 문제에 대해 이와 같이 말하였다.’


진군이 반론하기를 한 고조는 오직 항우와 천하를 다투었을 뿐인데 항우가 멸망한 후 궁궐이 모두 불타니 소하가 한 일은 필요에 따라서 한 일이지 사치가 아니었는데 하물며 지금은 두 적(촉, 오)이 평정되지 않았는데 그때의 일에는 비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 후에 진군은 또다시 상소를 올렸는데 여기에서는 황제를 달래는(?) 듯한 모습이 보인다.

‘사람은 누구나 원하는 바가 있고 하물며 천자가 원한다면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잠시라도 재고하여 생각을 바꾸신다면 이는 신하가 따를 수 없는 높은 경지입니다. 예전에 후한 명제(후한 현종 명제 유장)는 덕양전을 짓고자 했으나 종리의의 간언을 듣고 멈추었다가 후에 다시 지어 완공하였습니다. 그 후 말하기를 종리의가 있었다면 이 전각이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는 군왕이 신하 하나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조예는 일부 공사를 감축했다.


하지만 마지못해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236년에 진군이 사망한 후 3년 뒤에 조예도 사망하면서 어린 후사 조방을 사마의와 조상을 고명대신으로 삼아 보좌토록 하였다.


그런데 10년 뒤인 249년에 사마의가 고평릉의 변을 일으켜 조상을 주살하고 정권을 탈취한다.


조예의 여러 사치와 향락 그리고 무엇보다 진군과 같은 합리적인 사람들의 말을 무시한 것 등의 행동들은 차근차근 조조가 기틀을 다진 조위의 기반을 갉아먹었다.


그 결과 정식으로 건국한 지 30여 년 만에 조씨 왕조는 사마씨 가문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허수아비로 전락한다.


진군은 강직하면서도 동시에 속이 깊은 사람이기도 했다.


이는 진군이 유이를 구명한 것과 많은 간언을 하면서도 이를 숨긴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조조 시절이었던 219년에 조조가 한중 전투에 출정해 있는 틈을 타서 위풍이 조조의 기반인 도시가 되는 업을 점령하려고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다.


유이라는 사람은 아우가 난에 연루되어 처형될 예정이었는데, 진군이 조조에게 아뢰어 원래 직무로 복귀시켰다.


이에 유이는 진군에게 감사를 표했으나 진군이 답하기를 ‘형벌을 논함은 나라의 일이지 사적인 정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왕의 본심이 어떠한지를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이는 공을 조조에게로 돌리며 공사 구분을 한 것이었다.


또 진군은 간언 취지의 상소문을 올릴 때마다 초고를 스스로 없앴는데, 그의 자식조차도 이를 몰랐다.

조정 사람들은 진군이 고위직에 있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후에 여러 신하들의 상소문을 모아 책을 편찬하게 할 때 진군의 상소문들을 조정 사람들도 보게 되었고 모두 탄식하였다.


진군의 행동은 간언을 적극적으로 하되 황제의 체면을 깎아내리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는 앞서 궁실 수리 반대 상소에 대해 보충해서 올린 ‘황제 달래기’ 취지의 소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진군은 세심하고 배려가 많으면서도 동시에 실무와 정책에 밝은 재상이었으며 혜안이 뛰어난 책사였다.

아들인 진태의 열전도 <삼국지>에 함께 실려있는데 그는 군인으로 활약했다.


진태는 사마의의 두 아들이자 그의 뒤를 이어 차례로 위의 권신이 되는 사마사, 사마소 형제와 가까웠다.

하지만 진태는 사마씨 가문이 집권한 후에도 위 왕실에 대한 충심을 지켰다.


조방을 폐위한 후 옹립한 조모가 사마소를 죽이려다 도리어 사마소 수하의 장수 성제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진태는 상복 차림으로 조모를 추도했다.


조모는 시호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 이는 자기가 직접 관여하진 않았더라도 천하가 모두 아는 자신의 책임을 완전히 회피하기 위한 사마소의 술수였다.


시호를 주지 않고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때 고위직이 조모를 위해 추도하고 상복을 입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진태는 그것을 행했다.


나아가 진태는 사마소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는 말을 한다.


가충이 사마소와 성제 중간에서 조모 시해에 깊이 관여되어 있었는데, 진태는 가충의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나 가충이 사마소의 측근이었기에 사마소는 적당히 덮고 그 아래 선에서 무마하려고 했다.


진태가 ‘그보다 높은 사람(!)이라면 몰라도 낮은 사람에게 물을 수는 없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


보충 1) 진군과 육형(肉刑) 부활 문제


정사 <삼국지>에서 진군은 육형(肉刑) 부활 문제에서의 주된 논자로 등장한다.


육형이란 신체에 훼손을 가하는 형벌을 말하는데, 묵형/의형/월형/궁형/대벽이 있었다.

묵형은 죄명을 먹물로 문신하게 하는 것이고,

의형은 코를 베는 것이며,

월형은 발뒤꿈치를 잘라내는 것이고,

궁형은 남성의 성기를 제거하는 것이며,

대벽은 사형이었다.


이는 본래 고대부터 내려오는 형벌이었으나, 전한 문제가 육형을 태형(비교적 가벼운 죄에 대해 가는 회초리로 엉덩이나 등을 때리는 것), 장형(중죄에 대해 굵은 곤장으로 엉덩이를 때리는 것)으로 대체하였다.


조위의 형법은 기본적으로 한나라 때의 것을 계승하였다.


육형은 없었고 대벽(사형. 참형, 효수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음)과 태형, 장형에 더하여 도형과 금형이 있었다.


도형은 죄인을 옥에 가두고 노역을 과하는 것으로서 이후로 복권이 가능했다.


금형은 벌금형을 말했는데 정확히는 다른 형을 돈이나 곡식을 내는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중형의 경우 금형으로 대체하는 것이 불가했다.


그런데 후한 말에서 삼국 정립에 이르는 시대는 전란기였기 때문에 인명살상이 비일비재했고 이는 인구의 감소를 의미했다.


형벌의 차원에서 보면, 기본적으로는 도형 위주긴 했는데 전란의 영향으로 사형의 비율이 높았고 전투나 반역 관련 범죄는 즉결 처형도 많았다.


식량 생산과 전력(戰力) 동원의 핵심은 결국 인구 확보에 있었기 때문에 사형을 육형으로 대체하여 목숨만은 보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어떻겠냐는 취지로 육형부활론이 제기되었다.


이는 조조(태조 무제 *추존) 그리고 황제에 즉위한 후의 조비(세조 문제)가 각각 지지하는 취지로 논의에 부쳤으며, 조예(열조 명제)가 즉위한 후에도 논의가 있었다.


처음에 조조는 육형을 부활시키는 문제를 논의하라고 명하면서 ‘옛날에 진기가 말하기를 사형보다도 더욱 인자한 은혜가 될 수 있는 형벌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것을 이른 것이다. 그대는 과연 아버지의 그 논설을 이어받아 펼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진군의 논지는 다음과 같았다.

1. 처음에 한나라에서 육형을 폐지하고 태형을 더한 것은 본래 어질고 측은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죽는 자가 더 많아졌다. 이는 겉으로 가벼운 형벌인 듯 하나 실제로는 무거운 형벌이 된 것이다.

2. 엄한 형벌로써 범죄를 통제할 필요가 있다. 사람을 상해한 자에게 신체를 절단하지 않고 머리털이나 수염을 깎는 정도로 그치는데 이는 이치에 맞지 않다. 육형을 시행한다면 간통죄를 범한 자는 성기를 자르고 절도죄를 범한 자는 발뒤꿈치를 자른다. 그러면 간통죄나 절도죄 등이 사라질 것이다.

3. 특히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다스리는 것에 있어서는 형벌 완화 정책이 오용된 것이다. 그러니 사형을 육형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한다면 사람을 살릴 수 있다. 현재에는 장형으로 사람을 때려죽이는 식으로 육형을 대체하고 있으니 육형을 부활시키면 사람의 목숨을 아끼는 것이 된다.


종요도 같은 의견을 냈지만 ‘이는 백성이 기뻐할 법이 아니다.’라는 취지의 반대의견이 많았다.


조조는 아직 전쟁 중이고 사람들의 반대의견이 많음을 고려하여 논의를 중지했고, 조비도 같은 취지로 그만두었다.


육형 부활 문제는 조예의 재위 초에 다시 제기되었는데, 종요가 다음과 같은 논지로 상소했다.

1. 본래 월형으로 처리될 죄에 대하여 사형으로 처리되는 자들에 대해 육형을 부활시켜 적용해야 한다. 그 외에 문신형/비형/왼발 절단형/궁형 등에 해당하는 자들은 문제 때처럼 머리털 깎기나 태형으로 대신할 수 있다.

2. 우리 왕조는 고대의 왕조를 계승했다. (위가 한의 선양을 받아 성립했고 한은 고대 왕조를 계승한 것이므로, 한과 위는 모두 고대 왕조의 올바른 도를 따라야 한다는 맥락에서) 한나라 문제가 형벌을 고쳐 육형을 폐지한 것은 고대의 도에 맞지 않는다. 선제(조조)가 육형을 회복하고자 하였지만 단지 전쟁 때문에 시행하지 못한 것뿐이다. 지금의 폐하께서도 두 선제(조조, 조비)의 뜻을 계승하여 ‘발뒤꿈치를 베어(월형) 악을 금할 수 있음’, ‘죽음에 이르러 억울함이 생김’을 한탄하신다.

3. 범죄자들은 대개 20세에서 40~50세 사이에 있으니 발을 베어도 아이를 낳을 능력이 있다. 지금 천하의 인구가 형벌을 고친 문제 때보다 적다. 계산해 보면 육형을 시행했을 때 매년 3,000명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데 과거 육형을 폐지했을 때에 매년 10,000여 명이 죽었다. 자공이 공자에게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이 인(仁)입니까?’라고 묻자 공자가 ‘어찌 인에만 그치겠는가? 성인의 경지이다. 요순 또한 이를 어렵게 여기셨다.’ 하였고 또 ‘인이 멀리 있겠는가? 내가 인을 원한다면 인이 곧 도달한다.’ 하였으니 이 법을 시행하면 백성이 영원히 구제될 것이다.


이에 대해 왕랑이 다음과 같은 논지로 반론했다.

1. 종요의 결론은 사형을 줄이는 대신 월형을 늘리자는 것이다. 이는 죽어서 누워 있는 시체를 다시 세워 사람을 만드는 것과 같다(가능한 일도 아니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는 의미).

2. 다섯 가지 형의 종류와 사형을 1등급 감형하는 규정은 이미 법에 있다. 사형에 처할 죄의 경우 죽이지 않으면 그 자체로 감형이 되는 것이므로 굳이 고대의 육형을 다시 가져와 도끼와 칼로 신체를 찍어야만 비로소 감형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 예로부터 성군들은 육형의 참혹함을 차마 견디지 못해 이를 폐지하고 시행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지가 이미 수백 년이 지났는데 이제 다시 육형을 시행한다면 감형이라는 ‘은혜’보다도 육형이라는 ‘혹형(酷刑)’의 소문이 먼저 외적과 원수들의 귀에 전해질 것이다. 이는 ‘먼 나라 사람들을 감화시켜 오게 하는 도리’가 아니다.

4. 종요의 문제의식은 사형에 처할 죄 중 상대적으로 가볍게(최소한 죽이는 것까지는 하지 않을) 벌할 자가 실제로는 무겁게 벌해지는데 이론적으로는 무겁게 벌해질 자가 가볍게 벌해지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이다(앞서 종요가 언급한 것처럼 사형에 처할 죄를 너무 가벼운 태형으로 벌하면서도 사람을 죽음에 이르도록 벌하는 문제). 그렇다면 월형을 부활시키지 않더라도 노역의 연한을 2배로 늘리는 방식 등 현행법상 형의 종류 자체는 유지하면서 강도를 올리는 정책을 취할 수 있다.


이 논의에는 100여 인이 참여했는데 왕랑의 의견에 동조하는 자가 많았고 대부분 시행이 어렵다고 생각했다.


결국 조예는 ‘오와 촉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다’라는 이유로 이 일을 다시 유보했으며 조위 멸망은 물론 그 이후에 율령 체제의 도입으로 ‘태(작은 곤장)-장(큰 곤장)-도(노역)-유(유배)-사(사형)’의 오형(五刑) 체계로 정비될 때까지도 육형은 끝내 부활하지 않았다(실정법상으로는).


종요의 지적은 단순히 육형을 부활시키느냐 아니냐보다도 근본적으로 사법 원리라는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


명경실중(名輕實重) 즉 명목상 가볍게 처벌되도록 판결이 나더라도 실제로는 무겁게 집행이 된다는 것은 전근대 사법 체계의 근본적이고 치명적인 문제를 보여준다.


또 명목상 더 무겁게 처벌해야 할 죄를 가볍게 처벌하도록 판결한다는 것 자체가 죄와 형의 비례성을 깨뜨리는 일이다.


종요의 의견대로 월형을 부활시키면 기본적으로 강도의 측면에서 사형과 태형 사이에 있는 형벌을 신설하는 것인데, 이는 위의 두 문제를 모두 해결해준다.


즉 사형에 처할 죄를 태형으로 처벌하는 대신 월형으로 처벌하면 죄와 형의 비례성이 성립하게 되고 명경실중의 문제도 해결이 된다.


진정한 문제는 사실 그것을 하필이면 육형으로 실현하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차라리 사형과 태형을 합리화하는 것 – 즉 사형에 처할 죄는 그냥 사형에 처하고, 태형에서 사형과 같은 결과(죽음)를 낳지 않도록 통제 강화 등 – 이 타당하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아니면 왕랑의 견해처럼 도형을 강화하는 방법도 있다.


외과학이라는 개념조차 부실했던 고대/중세에 육형을 받은 자가 살아날 가능성이 얼마나 되었을지 모르겠다.


게다가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죽느니만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


사형에 처할 죄를 적용했을 때 유죄 판결을 받은 자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살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는 견지에서 월형이라는 선택지가 있는 것 그리고 월형을 택하는 것이 나을 수 있긴 하다.


하지만 법 원리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살리려면 살리고 죽이려면 죽이는 것이 맞지 그 가운데 그러니까 죽느니만 못한 고통을 주면서 살리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말하자면 쿠 드 그라스(Coup de grâce, ‘자비의 일격’)라고나 할까.


국가 입장에서도 심각한 장애와 고통을 가지게 된 자를 전력이나 식량 생산 인력으로 쓴다는 것이 그다지 생산성이 크지 않을 것 같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진군과 종요의 주장야말로 어쩌면 명경실중일지도 모른다.


생명을 살릴 수 있으니 좋지 않으냐 하지만 실제로는 생명을 죽음의 언저리까지만 몰아넣는, 어떻게 보면 죽음보다 무거운 것에 지나지 않음이 육형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보충 2) 진군과 구품중정제(구품관인법)


구품중정제란 진군이 주도하여 제도화한 인재 평가/추천 시스템으로서, 각 지역에 중정(주로 지역 유력자)을 두고 인물의 덕행/학행/재능/가문/평판 등을 종합 평가해 상상-상중-상하-중상-중중-중하-하상-하중-하하의 9품(등급)으로 분류한 뒤 관직 임용의 기초 지표로 삼는 제도를 말한다.


후한 말까지는 거수(추천)제도를 운용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효렴제였고 이를 중심으로 현량과나 방정과 등의 특별 천거제도도 병행하였다.


효렴제는 효도하고 청렴한 자 구체적으로 도덕성/평판/능력 등이 있는 인재를 지방의 태수나 자사가 천거하는 제도였다.


하지만 이는 지역 토호나 문벌 가문 등의 영향력이 커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조위 왕조에 이르러서는 중앙에서 중정을 임명하고 9품제를 기준으로 두어 합리적으로 또 제도적 정합성을 제고하여 관리를 임용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구품중정제는 위진남북조의 정의적 특징인 문벌귀족사회의 형성에 기여한 제도적 메커니즘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중정 자체가 지역 유력 가문 출신 인물일 수밖에 없었기(지역 유력자 정도가 아니면 숨은 인재를 알 정도의 인맥을 가지지도 못했을 것이다) 때문이다.


‘상품은 한문(寒門, 가난하고 문벌이 없는 가문)에 내리지 않고 하품은 세족(世族, 권세가)에 이르지 않는다.’라는 말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후에 남북조를 통일한 수나라에서 관료 선발에 시험 요소를 강화하고, 뒤를 이은 당나라에서 이를 과거제 중심으로 제도화 및 확장하면서 구품중정제는 6세기 말~7세기 초에 이르면 실효(失效)된다.


다만 구품중정제의 제정은 시대 환경이라는 맥락을 감안할 필요도 있다.


삼국시대는 전란기였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보면 상시적 전시동원체제인 국가나 마찬가지였다.


전쟁과 통일에 이바지하기 위해 물적, 인적 자원이 총동원되었다.


조조가 시행했고 병농일치의 의의를 가지는 둔전제(변방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현지에서 농지를 개간하여 군수물자를 확보하거나 백성들을 변방으로 이주시켜 개간하게 하는 제도)의 경우에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중앙에서 시험으로 선발하기에는 아직 전국이 그다지 안정된 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시험을 통한 관료 임용은 인재 확보에 안 좋은 방향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


능력주의는 보통 시험 제도와 많이 묶이는데, 이는 인사행정의 차원에서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논공행상 등의 성격을 지니는 엽관제 같은 것과 대조된다.


하지만 시험 제도는 선발자의 역량 등 측정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 조작적 정의를 하는 것을 전제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역량이 있다고 하더라도 선발/합격 등을 하지 못하는 인재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엽관제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그나마 덜 부당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시험 제도이다.


결국 시험은 능력을 측정하는 데 제일 낫긴 하지만 동시에 능력을 특정 테두리 안으로만 정의하면서 온전히 가려내지 못한다는 결함도 가지고 있다.


전쟁과 통일을 위해 모든 자원을 퍼부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폭넓게 온갖 종류의 그리고 재능을 지닌 인재들을 뽑아 올릴 필요가 있었으므로 시험은 이롭지 않을 수도 있었다.


비록 구품중정제가 당초 목적했던 방향으로 가지 못하고 현실과 조합되었을 때 왜곡을 낳은 전형적인 정책실패의 사례가 되기는 했지만, 적어도 그 시대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나름의 맥락적 이해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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