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평전 4. 위상 魏相

by 남재준

위상(魏相, ?~B.C.59)을 알게 된 것은 <곽광> 편을 쓰면서였다.


위상은 곽씨 가문을 주멸하는 시초가 되는 상소를 올렸고, 나아가 중종 선제 유순 재위기에 앞서 다룬 병길과 더불어 재상으로서 활약한 인물이다.


그의 삶은 젊은 시절의 강직함에서 나이가 들어가며 유연함으로 옮기는 인생의 양상을 보여준다.


젊은 시절의 위상은 군(郡)의 하급 서기로 일했는데, 현량(賢良, 젊은 재목)으로 천거되고 책문 답안을 훌륭하게 써서 무릉군의 령이 되었다.


얼마 후 어사대부 상홍양의 식객이 그의 명을 받은 사자로 가장하고 와서 현의 관리가 제대로 알현하지 않자 노하여 그를 결박하여 모욕을 주었다.


위상은 악한 무언가가 뒤에 숨겨져 있음을 의심하여 식객을 체포해 죄를 밝히고 시장에서 참형에 처했다.


상홍양은 상관씨 가문과 더불어 무제 말년에서 소제 초기의 실세였으므로, 결과적으로 그의 밑에 있던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본인의 안위에 위험이 따르는 행위였다.


그리고 실제로 이후 위상은 자신의 강직하다는 평판 때문에 위험에 처한다.


상홍양의 식객 처형 사건 이후로 위상은 하남태수로 임명되었다.


하남에는 낙양이 포함된다.


이때 승상 전천추가 죽었는데 그 아들이 낙양 무기창고의 장을 맡고 있었다.


전천추의 아들은 위상이 엄하게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점을 과하게 의식하여 오래 머물다가 꼬투리를 잡힐까 두려워 자진 사직하고 말았다.


위상은 아전에게 그를 추격하여 불러오게 하였으나 그는 끝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위상은 실세가 된 곽광이 자신을 미워할까 두려워하게 되었다.


전천추의 아들은 장안으로 들어갔고 곽광이 내막을 알게 되자 노하여 위상을 불러들여 다음과 같이 책망하였다.


‘어린 군주가 새로 즉위했으므로 우리는 함곡관을 수도의 방벽으로 삼고, 무기고에 정예병의 장비를 모아두었다. 그래서 전천추의 동생을 관도위로, 아들을 무기고의 장으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대는 국가의 큰 계책을 깊이 헤아리지 않고, 그저 승상이 없다고 해서 그 아들을 내쫓다니 어찌 얄팍한가!’


이 말은 약간 해석한다면 ‘내가 전천추의 아들을 낙양 무기고 책임자로 배치한 것은 전체적으로 새 황제가 어리다고 하여 빈틈을 노리는 자들이 있을까 염려하여 한 안배의 일환인데, 네까짓 게 뭔데 그것을 어그러뜨리느냐.’로도 볼 수 있겠다.


설상가상으로 누군가가 위상이 무고한 이를 죽였다고 고발했고, 해당 사건이 법관에게 내려갔다.


이러한 일련의 전개는 정의가 불패하는 신화처럼 강직함이 전부가 되는 것은 현실의 인생에서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상은 본인이 잘못한 건 없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의 평판 때문에 호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물론 위상이 그런 평판을 노리고 상홍양의 식객을 죽인 건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된 셈이었다.


하지만 위상은 권세가에게 아부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백성에게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남에서 장안을 오가는 수비병 2-3천 명이 곽광을 가로막고 ‘우리가 1년 더 복무할 테니 태수의 죄를 대속하게 해 달라’라고 청하였고, 하남의 노약자 1만여 명도 관문을 지키며 상소를 올리려 하여 관문의 수비병이 이를 곽광에게 보고하였다.


곽광은 일단 전천추의 아들 건을 핑계로 하여 위상을 옥에 가두어 두었다.


위상은 겨울이 넘기도록 갇혀 있다가 사면령을 통해 석방되고, 다시 무릉군의 령을 임시로 맡도록 한 뒤에 양주자사로 승진하기에 이른다.


이전에 옥새 담당 관리가 자신의 목을 걸고 옥새를 지켰던 일을 두고 벌하지 않았던 것과 비슷한 사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때에도 곽광은 소제 초기 군사적 방비 강화 계획의 일환으로서 전천추의 아들을 낙양 무기고에 배치했던 계책과 마찬가지로 재변의 징조가 보여서 아무래도 옥새를 확보해 두는 게 맞겠다는 계책을 세웠다.


하지만 옥새 담당 관리와 마찬가지로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위상은 결과적으로 곽광의 계획을 망쳤다.


그러나 곽광은 끝내 위상을 처벌하지 않았고 오히려 승진시켰는데, 병사와 백성이 직접 구원에 나선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거나 최소한 위상이 민심을 안무하는 능력을 나름대로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위상의 강직한 성품은 바뀌지 않았고, 양주자사로 있으면서도 엄정한 감찰을 통해 여러 지방관들을 좌천시켰다.


그러다 그의 성품이 바뀌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생기는데, 그것은 위상과 친하며 중앙에서 대신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던 병길이 보내온 글이었다.


‘조정이 이미 그대의 행적을 깊이 알아 머지않아 크게 쓸 것이다. 부디 일을 조금 삼가고 스스로 중히 여기며, 기량을 몸속에 감추라.’


위상은 이 말을 좋게 여겼고 자신의 매서운 기질을 누그러뜨렸다.


유하가 폐위되고 선제가 즉위한 뒤 위상은 중앙으로 불러올려져 구경의 하나인 대사농(재정 총괄)에 임명되었고 이어 어사대부(감찰)로 승진한다.


이 기간 동안에도 곽광의 세도는 계속되었고 4년 뒤 곽광이 사망하자 아들 곽우, 조카 곽산이 각각 우장군과 상서령(황제의 비서실장)으로서 군권과 정권을 통제하게 된다.


병길을 비롯해 세상이 눈여겨봐 온 위상의 강직함은 이 시점에 진면목을 드러내게 되는데, 위상이 곽씨 세도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었다.


그 글의 취지는 대강 이러했다.


‘<춘추>에서 세습 대부를 비판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은 나라를 위태롭게 합니다. 무제 말년 이래로 국권과 정사가 곽광에게서 나왔습니다. 이제 곽광이 죽었는데도 그 아들이 대장군이 되고 조카가 권력의 요추를 쥐고 형제와 사위들이 군권을 장악했습니다. 곽광의 부인과 딸들도 장신궁(태후의 궁)에 마음대로 드나들며 때로는 밤에도 칙명이라 하고 문을 드나들 정도로 방자합니다. 이 권세를 깨뜨려야 합니다.’


더하여 위상은 매우 중요한 건의를 한다.


종래의 제도에 의하면 모든 상소문은 2통을 올려 하나를 부(副)라 표시하였는데, 이는 상서령이 먼저 상소를 검토하고 황제에게 올릴 수 없는 내용이라 하면 걸러서 올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위상은 이 제도를 폐지해야 상서령이 중간에서 마음대로 내용을 가리는 폐단이 없어진다고 아뢰었다.


일반론적인 이유를 댔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곽광의 조카 곽산이 상서령이었기 때문에 결국 상서령의 사전검토제도를 폐지한다는 것은 곽씨 세도의 약화라는 의의를 지니는 것이었다.


선제는 이를 수용했고 모든 일을 자신에게 직접 보고토록 하였다.


또 위상을 급사중(황제의 비서관)으로 임명하고 그의 의견을 모두 따랐다.


이후에 곽씨 가문이 공애황후 허씨를 독살한 사건의 전모가 선제에게 올라갔고 선제는 곽씨들의 봉작을 파(破)하고 귀가하게 하였으며 친족들은 지방관으로 전출하였다.


이어 위상은 승상으로 임명되고 고평후에 봉해졌으며 식읍 800호를 받는다.


이에 곽씨들은 원망하고 두려워하였다.


결국 곽씨 일족은 위상을 죽여야겠다고 결심하고 태후의 칙명을 사칭해 위상을 불러들여 목을 베고 선제를 폐위시키려 하였으나 일이 발각되어 모두 주살된다.


이때 재상의 반열에 오른 위상의 강직함은 이미 젊은 시절의 날 것이 아니었고 세파(世波)를 어느 정도 겪은 후의 성숙함이 깃든 것이었다.


이는 구체적으로 말해 옳은 행동이라도 맥락과 명분이 정확히 갖추어져 있어야 유의미하게 된다는 점을 깨우친 것이다.


구체적인 사례는 위상이 어사대부였을 때 그러니까 아직 곽씨 세도가 건재할 때 있었던 한 사건으로 확인할 수 있다.


곽씨 가문의 노비와 위상의 노비가 길거리에서 서로 싸우다가 곽씨의 노비가 성을 내며 위상이 있는 어사부의 문을 부수려고 들었다.


이에 위상이 나와 머리를 조아려 사과를 하였고 곽씨의 노비는 물러갔다.


젊은 시절의 위상이었다면 곧바로 곽씨의 노비를 데려다 벌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위상은 재상이 되어 세도가의 노비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행동까지 했다.


이는 이미 위상 스스로가 여기서 곽씨의 노비를 벌하면 반격의 빌미를 주는 것이라는 점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명분이 충분히 숙성되고 축적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정확하게 베어 넘기는 이치를 터득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편 위상은 재상으로서 민생과 실용을 중시하는 현실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선제 친정 후 승상으로서 위상의 활약이 이를 보여준다.


한과 흉노의 마찰이 심해지자 참지 못한 선제는 결국 흉노를 침공하려는 계획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때 위상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군대에는 다섯 가지 종류가 있으니,

1. 난을 구하고 폭을 치는 군대는 의병이니 의병은 왕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2. 적이 먼저 덮쳐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군대는 응병이니 응병은 승리합니다.

3. 사소한 원한을 참지 못해 분노로 일으키는 군대는 분병이니 분병은 패배합니다.

4. 남의 땅과 재물을 탐내는 군대는 탐병이니 탐병은 깨집니다.

5. 나라가 크고 인구가 많음의 위세를 보이려는 군대는 교병이니 교병은 멸(滅)합니다.

이 다섯 가지는 사람의 일만이 아니라 하늘의 도리이기도 합니다.

근래 흉노는 우리 백성을 사로잡으면 곧바로 돌려보내는 등 선의가 있었고, 변경을 침범한 일도 없었습니다. 땅을 두고 다투는 일이 있다 하나 깊이 마음에 둘 일이 못 됩니다. 듣자 하니 여러 장군께서 출병해 그들의 땅을 치자고 하는데, 신은 이 전쟁이 위의 어느 이름에 해당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변경 군현이 곤궁하여 부자가 빈자와 함께 개와 양의 가죽옷을 입고, 풀과 열매로 연명하며 스스로 버티기가 어렵습니다. 군대가 지나간 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든다고 하였으니, 백성의 고통이 음양의 조화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기더라도 후환이 남아 재해가 생길까 두렵습니다. 게다가 변경 지역의 수령 가운데 상당수가 제대로 뽑히지 않았고, 풍속이 엷어졌으며 수재와 한재가 불규칙하게 자주 발생합니다. 금년 통계를 보면 자제가 부형을 죽이고 아내가 남편을 죽인 자가 모두 222인입니다. 이는 작은 변고가 아닙니다.

이런 데에는 근심하지 않고 오히려 머나먼 오랑캐에 대하여 작은 원한을 갚으려고 군사를 내니, 이는 공자가 이른바 내 우려는 작은 제후국(을 치는 것)이 아니라 건물(궁이나 종묘) 안의 휘장(즉 내치(內治))에 있다고 한 것과 같사옵니다. 바라건대, 식견 있는 이들과 더불어 자세히 의논하소서.’


선제가 위상의 소를 수용해 출병을 중지시켰다.


이 상소는 매우 중요하다.


위상의 면모를 볼 수 있는 면도 있지만, 외교와 국방의 문제가 단순히 군사주의냐 평화주의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위상이 전쟁을 반대하는 이유는 단지 그가 평화 지향적이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다.


군대의 동원과 전쟁이 가져오는 거대한 비용을 정확하게는 백성의 생명과 안위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현대 국제관계학에서는 현실주의(Realism)를 기본적으로 국제사회는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국가 간 상호 역학 관계이며 평화란 세력균형일 뿐이라고 보는 관점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실천적, 정책적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분석의 틀이 아니라 실천의 강령으로서의 현실주의란 결국 무엇보다 국민의 안위에 무엇이 최선인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군사의 동원부터 단순한 일이 될 수 없다.


위상이 소에서 밝힌 것과 같이 변경이 쑥대밭이 되며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국가가 지켜져야 궁극적으로 국민도 지켜진다는 논리는 어지간해서는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논리가 쉽게 적용된다는 것은 전쟁도 쉽게 정당화됨을 의미하며, 결과적으로는 국가는 지속될지 몰라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많은 생명을 앗아간 후이다.


원론적으로 보면 어떤 전쟁도 실은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불가피한 자위(自衛)나 보다 적극적 안보를 위해 때로는 군사적 행동이 불가피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도 제반 준비를 매우 철저하게 하여 비용을 최소화해야 한다.


<한서>에서는 위상이 법도를 중시하고 고사(故事)와 시책(時策)을 살피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재상을 비롯한 고위 정무직에게는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들을 면밀히 파악하여 적절한 시책을 수립하고 논의를 주도하는 것보다 중요한 사명이 없다.


위상은 매우 꼼꼼한 성격이었으며, 이것이 현실 감각 및 강직함과 결합하여 탁월한 재상을 만들어 내었다.


그는 속관들에게 명하여 각 군국의 일을 조사하게 하고 휴가를 받아 집에 갔다가 관부로 돌아오면 사방에서 들은 특이한 소식까지 바로 보고하도록 하였다.


반역, 강풍, 강우 등의 재변이 있음에도 윗선에 아뢰지 않으면 위상이 곧장 선제에게 아뢰었다.


반고는 병길과 더불어 위상이 으뜸인 재상으로서 한마음으로 선제를 보좌하였으며 선제가 두 사람을 중히 여겼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면서도 위상은 사람됨이 엄정하고 과단성이 있어 병길만큼 너그러운 성품은 되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병길과 더불어 곽씨 멸문 이후 선제 치세를 대표하는 명재상이라 하겠다.


위상은 승상으로 임명된 지 9년 만인 B.C.59년(선제 14년)에 사망한다.


참고) <한서> 곽광김일제전, 위상병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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