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평전 5. 가후 賈詡

by 남재준

어렸을 때나 아니면 커서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만화 삼국지>를 어떤 버전으로든 읽어 보았을 것이다.

제일 유명한 건 이희재 작가의 버전인 것 같지만, 나는 이충호 작가의 버전을 보았고 그 후에 이희재 작가 버전도 봤지만 이충호 작가의 버전을 여전히 더 좋아한다. (일단 그림체가 더 멋있다고 생각했고, 제갈량 사후 고평릉의 변 등 삼국통일까지의 내용을 비교적 자세히 다룬다.)


가후(賈詡, 147~223)를 알게 된 것은 그 <만화 삼국지>를 읽었을 때였다.


그러고 보면 나는 또래 남자아이들이 무인(武人), 장수(將帥)들을 좋아했던 것과 달리 리더나 책사(策士)들에게 더 관심을 가졌다.


삼국지는 말 그대로 위, 촉, 오 삼국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지만 정작 삼국정립은 후반부에나 다루어지고 대체로 핵심 주인공이 되는 조조와 유비의 중년까지 즉 후한 말 황건적의 난부터 대강 적벽대전 직후까지가 주요 무대가 된다.


개인적으로는 삼국 정립과 통일 (220~280) 기간에 제일 관심을 많이 가졌다.


이 시기는 이미 220년에 조조가 사망하고, 223년에 유비가 사망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주인공들은 무대에서 퇴장하게 된다.


중요한 건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조조의 위나라는 45년 만에 서진 세조 무제 사마염에 의해 찬탈당하고, 촉한은 그로부터 2년 전에 위나라의 권신이자 사마의의 차남이었던 사마소에 의해 42년 만에 멸망한다.


이 점이 삼국지를 비극으로 만든다.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리고 트라우마를 남겨 놓고서는 결국 누구도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이 말이다.


하지만 역사가 반드시 영웅들에 의해서만 구성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난세에 압도적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생존’이다.


특히 지식인들 정확히는 문사(文士)들의 경우에는 정상적인 통일국가의 조정에서 봉직할 수 없기 때문에 이전에 살펴보았던 소하나 진평과 같이 군에서의 행정이나 전략을 담당하는 직책으로 활약한다.


삼국지에서는 특히나 많은 책사들이 등장하는데, 그중 제일 앞의 반열에 있는 제갈량 이외에도 많은 이들이 삼국에서 군사전략 차원의 보좌와 국가 성립 이후에는 행정을 맡아 보았다.


그중 존재감을 가지는 이들 중 하나가 바로 가후이다.


가후의 역량과 행적을 보면, 진평과 매우 닮아있다.


다만 가후는 진평보다 훨씬 더 강한 ‘생존 우선주의자’였기 때문에, 보기에 따라 그의 행보는 ‘비열’해 보이기도 한다.


또 가후는 재상으로서 활약한 내용은 거의 없고, 책사로서 활약한 내용이 압도적이다.

그렇지만 가후를 단순히 소인배이자 보신주의자라고만 볼 수는 없다.

그의 언행과 행적을 따라가 보면 그의 ‘생존’이란 단순히 본인의 생존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천하의 생존을 위한 선택일 때가 많았고 또한 그것을 판단할만한 거시적 안목과 식견도 갖춘 이였다.


가후는 진평과 마찬가지로 젊은 시절에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오직 엄충이라는 사람만이 그를 장량과 진평에 견주었다.


많은 동시대인처럼 가후 역시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이 되었으나 칭병하며 사직하고 서쪽으로 돌아갔다.

이는 아마도 천하 대세가 점점 혼탁해지며 난세로 접어드는 것을 눈치채고 중앙에 있는 것보다 귀향하는 것이 나을 거라고 생각한 탓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여러 사람과 함께 서쪽으로 돌아가던 가후는 반란을 일으킨 저족(氐族, 중국의 소수민족으로서 후일 오호십육국시대에 그 유명한 비수대전을 일으킨 명군 부견을 배출한 전진(前秦)을 건국한다) 을 만나고 말았다.

저족은 가후와 동행하던 수십 인을 모두 잡아 살해했는데, 가후만이 기지를 발휘해 말하기를, ‘나는 태위 단경의 외손자이다. 나만은 따로 살려두면 내 집안이 반드시 후한 보상을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단경은 장기간 변경의 장수로서 이름이 알려져 있었는데, 가후가 저족이 그를 두려워함을 알고 임기응변을 발휘해 실제로는 단경의 친척이 아님에도 그런 거짓말을 한 것이다.


목숨이 오가면 패닉에 빠지고 더구나 주변 사람들이 전부 죽어 나간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기지를 발휘할 줄 알았던 가후의 내적 힘이 돋보인다.


저족은 겁을 먹고 가후를 죽이지 않았으며 맹세까지 하면서 풀어주었다.

영사황후 하씨와 대장군 하진, 그리고 십상시가 서로 충돌한 끝에 결국에는 처음에 하진이 십상시를 주살하기 위해 불러들인 동탁이 집권을 했다.


가후는 이때 동탁의 사위인 중랑장 우보의 휘하에 속해 있었는데, 동탁과 우보가 모두 죽자 이각과 곽사 등은 두려움에 빠졌다.


그래서 군대를 해산하고 각자 귀향하여 목숨을 보전하자고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가후가 말하기를 ‘장안에서 지금 그대들을 모조리 죽인다고 논의한다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병력을 버리고 달아난다면 고작 한 지방의 정장도 여러분을 묶어 죽일 수 있을 것입니다. 차라리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하면서 가는 곳마다 병력을 모아 장안을 공격하여 동탁 공의 원수를 갚으십시오. 운 좋게 성공하면 천자를 받들고 천하를 평정할 수 있고, 혹 실패하더라도 그때 가서 도망쳐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이각과 곽사가 그 말을 따랐는데, 결국 이들이 천자를 끼고 천하를 더욱 어지럽게 하였다.

밑져야 본전이니 차라리 군대를 더 끌어모으고 천자를 끼라는 말은 난세라는 환경 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군벌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합리적인 것이었지만 천하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새로운 환란의 시작이었다.

이에 배송지는 주석에서 이각과 곽사의 난동을 실질적으로 촉발한 것이 가후였음을 비판하였다.


이각과 곽사가 가후에게 후작을 내리려 하였으나 가후는 사양하며 ‘그것은 다만 제 목숨을 구하기 위한 계책이었을 뿐인데 무슨 공이 있다고 후작이 되겠습니까?’ 하였다.


또 상서복야를 제수하려고 하니 ‘상서복야는 벼슬의 스승과 같은 직이어서 천하가 기대를 거는 자리인데, 제 명망은 본래 중하지 못하니 감히 그 자리에 올라 사람들의 신뢰를 얻을 수 없습니다. 제 명예욕은 그렇다 치고 조정을 어찌하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최종적으로는 상서로 임명하여 인사 업무를 맡기니 가후가 여러 사람을 바로 잡고 구제함이 많았다.

이각과 곽사는 가후를 가까이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했다.


가후가 후작이나 상서복야와 같이 공이 있거나 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운 이에게 주는 직위를 사양한 것은 한편으로는 그게 본인에게 이로울 것이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공(公)적 차원에서도 이롭지 않다고 본 것인데 이로 보아 자기와 세상을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분수를 지켰다.


이각과 곽사가 가후를 중용하려고 한 것은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가까이 하지 않으면 자신들에게 화가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설령 이각과 곽사가 종국에 망할 것으로 생각하여 그들의 막하에서 관직생활을 하고 싶지 않더라도 계속 사양하면 도리어 가후를 의심하고 해를 입힐 수도 있었다.


상서는 상대적으로는 실무직에 가깝고 또 장기적으로 천하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이각과 곽사의 폭정에서 가능한 한 인재들을 보호하고 등용하는 것이 이롭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생존과 원칙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가후는 ‘원칙 있는 생존’을 추구하는 사람에 가까웠다.

난세에는 이처럼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들도 서로 절묘하게 어울린다.


이각과 곽사가 장안에서 싸울 때, 이각 등이 가후와 의논하며 천자를 데려와 아군에 두자고 하였는데, 가후가 말하기를 ‘그렇게 하면 천자를 협박하는 것이니 의리가 아닙니다.’ 하였다.

하지만 이각은 듣지 않았다.


가까이 있는 이익만 보고 한 선택이 멀리 화근을 놓아두는 것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장수가 가후에게 말하기를 여기가 오래 머물 곳이 못 되는데 왜 떠나지 않으냐 물으니 가후가 답하기를 ‘나는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니 의리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 그대는 가도 되지만, 나는 떠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각과 곽사가 아닌 ‘나라’의 은혜를 입었다는 언급이 주목할만하다.

이각이 곽사를 치기 위해 흉노족과 강족 수천 명을 불러들여 비단과 재물을 주고 궁녀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흉노족과 강족은 자주 조정을 드나들며 ‘천자가 안에 있는가? 이각 장군이 우리에게 준다고 한 궁녀들은 어디 있는가?’ 하며 협박하니 헌제가 근심하였다.


이에 가후가 그들을 몰아내기 위해 몰래 흉노족과 강족의 우두머리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며 봉작과 보물 등을 주겠다고 약속하니 두 부족이 돌아갔다.


그리고 이각의 세력은 약해졌다.


이각과 곽사가 화해한 후 헌제를 데리고 동쪽으로 가다가 대신들을 죽이려 하니 가후가 이를 말리면서 ‘이들은 모두 천자의 대신들인데 장군은 어찌 그들을 해치려 하십니까?’ 하고 막았다.


그러자 이각이 그들을 죽이지 않았으나 그 후 가후는 관직의 인수를 반납했다.


결국 가후는 이각을 떠나 화음에 주둔하고 있던 단외에게로 옮겼는데 가후에게 이미 명망이 있어서 단외의 군대가 그를 존경했다.


단외는 가후를 융숭하게 대접하면서도 가후가 군권을 탈취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였고 이를 눈치챈 가후도 불편해했다.


이때 장수가 가후에게 연락하면서 그를 불렀는데, 가후가 이에 응하여 떠나려 하자 어떤 사람이 단외가 그를 후하게 대접했음을 언급하며 왜 떠나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가후가 ‘단외의 성질은 의심이 많아 이미 나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겉으로 예우하나 믿을 수 없고 오래 머물면 반드시 나를 해칠 생각을 할 것입니다. 내가 떠나면 오히려 기뻐할 것이고 내가 밖에서 큰 우군을 얻어오기를 바랄 테니 내 처자도 잘 대우할 것입니다. 장수에게는 책사가 없으니 나를 원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집안도 일신도 모두 보전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가후가 장수에게로 가니 실제로 가후가 말한 대로 되었다.

가후는 장수를 설득해 형주의 유표와 동맹을 맺도록 하였는데 유표는 가후를 손님으로 정중하게 대우하였다.


하지만 가후는 유표를 두고 ‘유표는 태평한 시대라면 삼공이 될 만한 인물이나, 시대의 변란을 알지 못하고 의심이 많고 우유부단하니 아무 일도 해낼 수 없는 사람이다.’ 하였다.


조조와 장수는 여러 번 싸웠고 조조의 적장자 조앙과 아끼는 장수였던 전위가 장수 때문에 완성 전투에서 전사하여 더욱 원수가 되었다.


조조가 갑자기 군을 철수시키자 장수가 조조를 추격하였는데 가후는 이를 말리며 가면 반드시 패할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를 듣지 않은 장수는 대패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가후가 당장 추격해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고 하였고, 장수가 이미 패했는데 잔병을 가지고 어떻게 이기느냐 하니 가후가 전세는 바뀌니 서둘러 가서 치라고 하였다.


이에 장수가 그 말을 따르니 이번에는 대승하였다.


귀환한 장수가 정예병으로 퇴군을 추격했을 때는 패배한다고 했고 패잔병으로 정예군을 칠 때에는 반드시 이긴다 했으니 어떻게 이렇게 반대되는 일이 모두 들어맞았느냐고 물었다.

여기에 대한 가후의 답이 의미심장하다.


‘이건 쉬운 일입니다. 장군이 비록 용병에 능해도 조조 공은 장군의 상대가 아닙니다. 조조 공의 군이 비록 물러가더라도, 조공은 반드시 몸소 후발대를 맡을 것입니다. 추격병이 아무리 정예라도 장군은 조조 공을 상대할 수 없으니 필패였습니다. 그러나 조조 공이 장군을 공격할 때 실수한 바가 없고 아직 힘이 다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퇴군한 것은 반드시 내부에 큰일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일단 장군을 깨뜨렸으니 조조 공은 반드시 병력을 가볍게 하고 선발대로 갔을 것인데 부장들이 후방에 남는다 해도 그들은 장군의 상대가 못 됩니다. 그러니 패잔병으로 싸우더라도 장군이 이긴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말이 의미심장한 부분은, 가후가 조조가 웅재(雄才)임을 정확히 평가하고 있었다는 데에 있다.


조조와 가후의 미묘한 인연은 이후 가후가 조조를 섬기게 될 때까지 계속된다.


조조가 관도에서 원소를 막고 있을 때 원소가 장수를 끌어들이려 사람을 보내자 가후가 나서서 ‘돌아가 본초(원소의 자)에게 이렇게 전하시오. 자기 형제조차 포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천하의 인재들을 포용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장수가 놀라서 가후에게 그렇게 말해버렸으니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묻자 가후가 ‘조 공을 따르는 것만 못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장수가 ‘원소는 강하고 조 공은 약하며 또 조 공과는 원수인데 어찌 그를 따릅니까?’ 하니 가후가 명답을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조 공을 따라야 합니다. 조 공은 천자를 받들고 천하에 명령하니(挾天子令諸侯), 그를 따르는 것이 의(義)입니다. 원소는 이미 강성하니 우리가 소수로 가면 중히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조 공은 약하니 우리가 가면 반드시 기뻐할 것입니다. 패왕의 뜻을 가진 자라면 반드시 사사로운 원한을 버리고 사해에 덕을 밝히는 법입니다. 이 세 가지 이유로 조 공을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장군은 의심하지 마십시오.’


마침내 장수가 조조에게 귀순하고 가후는 최종적으로 조조 진영에 합류하게 된다.

조조는 크게 기뻐하며 가후의 손을 잡고 ‘내가 천하의 신뢰를 얻게 된 것은 그대 덕분이오.’라고 하였다.

원수인 장수를 받아들였으니 조조의 관대함을 천하가 알 것이고, 또 명성이 있는 가후가 귀순을 했으니 그를 품은 조조의 명성이 더욱 커질 것이므로 그렇게 말할 만도 했다.


가후는 집금오(삼공 바로 아래 급으로 황제 호위와 낙양 경비 등을 담당)로 임명되고 도정후에 봉해진다.

관도대전에서 원소가 조조를 포위하고 식량마저 떨어지자 조조는 가후에게 계책을 물었다.


가후는 조조가 지략, 용맹, 용인(用人), 결단력 모든 면에서 원소를 이김에도 불구하고 너무 만전을 기하려 하니 이기지 못하는 것이므로 단호하게 나가면 바로 승부가 날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에 조조가 ‘좋다!’라고 말하며 원소의 30여 개 진영을 대대적으로 포위 공격하여 격파하였고 원소군이 크게 무너졌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원씨 가문이 완전히 무너지고 하북이 평정되었다.


220년에 조비(세조 문제)가 정식으로 선양을 받아 조위가 성립하였다.

문제는 가후를 태위로 임명하고 작위를 위수향후로 올리며 봉읍을 추가하고 아들들에게도 벼슬을 내렸다.


문제가 가후에게 오와 촉 중 어느 나라를 먼저 치는 것이 좋겠느냐고 물었다.


이때 가후의 답변을 보면, 그는 조조만 제대로 본 것이 아니라 조조의 경쟁자들이었던 유비와 손권의 재능도 제대로 꿰뚫어 보았으며 나아가 거시적인 판도를 읽는 역량도 있었다.


‘공격하여 취하는 데에는 군사력을 먼저 보나, 나라의 근본을 세우는 데에는 덕과 교화가 으뜸입니다. 폐하께서 때를 맞추어 선양을 받아 천하를 다스리게 되셨으니, 문덕으로 백성을 안정시키고 변고가 일어날 때를 기다리신다면 평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오와 촉이 작은 나라에 불과하나, 산과 강의 험준함을 믿고 있습니다. 게다가 유비는 영웅적 재능이 있고, 제갈량은 나라를 잘 다스리며, 손권은 허실을 판단하고, 육의(육손과 같은 동오의 명문 육씨 가문 출신 전략가)는 병세를 잘 보아 험지를 지키고 요충지를 점하며 배를 타고 강호를 자유롭게 움직이니 쉽게 속전속결할 상대가 아닙니다.

용병의 도는 먼저 이겨놓고 난 뒤에 싸우는 것이며(先勝求戰, 「손자병법」), 적의 강약과 장수의 능력을 저울질하여 빈틈없는 계책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신이 여러 신하들을 살펴보건대, 유비와 손권 같은 상대를 완전하게 제압할 방책을 가진 자는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비록 황제의 위엄으로 그들을 누른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성공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지금은 무(武)를 앞세우기보다 문(文)을 먼저 하실 때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가후의 이러한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남하했다가 참패를 당했다.


가후의 최종 관직은 태위로서, 이는 조위에서 삼공(태위-사도-사공) 중 가장 위의 반열에 있는 것이었다. (다만 이는 최고원로로 대우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조조는 재상들의 힘이 커져 (사실상 자기처럼) 권신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삼공의 힘을 빼 명예직처럼 만들었다.)


그는 223년(문제 4년)에 77세로 죽었고, 그의 후손들은 계속해서 조위와 서진의 조정에서 활약했다.


진수는 가후를 두고 순유와 더불어 계략을 짜는데 빈틈이 없었고 임기응변에 뛰어나 장량과 진평에 비견할만하다고 평했다.


하지만 후에 주석을 단 배송지는 순유가 야광주(스스로 빛나는 진귀한 보석)라면 가후는 촛불이라며 가후를 폄하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바인 동탁 사후 가후가 이각과 곽사의 난을 촉발한 것 등과 같이 가후가 계속 주인을 바꾸어 가며 천하를 혼탁하게 하는데 기여하며 자기의 생존을 우선한 것을 부정적으로 본 것이다.


하지만 후한 말은 군웅할거(群雄割據)의 시대였다.


가후가 출사할 때부터 이미 세상은 어지러웠는데, 그러한 지옥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개 선비나 모사로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수 없었다.


더구나 처음부터 조조, 유비, 손권이 삼국 정립의 최종 주인공이 될 것이니 그를 따라야겠다거나 반대로 한 왕실을 위해 동탁이나 이각 등에게 항거하다 죽겠다는 결심을 하는 건 그다지 흔한 일이 아니거나 심지어는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설령 일찍부터 조조, 유비, 손권 중 누군가를 알아보았다 하더라도 그들 밑에서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었고, 또한 셋 중 누구도 결국 천하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모든 것은 보기 나름인데, 자기 생존을 위하는 것이 소인배가 될 수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현실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가후가 천하를 혼란하게 한 데 기여한 것은 맞다.


그러나 동시에 가후는 이각이 대신들을 학살하는 것을 막고(그러지 않았다면 그들은 후일 백마의 화(905년) 때 후량 태조 주전충(주온)의 손아귀에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당말의 귀족이나 선비들과 다를 바 없게 되었을 것이다) 흉노족과 강족을 내보내 헌제를 보호하면서 이각을 약화시키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진평은 천하통일이 된 후 내치에 집중할 때가 되어서 재상으로 활약할 기회가 있었지만, 아쉽게도 가후가 죽었을 때에는 오히려 삼국 대치 상태가 막 시작된 상황이었다.


가후 사후 60년 가까이 지나서야 천하가 통일이 되었고 그것도 사마씨 가문의 서진이 이를 이루었으니 가후는 결코 태평한 시대에 살아본 인물이 못 되었다.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저우언라이(周恩來)에 대한 비판의 반론도 비슷한 논리로 구성할 수 있다. (물론 내치에서 많은 업적을 남기고 국민에게 신망을 얻은 저우언라이의 공적은 당연히 가후보다 크겠지만.)


정무적으로만 보면, 저우언라이가 최대한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 등의 역사적 대사건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인륜적 참화(慘禍)의 영향을 최대한 억제하고 수습한 것을 좀 더 부정적으로 보아 그래 봐야 부역자라고만 볼 것이냐의 문제와 비슷하다고 본다.


개인적으로는 역사적 무대에서 의인과 부역자로만 나누는 건 바람직하지도 않고 그 시대를 살아간 이들에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개인은 그 시대적 환경이라는 현실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다.

가후는 난세와 분열이라는 중국사의 가장 험난한 시기를 살아갔던 사람으로서 자신의 재능을 이용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본다.


그 이상을 할 수 있는 인물은 되지 못했고, 황제급의 인물들이었던 조조, 유비, 손권도 삼국시대의 참화에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언정 의인이라고만 평가하기는 어렵다. (이런 점에서 영웅과 의인은 또 다른 문제다. 그러니 간웅(奸雄)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것이고. 조조가 이런 경우이고... 또 유비는 인품이 고결하고 인덕(仁德)이 있다고 하지만, 결국 유비가 이릉대전에서 죽인 수많은 이들의 목숨은 어떻게 볼 것인가?)


이렇게 보면, 많은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참고) <삼국지> 위서(魏書) 순욱순유가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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