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양사학에서 중세 문벌귀족의 의의와 하내 사마씨 가문
동양사의 탐구에서 가문(家門) 더 구체적으로 문벌귀족 가문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다.
한국과 중국의 중세는 상당 부분 문벌 가문들의 시대로 정의되곤 한다.
중국사에서는 군주가 주권자이며 집권적 경향을 보이는 국(國)과 문벌 가문들로 구성되는 가(家)가 합쳐져서 국가(國家)를 이루었다.
그래서 한편으로 군주는 계속 귀족을 억누르려고 했고, 반대로 귀족들은 황제와 귀족의 공치(共治)라고 생각했다.
중국 문벌 가문의 역사에서 사마(司馬)씨 가문은 독보적 존재감을 자랑한다.
중국사를 통틀어 명목상 4대, 항렬상 3대에 걸쳐 정변에서부터 찬탈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을 걸쳐 도모해 성공한 경우는 전무하기 때문이다.
사마씨 가문의 본관은 하내(河內)군이다.
이 지역은 낙양 북쪽, 황하 북안에 위치한다.
‘하내’에서 강은 황하를 의미한다.
정확히 말하면 하내군의 온현(溫縣)이 사마씨의 본관이다.
참고로 하동군, 하내군, 하남군 등 삼하(三河) 낙양권은 황하 인근 지역으로서 사마씨만이 아니라 순씨, 양씨, 왕씨 등 다양한 중세 문벌 가문들의 본관이 밀집해 있었다.
하내군은 본래 춘추시대에 진(晉)에 속했다가 전국시대에 진이 분열되어 위(魏)에 속하였고, 초한쟁패기에 항우가 이 지역에 은(殷)을 두고 사마앙을 제후왕으로 임명했다.
(*참고로, <진서> 선제기에서는 사마의의 계통이 사마앙과도 연계되어 있다고 언급한다.)
한 고제 유방이 사마앙을 멸하고 하내군을 설치했다.
처음에 유방이 통일을 완수한 후, 군현제와 봉건제를 절충해 군국제(郡國制)를 실시하였는데 수도 장안과 그 주위에 군현을 두고 나머지 전체 지역에는 제후국을 두는 식이었다.
하내군은 낙양 주위 지역이긴 했지만 장안과 낙양이 멀지 않았고 유방이 본래 낙양을 수도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에 중시되는 지역이기도 했다.
하내군을 비롯한 삼하 등의 지역은 주에 속하지 않고 다시 말해 자사의 관할에 속하지 않고 사례교위의 관할에 속했다.
사례교위는 기본적으로 중앙 관직으로서 중앙 감찰과 장안 및 낙양 인근 관할을 담당했다.
그러니까 군국제 시행 때부터 황제의 직접 통제를 받는 군현제 시행 지역으로서 중시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한편 ‘사마’라는 씨명에 관하여, 대사마(大司馬)라는 관직명에서도 알 수 있지만 본래 ‘사마’란 고대 중국에서 군정이나 군마 등을 총괄하는 관직이었는데 이 관명을 씨(氏)로 삼아 사마씨가 성립했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같은 관명에서 여러 지역과 계통이 병렬적으로 형성된다. 다시 말해 동성(同姓)이지만 이계(異系)인 것이다.)
2. 삼국시대 2세대 인물로서, 그리고 사마씨 정권의 제2대 권신으로서 사마사의 의의
<삼국지> 2세대 인물들은 1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비록 <삼국지연의>에서도 나름 다루고 있음에도, 아무래도 삼국정립의 핵심이었던 군주들, 정치인들이 이 세대가 활동했을 때는 이미 모두 퇴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250년대에는 사마의와 손권(오 태조 대제)마저도 각각 251년, 252년에 사망하면서 정말 온전히 2세대로 교체가 이루어진다.
1세대가 남겨 놓고 간 무대에서 2세대가 어떤 활동을 했고, 그것이 결국 어떤 귀결로 이어졌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역사란 결국 몇 사람의 주인공의 이야기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군상극처럼 얽히고 다시 문화/제도/구조/국제관계 등 여러 거시적 차원과 긴밀히 결합해 흘러가는 거대한 시간적 서사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사마사 (司馬師, 208-255(향년 47세), 서진 세종 경제 *추증)는 아주 미묘한 인물이다.
사마사는 힘과 계략을 통해 사마씨 정권이 강제로 눌러앉은 후 버티는 과정을 주도한 인물이다.
사마사는 부친 사마의의 ‘불완전한 기틀’이라는 유산을 이어받았고 이는 축복이면서 동시에 약간은 저주이기도 했다.
그는 결국 이를 동생 사마소에게 넘길 때는 ‘완전한 기틀’로서 축복으로 만들었다.
3. 사마사의 개인적 면모
사마사는 사마의와 장춘화(선목황후 *추증)의 장남이다.
<진서>가 기본적으로 서진 건국 과정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미화의 측면이 크긴 하지만, 사마사의 행적을 고려해볼 때 적어도 ‘큰 계략을 지녔다’라고 하는 점은 뚜렷해 보인다.
사마의가 고평릉의 변을 일으키려고 할 때 가장 긴밀히 모의한 것이 사마사였고 사마소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사마소는 정변 전날 밤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재미있는 건, 정작 2010년 중국 드라마 <삼국>에서는 사마의가 정변을 일으키기 위해 모의한 건 사마소로 나온다.
정변 직전에 사마의가 멀쩡히 앉아 있는 것을 본 사마사가 놀라자 사마의가 그 둔함을 탓하듯 별안간 벌떡 일어서면서 ‘내 병은 이미 십수 년 전부터 있었다!’라고 소리친다.
실제로는 그 반대라는 것이다.
<진서>에서는 사마사를 두고 ‘풍채가 좋다’라는 칭찬도 함께 써 놓았는데 드라마는 이 점은 또 잘 표현했다.
그런데 바람직하지 않으나 자기도 모르게 드는 미묘한 편견 중에 체구가 무거운 사람의 경우 약간 영민하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 있다.
둔중(鈍重)과 같은 표현 자체가 약간 이러한 데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물론 당연하게도 신체적 민첩과 정신적 민첩은 다른 문제이다.
드라마를 보면 사마사는 둔중 그 자체로 묘사된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사마사는 풍채가 좋음과 동시에 고도로 영민했고, 외정에서 군략을 중심으로 활약한 아버지 사마의보다 중앙의 조정과 궁정에서 활동하며 내정에서 정략을 중심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더 보여준다.
(물론 후술하겠지만 군사적 식견도 있었다. 애초에 고평릉의 변 때 41세의 사마사는 이미 중호군으로서 군을 통솔하는 관직에 있었다.)
4. 사마사의 사마씨 정권 공고화 (1) : 이풍, 장집, 하후현 등의 숙청
고평릉의 변을 일으켜 위(魏)의 정권을 틀어쥔 사마의는 그 사건이 일어난 249년에 이미 70세였다.
2년 뒤인 251년 초에 왕릉의 난을 진압한 사마의가 8월에 사망하고, 사마사는 아직 안정화되지 않은 정권을 이어받았다.
사마사는 252년 정월에 대장군에 임명되고 시중을 겸하며 상서를 통제하면서 정권과 병권을 모두 장악했다.
253년 5월에 동오 태부 제갈각이 합비로 공격해 들어왔는데, 사마사가 지휘하는 위군은 이를 성공적으로 방어한다. (정확히는 합비 신성 전투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마사-제갈각 비교와 더불어 후술한다.)
다시 다음 해인 254년 정월에는 사마씨 정권이 출범한 지 5년 만에 정국을 뒤집어엎으려는 시도가 발각된다.
이풍, 장집 등이 사마사를 제거하고 하후현으로 하여금 보정을 대체하도록 하려고 모의한 것이다.
결정적인 문제는 천자인 조방이 여기에 참여했다는 점이었다.
사마사는 이미 이 모의를 은밀히 알아채고 있었다.
그래서 이풍을 불러들여 꾸짖기에 이른다.
이풍은 이미 자신에게 화가 닥쳤음을 알고는 지지 않고 맞섰다.
<위씨춘추>에 따르면, 이풍은 ‘경 부자는 간사함을 품고, 사직을 장차 넘어뜨리려는데, 내 힘이 못나 사로잡아 멸하지 못함이 아깝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사마사는 대노하여 이풍을 살해하도록 지시하였다.
나아가 하후현과 장집 등 관련자들을 모두 체포하고 삼족을 주멸했다.
장집은 황후 장씨의 아버지였다.
그래서 254년 3월에 사마사는 조방을 압박해 황후를 폐위했다.
한편 하후현은 하후상의 아들이었는데, 234년에 죽은 사마사의 부인 하후휘(경회황후 *추증)의 오빠였다.
하후현과 하후휘는 하후상과 덕양향주 조씨의 자식들이었는데, 덕양향주는 본래 진소의 딸로 태어났으나 진소 사후에 형제 조진과 함께 조조에게 거두어져 조씨가 되었다.
하후휘는 매우 영민했고 남편을 많이 도왔으나, 남편 사마사가 이미 야심을 품고 있었음을 어느 정도 눈치챘던 것으로 보인다.
최종적으로는 음독자살을 했지만 이는 사마사의 교사이거나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때 하후휘의 나이 23세였고 사마사의 나이 26세였다.
5. 사마사의 사마씨 정권 공고화 (2) : 조방의 폐위와 조모의 옹립
이풍 등의 사건으로 인해 사마사는 조방을 폐위할 결심을 했고, 은밀히 영녕궁의 태후 명원황후 곽씨에게 연락을 취하여 황제 폐위의 의사를 전한다.
254년 9월에 명원황후가 명을 내려 조방이 음란하다는 이유로 조방을 폐하도록 하였다.
사마사는 신료 회의를 소집하고 눈물을 흘리며 ‘태후의 명이 이와 같은데, 그대들은 왕실을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신료가 이구동성으로 이윤과 곽광의 예를 들며 찬성하자, 사마사가 ‘그대들의 기대가 이처럼 무거운데, 어찌 감히 파하겠는가?’라고 하며 신료를 데리고 조방의 폐위를 상주했다.
조방은 제왕으로 폐위 및 격하되어 떠났다.
사마사는 원신 등 조방의 측근이었던 환관과 광대 등을 모두 주살했다.
사마사는 새 황제 옹립 논의에서 조조(위 태조 무제 *추증)의 아들 팽성왕 조거를 추천했다.
그러나 명원황후는 조거가 조방의 숙부이어서 항렬이 높으므로, 조부-부-자로 이어지는 승계 원칙상 문제가 되어 조예(위 열조 명제)의 대가 끊기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조예의 조카가 되는 조모를 추천했다.
사마사는 계속 조거를 밀었으나 결국 태후의 명으로 조모를 옹립한다.
그런데 재위 초부터 조모가 계속 사마씨 가문과 신경전을 벌였거나, 아니면 사마씨 측 사관이 조모의 폐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계속 조모의 행동거지를 문제 삼았다.
조모가 옥새를 받을 때 몸가짐이 느슨하고 걸음걸이가 거만하다 하여 사마사가 걱정했고, 사마사가 조모를 훈계했다.
또 조모는 화려한 치장을 좋아해 사마사가 이에 대해서도 훈계했고, 이에 조모가 수용했다.
조방의 폐위로부터 사마사의 잦은 조모에 대한 훈계라는 부분까지의 흐름은 면밀히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진서>는 조방의 폐위와 조모의 옹립이 명원황후의 뜻에서 나왔다고 기록했으나, 이는 다소 석연찮다.
조방의 폐위는 좀 더 가시적으로 사마씨 정권에서 명원황후의 역할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조방의 폐위는 사마사의 뜻이었고, 눈물이니 하는 가식과 태후의 명이라는 승인 그리고 각종 행실이 음란하다는 조방에 대한 프레임, 그리고 그 자신을 이윤이나 곽광처럼 ‘사직을 위해 충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군주를 폐하는 재상’에 비유하는 이미지를 동원했다.
조모의 옹립 절차는 약간 더 복잡하다.
상식적으로는 조거를 옹립하는 것이 일리가 있을 수도 있었다.
기왕에 조방이 폐위되고 마땅히 옹립할 조예의 다른 자식도 없는 판국에, 더구나 아직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비상시가 상시라면 조거가 일리가 있다.
여기에는 ‘황제가 전권을 가지고 정상적으로 통치하는 것이 보장’된다는 전제가 있다.
조거와 조모를 놓고 볼 때, 만약 조거나 조모나 거기서 거기라 하더라도 조거는 어쨌건 더 연배가 있기도 하므로 만약 그 전제를 놓고 보면 조거를 옹립하는 게 상식적이다.
문제는 사마사의 입장에서 보면, 태후가 언급한 승계 원칙의 정당성 논란을 회피하면서도 13세에 불과했던 조모를 옹립해 자신이 여유 있게 계속 사실상 섭정을 하는 것이 제일 합리적인 선택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마사가 조거를 지지하며 조모를 지지한 명원황후와 ‘다투었다’라는 언급은, 결국 약속 대련에 가까웠을 가능성이 있다.
‘나는 조거를 지지했지만, 태후가 조모를 지지하였고 조예의 대통을 이으려면 조모가 맞다.’라고 말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든 것이다.
한편, 사마사가 조모를 계속 훈계했다는 점이나 조모의 부적절한 처신을 구태여 계속 언급하는 것도 사후적인 정무적 역사 정책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조모는 후일에 미필적 고의 비슷하게 사마소에 의해 살해당한 뒤에 사마소가 자신을 면책하기 위해 처음부터 황제의 자격이 없었던 것처럼 격하된다(고귀향공).
‘황제의 자격이 없었다’라는 점에 관하여 ‘이미 처음부터 싹수가 보였다’라고 기록을 하는데, 문제는 조모를 옹립한 장본인이 사마사 즉 사마씨 가문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조모를 살해한 행위로부터 면책되기 위해 조모를 격하하면, 그러한 자격 없는 군주를 옹립한 책임이 다시 사마씨 가문에게 돌아온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지만 역사적 프로파간다를 이용해 ‘본래 사마사는 조거를 옹호했는데 태후의 명으로 조모를 옹립한 것이고, 조모의 문제적 행실에 대해 사마사 때부터 계속 지적했다.’라고 정해 놓으면 사마씨 가문은 조모의 옹립과 살해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모두 면책될 수 있다.
여하튼 조모 옹립 후 사마사의 권력은 한층 더 강해져서, 그에게 식읍을 더하고 대도독의 칭호를 더하며 황월(황제의 도끼로서 황제의 권한을 상징한다.)을 빌려주고(이를 내린다는 것은 황명 없이 독자적으로 명을 내릴 수 있는 절대 권한을 부여한 셈이다.) 조정에 들어올 때 종종걸음을 하지 않아도 되고 상주할 때 이름을 부르지 않으며 검을 차고 신발을 신고 전각에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모두 소하가 받은 대우였고 부친 사마의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사마의와 마찬가지로 사마사도 상국에의 임명은 사양했다.
모든 것을 쥐되 명목상 모든 것을 쥔 것으로 확정되는 것만은 받지 않음으로써 책임이나 시선의 집중 등을 완화하는 것이다.
6. 사마사의 군재(軍才) 1 : 동흥 전투 (252년)
사마사가 지휘한 주요 전투는 252년 12월에 제갈각과 처음으로 맞붙은 동흥 전투, 253년 5월에 2차로 맞붙은 합비 전투 그리고 255년 정월에 수춘삼반의 일환으로서 발생한 관구검·문흠의 난이다.
250년에 동오에서는 태조 대제 손권이 노왕 손패에게 자결을 명하고 태자 손화를 폐위함으로써 241년부터 시작되어 10여 년을 끌며 동오의 정국을 혼탁하게 한 이궁의 쟁의 당사자들을 일단 제거했다.
2년 후인 252년에 손권은 70세를 일기로 사망하고, 250년에 손권이 태자로 봉한 9세의 손량이 즉위했다.
마지막에 손권은 손화의 복위를 고려하다가 손노반, 손준 등 손패파였던 이들이 그것을 반대하면서 동시에 손화파였던 제갈각을 보정으로 추천하여 이것이 관철된다.
손량 즉위 후 대장군이었던 제갈각은 태부로 임명되고 보정을 시작했다.
후에 합비신성 전투 부분까지 언급하겠지만, 제갈각은 지능과 자신감 그리고 자기확신만 있고 정작 시세나 사람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실패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제갈각은 일찍부터 영민했고 군사적 경험도 많았으며 손화파에서도 육손 다음가는 인물이었지만 권력 기반은 위태로운 측면이 있었다.
그래서 계속되는 내분을 외부로 돌리면서 자기의 권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그러한 첫 번째 시도가 동흥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는 위가 오에 패배했는데, 그러한 연유인지 <진서> 경제기에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동흥제는 제방인데, 소호(호수)에서 유수로 흘러가는 물을 막았다.
유수는 유수구에서 다시 장강(양쯔강, 양자강, 창장강)과 합쳐지고, 장강은 그 유역에 오의 수도인 건업(현재의 난징)이 위치해 있었다.
다시 말하면, 소호에서 유수로 내려오고 유수를 통해 장강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이론적으로는 건업으로 직결되는 것이었다.
장강은 오와 촉한의 입장에서 방어선이자 위-촉한-오의 국경이 되는 지정학적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또 황하 이남이면서 장강 이북에 있는 회수(회하) 유역의 수춘, 합비 등도 주요한 거점이었다.
그래서 조조-손권 때부터 지속적으로 위와 오는 유수구, 합비 등에서 격렬한 충돌을 반복했다.
230년에 손권이 동흥제를 건설하도록 했는데, 소호가 유수로 이어지는 수로를 막아 수군 운용 범위를 넓히는 등의 이점을 얻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유수구의 유수오나 소호에 주둔한 수군이 퇴각하거나 지원 요청을 할 수 있는 길도 끊기는 셈이었다.
만약 이 방면의 전선에서 전반적으로 오가 우위를 점하는 경우 퇴각이나 지원 요청 문제를 크게 생각할 필요가 없고 수군 운용 범위가 넓어지는 이점만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가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경우 오히려 손해가 더 커질 수 있었고, 실제로 위의 등애가 양주 방면으로 운하를 건설하여 위 측에서 장강과 회수를 연결하면서 합비의 농업을 증진했고 결국 오의 입장에선 동흥제는 익보다 손이 더 커지게 되었다.
이에 손권은 최종적으로 동흥제를 방치하고 다시 수리하지 못하도록 명했다.
252년 10월에 제갈각은 동흥제를 재건하도록 하면서 두 개의 성을 축조하도록 하고, 각 성에 1,000여 명의 병사만 남겨두고 퇴각했다.
허점을 보여 위로 하여금 일부러 치도록 도발한 것이다.
처음에 위 조정의 상서 부하는 사마사에게 어차피 제갈각은 손권을 잃은 후 어수선한 내부를 결집하기 위해 개전하려는 것이니, 그 도발에 넘어가지 말고 수성전으로 나아가 기회를 노리다가 쳐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사마사는 이 전략을 수용하지 않았는데, 일단 자기 힘으로 거기까지 올라갔으며 황제의 고명을 받은 제갈각과 달리 사마사는 사마의가 정변으로 얻은 불안정한 권력을 ‘이어받은’ 입장이었다.
사마사는 무언가 보여줄 필요가 있었고, 결국 군사적 대응을 결정한다.
사마사가 파견한 호준과 제갈탄은 제갈각이 축조한 두 성을 공격했으나 지형적 난점으로 함락에 실패했다.
두 사람은 제방 위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처음에 오의 장수들은 만약 제갈각이 간다는 소식이 들리면 위군이 알아서 철수할 거라고 말했으나 정봉만이 제대로 공격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12월로 들어서자 호준이 방심하고 술과 연회를 베풀었는데, 그동안에 정봉의 주도로 오군은 복장이나 무장을 가볍게 하고 그 제방을 올라가 방심한 위군을 대파했다.
사마사는 패배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자신과 감군을 맡은 사마소만 작위를 깎았다.
(계속)
참고) <진서> 경제문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