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신평전 3. 사마사 司馬師 (2)

by 남재준

7. 사마사의 군재 2 : 합비 전투 (253년)


자신의 입지와 권위를 더욱 강고하게 다진 제갈각은 자신감을 얻었다.


252년 12월에 동흥 전투에서 승리한 후 다음 해 5월에 군사를 일으켜 위를 치고자 했다.


제갈각은 촉의 강유에게 사람을 보내 오와 촉이 동시에 위를 치자고 권했고, 강유는 이를 수락했다.


아직 동흥 전투 승리 후 반년 남짓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또다시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니, 오의 대신들은 무리라며 반대했다.


제갈각은 강경하게 반대하는 장연을 억지로 끌고 나가게 하는 등 이를 무시했다.


또 글을 내려 유시하게 했는데,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1. 세상에 두 패자(霸者)는 있을 수 없다. 왕이 된 자가 천하를 모두 자기 발아래 두려고 하지 않고 현상 유지만 한 채로 후세에 남기려 한 일은 고금을 통틀어 없다.

e.g.1 옛날에 전국칠웅 중 여섯은 자신의 땅과 군사 그리고 서로와의 동맹을 믿었으나 결국 진(秦)이 점점 강해지도록 방관하여 자기들 스스로가 망하게 하였다.

e.g.2 수십 년 전 유표는 형주의 군사 10만을 가졌고 조조보다 세가 컸음에도 조조가 원씨 가문을 멸하는 것을 그저 방관하다가 조조의 30만 군사를 맞았고 유표의 아들들은 항복했다.

2. 적대하는 국가들이 서로를 멸하려는 것은 원수가 서로를 제거하려는 것과 같다. 그러니 그저 힘을 축적하자고만 하면 화를 후세에 떠넘기는 것이다. 적대국을 멸하는 것은 멀리 생각하여 나온 결론일 수밖에 없다.

3. 현재의 위(魏)를 과거의 진(秦)과 비교하면 토지가 배가 되는데 오와 촉을 합쳐 전국시대의 육국과 비교한다면 절반도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위를 대적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미 조조 시대의 군사들이 힘이 다하였고 이후에 출생한 자는 성장하지 않아 약해진 상황이기 때문이다. 사마의가 죽고 그 아들이 어리고 약한데 권력을 독점하니 인재가 있어도 쓸 줄 모를 것이다. 그러니 지금 쳐야 한다.

4. 대략 10년이 지나면 위의 백성들은 틀림없이 현재의 배가 될 것이고, 우리나라의 강인한 병사가 주둔한 곳은 모두 공허하여 그자들이 대사를 정함을 구경만 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 병사들을 사용하지 않고 그저 늙게 하여 10여 년이 지나면 절반으로 감소할 것이고 그들의 자제의 수는 부족할 것이다.


제갈각이 내세운 논지의 문제점은 한 마디로 큰 의논만을 좋아하고 그것의 실현에 관한 작은 의논을 등한시한다는 것이었다.


오 내부에서도 제갈각과 장기적 인식 자체는 함께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을 치려면 그 전제에 최소한 자신이 쳤을 때 성할 수 있어야 할 만큼의 힘이 충분하다는 점이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찌른 사람이 도리어 당하듯이, 만용의 결과 자멸을 택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비전과 거시적 정세 판단은 반드시 중범위와 미시적 차원의 전략과 수단이 중요하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는 말이 있듯이, 큰 의논의 결론에 가 닿으려면 작은 의논에서의 구체적인 방략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제갈각은 작은 의논을 큰 의논으로 확대해 그냥 지키기만 하는 것은 안일하다고 하나, 반대로 큰 의논을 작은 의논으로 바로 적용해 쳐야 한다고 하는 것은 불합리이고 만용이다.


천하가 아직 통일되지 않아 상시 전시 상태이어서 백성의 피로가 크다.


한 번 전투를 했다면 가능한 한 얼마 간은 백성과 국가에 숨 돌릴 틈을 주어야 한다.


아무리 뜻이 높아도 조건이 닿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망한다.


오가 위보다 기본적인 환경이 쉽지 않은데, 그렇다면 위를 치더라도 오의 입장에선 더 힘을 잘 써야 한다.


먼저 치지 않으면 결국 당한다는 논리로만 일관하여 무리하게 동원을 지속하면 밖이 아닌 안으로부터 무너진다.


사마사에 대한 평가도 과하게 단정적인 과소평가다.


사마사가 아직 기반이 덜 단단하긴 해도 위를 유지할 만큼은 영민하다.


무엇보다 사마사가 어리고 약해 인재를 등용하지 못한다면, 위의 인구가 늘어도 그것을 제대로 집약하고 동원할 역량이 그다지 없다는 의미이다.


제갈각의 판단으로 사마사가 그렇게 역량이 없다면, 앞으로는 갑자기 알아서 커진다는 것인가?


또 위의 인구가 반드시 증가하기만 할 거라는 단정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먼 우환은 보고 가까운 우환을 보지 못하면 먼 우환을 막으려다 가까운 우환을 맞는다.


성급하게 천하통일을 이루려다 오가 먼저 멸망하는 것이다.


크게 보면 천하통일은 추진해야 오가 망하지 않지만 작게 보면 오가 망하지 않아야 천하통일도 할 수가 있다.


게다가 제갈각은 끄트머리에 사실상 자신을 소하와 곽광에 비견해 자기를 서둘러 쓰지 않으면 너무 늦을 거라는 식으로 말했다.


달리 말하면 자기에게 오의 국운이 달렸다는 식이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제갈각에게 희망을 걸기는 했겠지만, 그렇다고 집정이 되어 유시하는 글에 이렇게 대놓고 자기의 재능을 잘난 척하는 것은 정적들을 비롯해 사람들의 신경을 긁기에 딱 좋았다.


제갈각은 결국 후일에 이러한 오만의 대가를 치러 자신을 추천하는 데 참여한 손준에 의하여 살해당한다.


섭우, 등윤 등 제갈각의 동료나 대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갈각은 사실상 총동원령을 내려 20만 대군을 일으켰다.


처음에 오의 진영 내부에서는 회수 유역의 백성들이 모두 도주했을 것이므로, 모든 거점을 점령하려다 보면 자원이 낭비되니 핵심 거점인 합비의 신성(新城)을 집중 공격하면서 이를 구원하러 오는 위군을 격파하자는 전략이 나왔다.


합비는 지난번 동흥 전투의 주요 무대였던 소호와 그와 연계된 유수로부터 북서쪽 가까이에 있었는데, 오로서는 위로 깊숙이 침공해 들어간 것이었다.


제갈각이 대군을 몰아왔고 합비가 주요 거점이기 때문에 위의 입장에서는 오가 합비를 점령하고 나아가 회수 유역이나 북동쪽의 서주까지 들이쳐 올 염려가 컸다.


또 촉한 측에서 강유도 응하여 군대를 이끌고 나온 상황이기도 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위의 시선이 오 방면에 집중된 틈을 타서 북쪽으로 진출할 기회를 노린 것이었다.


동흥 전투에서 패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내부 사정이 어수선했으므로 사마사 정권으로서는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사마사는 숙부인 태위 사마부(사마의의 1년 아래 동생)에게 20만 대군을 인솔하여 서둘러 가도록 했다.


위 조정에서는 제갈각이 회수와 사수 방면까지 진출할까 염려하면서 수구마다 방어 병력을 두자고 하였다.


사마사는 이번에는 부하의 정세 인식을 그대로 같이하면서, 제갈각은 아마도 병력을 합쳐 합비를 공격해 요행을 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수구는 여러 개이므로 모든 수구에 병력을 두는 건 낭비이고 그렇다고 적게 두면 적을 막기에 부족하다는 점도 덧붙였다.


사마사가 우송에게도 제장들의 의지가 저하되어 있다는 점을 언급하며 계책을 물으니, 우송은 제갈각이 일격으로 성을 취하기를 바라는 요행을 노리니 지구전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또 강유가 진격해 온 것은 군량을 많이 조달해오지 않는 등 진지하게 나온 것이 아니고 단지 기회를 노린 것이므로, 촉이 방심한 상황을 역이용해 빠르게 군대를 보내는 경우 금방 물러가게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제갈각은 사마사의 예상대로 합비에 총공세를 퍼부었는데, 장특이 이끄는 성내의 3,000명은 20만 대군을 상대해야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힘이 다했을 때조차 방심한 제갈각에게 항복하겠다고 속인 후 재정비한 후에 다시 공격하는 전법까지 동원하면서 완강하게 버텼다.


처음에 지원군을 이끄는 관구검과 문흠은 대적을 청했는데, 사마사는 구체적인 전략 면에서도 부하의 그것을 취하여 신성은 방어에 유리하므로 높은 보루를 쌓아 지구전으로 상대하라고 명했다.


결국 제갈각이 대강 3개월간 신성에 맹공을 퍼부었음에도 성과가 없었고, 퇴각하는 제갈각을 사마사가 관구검과 문흠에게 사전에 퇴로를 차단하도록 명하여 쳐서 승리했다.


제갈각의 퇴각이 지체된 것은 행정 혼선으로 조서가 수차 오가면서 빚어진 측면이 있었는데, 제갈각은 귀환한 후 이러한 책임을 물으며 대대적으로 인사를 단행했다.


하지만 패배의 책임에 대한 인정보다 이런 식으로 오로지 자신의 책임으로 일으킨 일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는 것으로 연막을 하려는 듯한 제갈각의 태도는 공분을 샀다.


253년 8월에 제갈각이 건업으로 귀환했는데, 그는 불과 2개월 만인 10월에 손준에 의해 연회로 유인당하여 살해된다.


8. 관구검과 문흠의 난 (255년)


2년 뒤인 255년 정월에 관구검과 문흠이 반란을 일으켰다.


관구검은 사마사에 의하여 주살된 이풍, 하후현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문흠은 이전의 집정이었던 조상과 동향인이었고 교만하다는 평이 많았음에도 능력이 있어서였는지 사마씨 정권에 들어와서도 계속 중용되었는데, 결국 불안을 이기지 못했던 모양이다.


두 사람은 수춘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는 왕릉의 난에 이어 수춘 기반으로 이루어진 사마씨 정권에 대한 두 번째 도전이었다.

*수춘삼반 壽春三叛. 세 난은 사마씨의 세 집정 때 차례로 일어났다. 사마의 – 왕릉의 난 (251년) / 사마사 – 관구검과 문흠의 난 (255년) / 사마소 – 제갈탄의 난 (257년).


조정에서는 여러 장수를 파견하자고 하였으나, 종회 등의 권유로 사마사는 보병과 기병 10만을 통솔하여 친정한다.


아무래도 관구검과 문흠이 그간 전선에서 많이 활약했던 장수들이기도 하고, 합비 전투의 승리에 이어 사마사가 친정하여 토벌해 권위를 보다 확고히 굳힐 수 있는 기회였다.


관구검과 문흠은 성으로 들어가 농성하였고, 사마사는 관구검을 군사적으로 압박하도록 지시하면서 동시에 성채와 보루를 쌓도록 했다.


제장이 진군하여 공성을 청하였지만, 사마사가 말하기를 ‘회남의 군사들은 본래 반역의 뜻이 없다. 관구검과 문흠은 소진, 장의 등 종횡가의 사상에 따라 오에서 반드시 호응이 있을 것이라 여겼다(수춘은 오와의 국경 근처이다). 그런데 상황이 따라주지 않으니, 궁지에 몰린 짐승이 싸우고자 하는 것과 같은 형세이다. 지금 속전하면 적들이 원하는 바를 따라주는 것이다. 이긴다고 해도 사상자가 많을 것이다. 그들은 계책을 잘 써서 변화무쌍하니 잠시 지구전을 하면 허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 이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전면전을 펼치지 않고, 제갈탄과 등애 등이 퇴로를 끊거나 반란군을 유인하는 등의 작전을 펼쳤다.


문흠의 18세 된 아들인 문앙은 군재가 있었는데, 계속 전투가 지체되는 상황에서 문앙의 제의로 북소리에 따라 대대적으로 진격하여 진압군의 진을 깨고자 하였다.


하지만 문흠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사마사는 재빨리 정예군을 출동시켜 문흠을 추격토록 하였다.


문앙은 문흠에게 먼저 적의 기세를 꺾어야만 도주할 수 있다고 하면서, 최정예 기병 10여 인과 함께 위군을 돌파해 나갔다.


사마사는 일단 군을 물린 후 측면에서 문흠을 추격토록 하였고 최종적으로 문흠의 진을 붕괴시켰다.


문흠은 최종적으로 오로 투항하고, 관구검은 도주하던 중 안풍진의 도위에게 참수된다.


9. 사마사의 최후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때 사마사는 이미 안질(眼疾)이 깊어져 있었다.


눈 근처에 종기가 나는 지병이 있었는데, 관구검-문흠의 난 진압 과정에서 문앙의 활약 등을 지켜보며 스트레스와 피로가 심했는지 지병이 도졌다.


경제기에서는 사마사가 ‘문앙이 공격해 올 때 놀라서 눈이 튀어나왔다’라고 다소 우스꽝스럽게 언급한다.


사마사는 매우 고통스러웠는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통증이 극심해 이불을 물어뜯으며 버텼다.


그러나 군중이 동요할까 이를 알리지 않아 주위에선 알지 못했다.


처음에 고평릉의 변이 발생했을 때, 조상에게 파견되어 사마의가 그의 권한만 거두고 목숨은 빼앗지 않을 거라고 유세하도록 한 윤대목은 사마의가 자기의 말을 깨고 조상을 죽이자 그 원수를 갚으려고 사마사의 부하가 되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미 사마사가 죽을 지경인 것을 알고 윤대목은 사마사에게 문흠에게 투항을 설득해 보겠다며 자청했다.


실제로는 전세가 불리해진 상황에 처한 문흠에게 조금만 더 버티면 사마사가 죽을 것이니 활로가 트일 거라고 말해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문흠은 윤대목을 꾸짖으며 ‘너는 선제(조방)의 가신(윤대목은 본래 조방의 시종 출신이었다)이었으면서도 보은할 생각은 않고 사마사의 반역에 동조했으니, 하늘이 두렵지 않으냐? 하늘이 네게 복을 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활을 쏘아 윤대목을 죽이려 하니 윤대목이 울며 ‘일은 이제 패망하였으니, 최선을 다해 노력하셔야 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근세에 이르러서까지도 종기에는 뚜렷한 약이 없었다.


고름이 차면 딸 따름이었으나, 그것이 너무 크면 결국 쇼크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사마사는 결국 더 버티지 못하고 사마소로 하여금 제군을 통솔하게 한 후 허창에서 사망한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조정에서는 곽광의 예를 따라 대사마를 사망 시의 대장군에 더하였다.


10. 사관의 평(評)과 분석


사관이 평하기를, 사마사는 ‘예리한 지략으로 기틀을 세웠다’라고 하였다.


동시에 그가 정권을 이어받았으나 ‘권력이 아직 나뉘지 않았다’라고도 하였다.


다시 말해, 사마사는 아직 기틀이 잡히지 않은 채 막 잡은 ‘싱싱한’ 권력을 이어받은 셈이었다.


아직 파닥거리는 물고기의 목숨을 끊지 않으면 그것은 금방 다시 물속으로 뛰어들려고 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사마의는 정변으로 집권하자마자 사망하고 아직 안정화되지 않은 정권을 사마사에게 넘겨주었다.


사마사는 일정 부분 사마의가 했어야 할 역할을 한 셈이었다.


누군가에게서 빼앗은 권력은 누군가에게 다시 빼앗길 수 있었다.


또 오늘의 아군이 내일의 적군이 될 수도 있었다.


이러한 판세 속에 대외적으로 촉과 오가 위의 허점을 노리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정권을 공고화해야 했다.


하후현 보정 교체 모의, 관구검-문흠의 난 토벌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 사마사는 내외로 계속되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정권 사수에 성공했다.


그러나 사마사 시대에는 후의 사마소 시대의 촉 멸망이나 진왕 즉위처럼 뚜렷한 공업이나 공고화를 이룰 조건이 되지 못했다.


분업을 내용으로 하는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 홀로 정권과 국가를 떠받친 것이다.


사마씨 정권은 사마사 시기에는 사실상 사마사라는 권신 개인에 의해 지탱되었다.


사마사가 성공적으로 촉과 오를 방어하고 내부를 진압하여 정권을 동생 사마소에게 물리니, 사마소는 촉한을 멸망시키고 찬탈 직전까지 가 닿는 데 성공한다.


11. 여담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은 사마씨 왕조 정확히는 사마의의 동생이자 합비 신성 전투 때 20만 대군을 이끌고 신성을 구원하러 떠났던 사마부의 후손이었다.


그는 「자치통감 資治通鑑」을 저술하면서 사마사와 관련된 「진서 晉書」 경제기의 기록에 대해 비판적 보정을 가하였다.


234년에 사마사의 부인 하후휘를 사마사가 음독으로 죽였다는 의혹에 대해, 사마광은 당시에 사마의가 방금 조예의 신임을 얻었고 불충(不忠)의 신호도 없었기에 마찬가지로 그의 아들들이 불충할 이유도 없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사마광은 그 부분을 자치통감에 싣지 않았다.


하지만 꼭 그렇게 단정할 수 있을까?


불충의 신호가 없었다는 점과 불충의 행동이 있었다는 점은 별개로 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불충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면 오히려 불충의 신호를 보이지 않고 불충의 행동을 할 개연성을 높게 보는 게 그 반대보다 타당한 설명 같다.


그렇다고 해서 사마광이 사마씨 왕조의 찬탈 과정을 정당화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마광은 사마씨 왕조의 후손이긴 했지만, 유자(儒者)로서 명분 없는 찬탈에 대해서는 공정한 입장을 취했다.


다시 말해, 고평릉의 변이 기본적으로 구국의 결단이라기보다 찬탈로의 가도 개막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그런데 사마의는 그 한참 전부터도 불충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사마의는 처음 조조의 막하로 들어갈 때부터 내키지 않아 했고, 출사의 명을 계속 거부했는데 그 이유가 ‘조씨를 섬기고 싶지 않아서’였다


또 이전에 언급했듯, 사마의가 고평릉의 변을 일으킨 249년에 그는 70세였는데 일찍부터 불충의 마음을 품지 않았다면 굳이 이 나이에 정변을 일으킬 이유가 없어 보인다.


전근대에는 평시의 군주라 해도 장수를 장담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삼국시대는 비상시가 상시였다.


당장 조예가 불과 35세에 사망했고, 조비도 39세에 사망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도 사마의가 뒤늦게 불충의 마음을 먹었다면, 약간 개연성의 문제가 있어 보인다.


물론 사마광은 사마의가 불충의 신호를 보이지 않았고 조예의 신임을 방금 얻은 상황이었다고만 했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사마의와 그 아들들이 불충의 신호를 보이지 않았다고 해도 그들에게 일찍부터 불충의 마음이 있었다면 그들이 불충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바로 도출하기 어렵다고 본다.


하후휘는 총명했지만, 그 때문에 더 위험했다.


하후휘는 위 건국의 핵심이었던 조씨 가문과 하후씨 가문의 계통을 그대로 이어받았는데, 남편을 도운 그녀가 만약 나중에 정보를 빼돌리거나 하는 식으로 사마씨 가문에 저해되는 일을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또 하후휘는 아직 가임기였는데 사마사와의 사이에 아들을 낳는 경우, 사마씨 가문을 이을 장손이 될 그 아들에 대해 하후휘가 끼칠 영향 나아가 하후씨 가문이나 조씨 가문이 끼칠 영향은 어떠하겠는가?


다행히도(?) 사마사는 딸만 다섯을 두고 후처였던 경헌황후 양휘유와의 사이에서도 아들이 없어 사마소의 차남 사마유가 그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양자로 입적되었다.


사마사는 후에 집권하고 나서 처남인 하후현을 가차 없이 죽였다.


그 시대는 고대와 중세의 사이 어딘가에 있었던 시절이고 앞서 언급했듯 군주나 귀족도 2-30대에 죽을 수 있으니, 정황 설명만 그럴듯하게 할 수 있다면 하후휘를 죽였다 해도 넘어갈 수 있었다.


물론 그래도 아주 오래 사는 사람들도 있었고 특히 상층에는 그런 경우들이 더 많이 있었을 것인 데다 출산 등의 경우가 아니면 대외 업무에서 받는 스트레스 등에서는 비교적 거리를 두고 있는 여성이었긴 했다.


그러니 하후휘가 죽은 나이는 하후휘를 사마사가 죽였다는 주장을 약화하는 논거가 될 가능성이 상당하기는 하다.


다만 사마사가 죽이지 않았다고 단정하기에는 사마광의 근거는 다소 생각할 점이 있다.


사마광은 경제기에서 사마의가 고평릉의 변을 사마사와만 의논했다는 설을 부정하며, 두 형제와 모두 함께 논의했을 것이라 하였다.


이 점은 사마광이 맞을 듯하다.


사마소가 정말 그렇게 담이 작기만 하고 다소 무능했다면, 이어받은 것이긴 하지만 10년간 정권을 유지하면서 촉한을 멸망시키고 무엇보다 황제를 죽이고도 무사하기만 하긴 어려웠을 것 같다.


다만 사마소도 고평릉의 변 모의에 참여했겠지만, 사마사가 장남이자 젊은이로서 좀 더 사마의와 긴밀하게 논의하면서 주도적으로 정변을 지휘했을 수 있다.


사마사의 일대기를 보다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사관들이 이를 과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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