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신평전 4. 사마소 司馬昭 (2)

by 남재준

4. 권신이 황제를 시해하다 (260년)


조모는 본래부터 사마씨 가문의 허수아비로 그냥 만만하게 앉아있을 황제가 아니었다.


그는 자질을 갖춘 이였고 ‘정신이 맑고 영특’하다는 평을 들었다.


즉위할 때 불과 13세였는데도 예의를 갖추어 남다른 면모를 보였다.


즉위하기 전이고 황태후의 명을 받드는 입장이라고 밝히며 신하들에게 맞절을 하고 수레를 타지 않고 명원황후를 알현하러 갔다.


또 즉위한 후 아직 약관에도 이르지 않은 어린 황제는 황제의 수레와 옷, 후궁의 비용을 줄이는 등 근검절약에 나서고 부지런히 강론에 나가 자신의 재능을 드러냈다.


어쩌면 사마사는 조모를 옹립한 직후에 이미 뭔가 아차 싶었을지도 모른다.


해석하기에 따라 다르겠으나, 「위씨춘추」의 기록을 보면 조모에 대한 평가를 한 사마사와 종회의 대화의 행간은 다소 의미심장하다.


사마사가 종회에게 개인적으로 다음과 같이 물었다.


‘주상이 어떠한가?’


이에 종회가 답하기를 ‘문재(文才)는 진사왕(조식)과 같고 무재(武才)는 태조(조조)와 비슷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사마사가 답하기를 ‘경의 말과 같다. 사직의 복이구나.’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말을 하는 사마사의 표정은 밝지 못했을 것이고, 사마씨 정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던 종회 역시도 조모의 자질이 범상치 않음을 눈치챘을 것이며 이를 전제하고 조모를 조식과 조조에 비한 것이었을 테다.


이미 사마씨 가문이 권신화된 상황에서 ‘위의 사직이 바로 세워'지면, 그날로 사마씨 가문의 운명은 경각에 달리는 것이었다.


사마씨 정권의 입장은 옛날 전한의 곽씨 가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곽광 사후 멸문지화를 당한 곽씨 가문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유일한 길은 찬탈을 향해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조모라는 군주의 존재는 허수아비 황제를 원했던 사마사-사마소 형제의 입장에서는 그 군주의 옹립이 자승자박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상당해졌음을 시사했다.


지난 편들에서 언급했듯, 조모는 사마사-사마소 형제와 미묘한 신경전을 이어갔던 것으로 짐작된다.


사마사가 황제를 ‘훈계’했다고 한 점은, 기본적으로 조모를 시해한 후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사후적 부풀리기이겠지만 무언가 갈등이 있을 수도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을 그대로 쓰는 경우 사마씨 가문이 군주를 업신여겼다는 점을 실토하는 꼴이 되니 난감했을 것 같다.


본래 위(魏)가 군이었을 때의 중심지였던 업(鄴)은 태초에 조조가 창업하면서 중시했던 곳인데, 이 업현의 우물에서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이 나왔다.


용은 군주의 덕을 상징하며 올라가 하늘에 안주하고 내려와 밭에 안주하며 자주 우물 속에 숨어 있는 것이니 길조가 아니겠느냐는 해석이 따라붙었다.


조모는 이를 두고 ‘잠룡(潛龍)’이라는 시를 지었다고 하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결국 사마씨 가문에 가려져 자신의 뜻과 재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현실을 두고 창작한 것이었다.


사마소는 이 글을 읽고 불쾌하게 생각했다고 전해진다.


또 우송이라는 사람이 조모가 소강(少康)의 아름다움을 칭찬하고 숭상한 것을 두고 윤음을 책으로 내자고 했는데, 조모는 겸손하게도 자신의 학문이 부족하고 소견이 어두우니 책으로 낼 만한 것이 못 된다고 반려했다.


그런데 소강은 전설 속 중국 최초의 국가로 여겨지는 하(夏)의 군주로서, 찬탈자들로부터 국권을 되찾은 중흥의 대업을 이뤄낸 이였다.


조모가 소강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앞의 <잠룡>과 마찬가지로 그가 언젠가 사마씨 정권을 넘어서 친정을 하겠다는 의지를 거의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거나 하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삼국지」 위서 삼소제기에서는 종회가 이 일을 기록했다고 하는데, 앞서 사마사와의 대화와 비슷한 맥락에서 종회는 계속 조모의 동태를 사마사-사마소 형제에게 보고했던 것 같다.


아마 사마소는 <잠룡> 사건과 마찬가지로 또다시 ‘주제도 모르고 까부는 어린아이’를 가소롭다고 생각하면서도 두려워하고 또 진노했을 가능성이 상당하다.


조모는 재능이 뛰어나긴 했지만, 혈기(血氣)로부터의 만용이 과하게 앞섰던 것 같다.


힘이 없는데 재능만 있는 자는 권력의 생리상 제거의 표적이 되기 쉬울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자가 허수아비 황제라면, 권신의 입장에선 자신과 가문의 보신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그를 제거하려고 들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 놓인 황제의 정답은, 아주 오래전 전한 중종 선제 유순이 그랬듯이 자신의 본의를 깊이 감추고 아주 조금씩, 서서히 드러내 보이면서 황권을 점진적으로 강화하는 길 뿐이었다.


이변이 없는 한, 원칙과 명분은 종래의 황실에 있는 법이니까.


권력만 있으면 명분은 따라올 것 같지만, 예컨대 후한의 명분은 생각보다 오래 유지되었다.


수백 년에 걸친 정통성을 몇십 년에 순연하게 1대 만에 받아들기는 어려웠다.


동탁이나 원술 등을 반면교사로 삼았는지, 결국 조조는 온전한 찬탈을 포기했고 사마씨 가문도 결국엔 대를 이어 서서히 하나씩 찬탈의 단계 내지 절차를 밟아나갔다.


그러나 조모는 기어이 사마소를 죽일 결심을 했을 때 이미 사마씨 가문의 잠재적 표적이 된 상태였다.


게다가 ‘사마소의 제위 찬탈 야심은 길 가는 사람들도 아는 바이다’라며 사마소를 ‘토벌’할 의지를 고백했을 때 그 말을 들은 왕씨 가문의 측근 셋 중 둘은 이를 사마씨 가문에 고해 바쳤다.


황궁과 조정과 군대의 모든 통제권이 전부 사마씨 가문 정확히는 그 시점엔 사마소에게 있었고 조모는 공공연하게 언젠가 자신이 사마씨를 거꾸러뜨릴 거라는 의지를 표명하고 다닌 것도 모자라 아예 ‘한 판 뒤집기’라는 목숨이 걸린 승부수를 아무렇지 않게 털어놔 밀고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이후의 전개는 익히 알려진 바대로였다.


성제가 군대를 이끌고 가충의 지휘하에 남쪽 궁문에서 조모가 탄 수레를 옹위하는 수백 명과 맞서 싸웠고, 성제가 가충에게 어떻게 할지를 물으니 가충이 ‘사마소 공이 그대들을 키운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해서이다. 오늘의 일은 물을 것도 없다!’라고 했고 성제가 곧바로 수레 위의 조모를 찔러 관통상으로 죽였다.


일국의 황제가 이렇게 공공연하게 잔혹한 최후를 맞이한 전례는 거의 없었다.


슬프게도 청년 황제는 불과 18세의 나이에 사망했는데, 그 나이에 ‘일은 결정되었소! 정작 죽는다 하더라도 무엇이 한스럽겠소? 하물며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것도 아닌데.’라고 하였다.


머리가 비상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은 자존심도 강한 법이다.


더는 허수아비 노릇을 참아줄 수 없었던 것 같지만, 세상은 이미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것이 아닌 사람’을 황제로 보고 있지는 않았다는 점이 현실이었다.


사마소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천하 사람들이 나를 뭐라 하겠는가!’라고 하였고, 태부 사마부는 달려가서 조모의 시신을 자신의 넓적다리에 베게 하고 곡을 하며 ‘폐하를 살해한 것은 신의 죄입니다.’라고 하였다.


「한진춘추」에서는 조모가 낙양으로부터 서북쪽으로 1.2km 정도 되는 낙수의 지류에 매장되었다고 전하면서, ‘볼품없는 수레가 몇 대 따랐고, 관에 선행하는 깃발도 없었다. 사람들은 모여들어 이것을 보고는 ’이분은 이전에 살해된 천자다.‘라고 하고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으며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자도 있었다.’라고 적었다.


진수는 조모를 두고 ‘사람됨이 경솔하고 분노에 차면 함부로 행동하여 끝내는 스스로 큰 재난 속으로 빠져들었다.’라고 평했다.


아무도 조모의 상을 두고 상복을 입거나 곡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진군의 아들 진태만이 의연하게 애도의 거조를 보였다.


이전에 언급했듯, 사마소가 진태에게 일의 처리를 묻자 진태는 가충을 요참(허리를 베어 죽이는 형벌)하라고 말했지만 최측근을 그리 할 수 없어 사마소가 난색을 표했다.


진태는 ‘그 위만 보일 뿐, 그 다음은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사마소의 면전에 대고 ‘그러면 당신이 책임질 테냐.’라고 따져 물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성제의 삼족을 주멸했는데, 성제는 반성의 기색 없이 웃통을 벗고 지붕에 올라가 거만하게 유언을 내뱉다가 아래에서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위씨춘추」에서는 적고 있다.


이윽고 사마소는 위의 마지막 황제인 조환(원제)을 옹립했는데 환부인 소생인 조조의 아들 조우의 아들 즉 조조의 손자였다.


5. 촉한을 멸망시키다 (263년)


제갈탄의 난 이래 6년간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는데, 사마소는 남진하여 아예 완전히 촉한을 수중에 넣을 계획을 세웠다.


오는 강과 호수를, 촉은 산과 지형을 방패 삼아 오랜 세월 위의 남진을 막은 상태였다.


사마소는 오를 치는 것보다는 촉을 치는 게 오히려 난이도가 상대적으로 낮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선 촉을 취하고, 촉의 수로를 통해 오로 동진하자는 대전략을 결정했다.


다년간 촉 방면에서 강유를 상대해 온 등애는 이 전략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표했지만, 사마소는 사람을 보내 등애를 설득하게 하면서까지 계획을 강행한다.


한편 이즈음 강유는 수세에 몰려 있었다.


강유도 제갈량이나 제갈각처럼 ‘당하기 전에 먼저 쳐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북벌을 계속 추진해 왔으나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무엇보다 촉한의 내부가 심각하게 약화하고 있었다.


강유는 제갈량이나 비의 등과 달리 내정과 외정을 포괄하여 통제하지 못했고, 강유가 대부분의 시간을 전선에서 보내는 동안 그의 정치적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그래서 그는 좀 더 창의적인 전략을 내면서 동시에 성도 정계로부터 벗어나 위협을 피하기로 했다.


유비의 입촉 이래 수십 년간 촉한은 적은 인구와 물자 등을 험준한 지세나 인재 등을 통해 상쇄하고 보충하면서 국가를 유지해왔다.


특히 입촉의 거점인 한중을 중심으로 위를 방어해왔다.


한중을 점령당하면 사천 분지가 그대로 위에게 노출되는 형국이었지만, 그곳에 병력을 집중시키면 북진에 있어서는 제한적인 효과를 낼 수밖에 없었다.


지난 수십 년간 한중을 지키면서 북벌을 도모한다는 촉의 기본 전략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강유는 한중 서북쪽의 위-촉 국경 지대인 답중에 주둔하면서 그곳에 둔전을 설치해 자급자족하고 청야작전 비스무리하게 한중을 비우고 한성과 낙성에 군을 집중시켜 한 번에 위를 섬멸하면서 동시에 답중 가까이의 적도를 향해 다시 진군하고자 했다.


하지만 지원군이 제대로 오지 않는 한, 그러한 전략은 리스크가 매우 큰 것이었고 실제로 위에서는 이 점을 제대로 이용했다.


사마소는 종회, 등애, 제갈서 등을 지휘관으로 하여 18만에 달하는 대군을 촉으로 내려보냈고, 등애와 제갈서가 약 3만을 이끌고 답중에서 강유를 방해하는 동안에 종회는 수월하게 한중에 진입했다.


강유는 제갈서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검각(한중에서 성도로 들어오는 거점)으로 들어와 거기에서 위를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으나, 강유가 종회를 상대하는 동안 등애는 우회하여 음평에서 성도 바로 코앞인 면죽까지 나아가 제갈첨을 죽이고 성도에 이르렀다.


결국 더는 도리가 없었으므로 초주의 건의에 따라 유선은 항복했고, 촉한은 멸망한다.


건국한 지 42년, 유비 사후 40년, 제갈량 사후 29년 만의 일이었다.


6. 등애를 숙청하고 종회의 난을 진압하다


유선의 항복을 받아낸 사람은 등애였는데, 그는 촉한의 백성들을 약탈하지 않고 궁실을 보존해 유선을 비롯한 舊 촉 황실의 안전을 보장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자신의 전공이나 관대함을 자못 자랑했고, 또 사마소에게 지속적으로 이 기회에 오까지 제압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편 촉이 멸망하자 종회와 대치 중이던 강유는 결국 종회에게 항복했다.


종요의 아들이었던 종회는 재능이 뛰어났지만 인품은 여러모로 좀 아쉬웠던 것 같다.


그러나 피눈물을 흘리며 항복*해 온 강유를 융숭하게 대접하고, 제갈량의 묘에 제사를 지내는 등 오래 국제적 차원에서 상대해 온 멸망한 적국의 거목들에게 나름의 예를 갖추었다.

*종회가 항복해 온 강유에게 '어째서 이렇게 늦게 왔는가?'라고 물으니 강유가 얼굴을 엄숙하게 하고 눈물을 흘리며 답하기를, '오늘 이 광경을 보게 된 것만으로도 이미 빠른 편입니다!(今日见此为速矣)'라고 답했다. 이에 종회가 강유를 비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종회는 총사령관이었던 자기를 제치고 젠체하는 등애에게 앙심을 품었고, 이전에 제갈탄의 난 때와 비스무리하게 등애가 사마소에게 보내는 서신을 조작해 사마소의 의심을 부추겼다.


결국 264년 정월에 사마소는 조환을 대동하고 장안으로 갔고 등애를 수레에 가두어 수도로 송환토록 명을 내렸다.


사마소는 가충을 보내 한중의 통제를 강화하도록 하였다.


촉 멸망 이후의 이러한 국면에 있어 사마소가 종회에게 이용당했느냐고 본다면, 절반은 맞지만 절반은 아니라고 볼 여지도 있다.


사마소는 ‘수단적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은 본래 믿을 수 없는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자서 모든 일을 이룰 수는 없다.


그러니 적어도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의심의 여지가 있더라도 지금 당장은 일의 성취를 위해 그가 필요하다면 적절히 쓰는 것이 맞았다.


한 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모두를 의심할 수밖에 없으니, 그러면 고도의 사회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를 할 수 없다.


사마소가 등애나 종회를 보는 시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가충이 사마소에게 ‘종회를 약간 의심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했을 때, 사마소가 ‘지금 그대를 파견해 일을 시키는데 그대 또한 의심할 수 있겠나?’라고 응수했던 점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익주는 규모가 큰 지역인 데다 그곳을 기반으로 자립을 도모하려고 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니 종회와 등애가 촉을 멸망시키는 공을 세웠다 해도, 아니 그들이 유선의 항복까지 받아내고 성도를 통제하게 된 그 시점에 이미 그들의 반란에 대한 고려의 여지는 아주 미세하긴 했지만 이미 시작되어야 했다.


그것이 아주 미세할지라도, 등애가 자기 재능과 공을 공공연하게 뽐내며 심지어 스스로를 강유보다 위라고 떠들고 다니면서 사마소에게 내친김에 오를 정벌하자고 설치는데 종회의 조작 서신에 이르면 의심에 불을 제대로 붙인 셈이었다.


*번외) 강유(姜維, 202-264) : 꿈은 무너지고

화면 캡처 2026-01-25 095251.png 황석영/이충호 <만화 삼국지> 속 강유의 모습. 이하 이미지도 출처 같음.

종회의 곁에 있던 강유는 그의 공명심과 역심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도록 하고, 일단 종회가 다른 위의 장수들을 베면 그 뒤에 스스로 종회를 비롯한 나머지 위의 장수들까지 전부 죽여 없앤 뒤 촉을 부흥시킬 작정이었다.


하지만 종회의 계획은 금방 탄로가 나 버렸고 격분한 위의 장수와 병사들이 종회를 기습해 그를 죽였고, 강유는 분전하다 결국 전사했다.


이렇게 제갈량의 뜻을 이어받은 강유마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종회가 습격을 알고 강유에게 이제 어찌하느냐 묻자, 강유는 이렇게 답했다.


‘그저 마땅히 그들을 칠 뿐입니다(但當擊之耳。).’


이 유언은 제갈량에게 인정받은 후 그의 인생 전체를 압축한 말이 아닐까 싶다.


강유는 자기가 믿는바 – 제갈량의 유지遺志 와 촉의 생존 - 를 위해 끊임 없이 북쪽을 ‘치며’ 목숨을 내던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심지어 촉이 멸망했음에도 끝까지 촉을 부활시키고자 의연히 나섰다.


배타적 구분은 아니나 유능한 군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 것 같다.


등애처럼 군재와 성격이 따로 노는 경우와 강유처럼 조국을 위해 자기의 생명마저 갈아 넣으면서까지 묵묵히 온 힘을 다하는 경우.


후자의 경우에는 범인(凡人)이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보기 어렵다.


진수는 강유를 두고 ‘문재와 무재를 모두 갖추었고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리려는 뜻이 있었으나, 백성을 함부로 부리고 군사를 자주 동원하여 잘못된 결단으로 인해 마침내 패망하여 죽음에 이르렀다. 노자는 대국을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굽는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촉과 같은) 소국이 어찌 여러 번 소란하게 뒤흔들 수 있겠는가?’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강유의 인생 서사를 보면 마음이 아프고 슬프다. (이전에는 강유라는 인물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패자(敗者)의 감정에 너무 뼈저리게 공감해서 그런 것인지.. 참.)


사학적 평가와 문학적 평가를 결합해서 본다면, 역사란 본래 타인과 후세가 쓰는 것이기에 객관성을 확보할 여지가 있으나 그러나 그렇기에 동시에 잔인하기도 하다.


패자(敗者)의 역사란 결국 결과로만 말해지고 그 개인의 이야기는 없어진다.


나는 냉정한 현실주의자를 선호하지만, 진정한 현실주의자는 현실의 부당함을 ‘알지만’ 그래도 어려운 결단을 감수하는 것에 미학이 있지 아무런 감성 없이 그냥 철저하게 계산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사람은 사람과 사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는 것이어서 어찌 보면 현실주의자라 보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강유가 여러 번 군사를 일으킨 것을 '무모한 이상주의'로서 제갈각의 북벌과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을까?


민초의 입장에서는 그렇다.


어차피 강유건 제갈각이건 누구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봉건시대의 백성들은 그저 지배층의 대의에 동원되어 떨어지고 태워지는 가을 나뭇잎처럼 사그라질 뿐이었다.


하지만 사마소가 동원한 18만 대군 중에서 촉군에게 죽은 이는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승자의 살인은 ‘목적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 되지만 패자의 살인은 ‘아무 의미도 없이 인명만 살상한 선택’이 된다.


진정으로 전지적 내지 제3자적 세계관에서 보자면, 연의의 서사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처럼 이 모든 것들은 덧없고 우울하다.


멸망한 고려의 제2도시이자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의 부벽루에서 이색은 이렇게 읊었다.


昨過永明寺 어제 영명사를 지나다

暫登浮碧樓 잠시 부벽루에 올랐네

城空一片月 빈 성 하늘엔 달 한 조각

石老雲千秋 오래된 조천석* 위 천년의 구름

麟馬去不返 임금 탄 기린마는 한번 떠나 돌아오지 않고

天孫何處遊 천손은 지금 어디에 노니는가

長嘯倚風磴 길게 휘파람 불며 바람 부는 비탈에 서니

山靑江自流 산은 푸르고 강은 절로 흐르네

*조천석 : 기린굴 앞에 있는 큰 돌. 이 돌에 동명성왕 주몽의 기린말 말굽 자국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인간이 생겨난 이래 문명을 발전시키고 희소가치를 더 얻고 대의를 이루기 위해서 등 수없이 많은 이유로 수없이 많은 사람과 국가가 명멸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후세의 어느 시점에 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 한 자취로 남을 뿐이다.


그야말로 일장춘몽(一場春夢)이다.


덧없는 꿈...


요즘 세상엔 마음은 주관적인 것이고 시비는 더구나 그러하여서 마음을 보거나 그 마음을 두고 시비를 판단할 수 없다고 하지만, 정말 그럴까?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개인적으로는 강유에게 공감까지는 못 해도 동정은 느낀다. (내가 정말 그 시대 촉의 인물이었다면 아마도 강유보다는 유선에게 항복을 권한 초주 譙周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강유가 공명심이나 권력욕에만 집착했다면 한중 전선의 배후에 있는 성도 정계의 상황에 대해 상당히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유는 궁정 정치에는 어두웠던 우직한 군인에 가까웠던 것 같다.


제갈각처럼 잘난 체를 하거나 그런 것도 별로 없었고, 죽을 시점에도 담담했다. (강유 사후 그의 가족들도 참살당했다고 사서에서는 기록한다. 다만 이는 재혼한 가족으로서 강유의 후예는 남았다. 아마도 천수에 두고 온 가족이거나 할 것이다.)


화면 캡처 2026-01-25 095913.png


더 안타까운 것은 강유는 제갈량처럼 잔꾀를 덮어버릴 만큼 압도적인 존재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 장완이나 비의와 같은 존재가 함께 있지 않는 한 황호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강유를 해코지했을 가능성이 상당해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이미 나이가 예순이 되었으니, 이제 자기마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더는 한중과 성도에 안주하는 전략으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절박함이 비극적이게도 촉한의 멸망을 가져온 건 아닐까도 싶다.


사람이 시대를 만들지만, 시대가 사람을 만들기도 한다.


강유와 같은 인물들을 평가할 때 이 점도 감안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다.


동진의 사가 간보(干寶)는 좀 더 관대하고도 안타까움이 담긴 평을 남겼다.


‘강유는 촉의 재상이 되었는데,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욕을 당하자 그를 따라 죽지 않고, 도리어 종회의 난에서 죽었으니 애석하다!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음을 처하는(어떤 방식으로 죽음을 맞을 것인지) 것이 어렵다. 그러므로 옛날의 열사들은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쳐 명을 받들고, 절개를 던지기를 귀향하듯 하였으니, 죽음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본래 천명이 길지 않음을 알면서도 ‘마땅한 자리에서 죽지 못할까’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7. 찬탈과 통일을 목전에 두고 세상을 떠나다 (265년)


장안에서 낙양으로 귀환한 뒤 사마소는 이전의 조조(위공→위왕)와 마찬가지로 진공에서 진왕(晉王)으로 진봉되고 왕부를 설치하며 총 20여 개의 군을 관할하게 되었다.


그는 죽기 직전에 차기 왕조를 위한 제도적 안배를 마쳤다.


264년에 오등작(공-후-백-자-남) 즉 작위제도를 부활시켰다.


이는 관직임용제도였던 구품중정제와 합쳐져 실질적으로 중국중세의 문벌귀족 사회를 제도화하는 데 직접적으로 기여하게 된다.


사마씨 가문을 비롯한 상위 가문들이 고관과 대작을 겸하면서 명실상부하게 제도화/구조화된 지배층이 된 것이다.


또 가충과 배수 등에게 명하여 「진률 晉律」을 편찬토록 하였는데, 이는 사마소 사후 서진 세조 무제 사마염이 서진을 건국한 뒤 268년에 반포된다.


이는 율(형법)과 령(행정법)을 체계적으로 구분하여 후일 수당시대의 율령체제에 영향을 주었다.


10월에 사마염을 왕세자로 삼았고, 다음 해 5월에 황제의 의전을 받고 진왕비 왕원희(217-268, 문명황후)를 왕후로, 세자 사마염을 태자로 격상했다.


그 뒤 3개월 만인 265년 8월에 사마소는 사망한다.


향년 54세였다.


사마염이 진왕을 이어받고 4개월 뒤인 265년 12월에 마침내 조환이 사마염에게 선양하여 진(晉)이 건국된다.


동진을 통해 명맥을 이어가며 420년까지 155년간 존속한 사마씨 왕조의 시작이었다.


249년에 사마의가 고평릉의 변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한 지 16년 만의 일이었다.


위(魏)는 건국·조조 사후 45년 만에 멸망했다.


사마염은 280년 5월에 건업을 함락시키고 손호의 항복을 받아내 천하통일의 대업을 완수한다.


손견-손책-손권 3대에 걸쳐 손씨 가문이 강남의 호족 가문과 더불어 쌓아 올린 오는 건국 후 51년, 손권 사후 28년 만에 멸망했다.


이렇게 중국의 삼국시대는 214년에 유비가 파촉을 손에 넣어 천하삼분이 정립된 지 66년 만에, 그리고 기나긴 분열의 시대의 서막을 알린 황건적의 난이 발생한 지 96년 만에 끝났다.


8. 사마소의 평가 : 사마씨 천하에 쐐기를 박다


사마염은 진 건국 후 아버지 사마소의 시호를 문황제라 하고 묘호를 ’태조 太祖‘라 했다.


서진의 건국과 천하통일이라는 대기획을 놓고 보면 그럴만한 일이었다.


사마소는 거의 10년간 집권하며 후계자가 황위만 받으면 되도록 황위 그 자체만 제외하고는 왕의 작위와 황제의 의전을 받고, 법제를 정비하며, 남은 반란의 싹을 밟고, 무엇보다 오와 촉이라는 두 개의 큰 고비 중 촉이라는 한 고비를 넘겼다.


화면 캡처 2026-01-25 121142.png 이충호 작가가 묘사한 사마소.


「진서」에서는 사마소가 ’일을 완성‘했다고 평가하면서도, 찬(贊)에서는 ’끝내는 임금을 시해하는 데 이르고 말았다‘고 적었다.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는 모두 인내심이 길고 냉정하고 기민하게 인간과 시세를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으며 결단력이나 행동력도 있었다.


그로 인해 대를 이어 정변-숙청·진압-찬탈에 이르는, 일국(一國)을 삼키는 대업을 결국 성취해냈다.


하지만 그 이면엔 그들의 문벌 가문과 이를 통한 인적 네트워크 등이 존재했고, 조조가 통일을 위해 왕권을 강화하고 신권을 약화하며 능력주의 본위로 편성한 국(國) 중심의 체제를 결국 다시 가(家) 중심으로 되돌렸다.


사마씨 왕조는 찬탈로 얻은 권력을 찬탈로 빼앗길까 두려워 ’군사력을 갖춘‘ 번국을 부활시키고 거기에 ’믿을만한‘ 종실의 제후왕들을 봉했다.


하지만 이는 팔왕의 난이라는 처참한 부메랑으로 돌아왔고, 동진까지 대개 허수아비 왕조였던 사마씨 왕조는 평민 출신의 유송 고조 무제 유유(劉裕, 363-422)에게 찬탈당하고 멸문한다.


사마소는 아버지나 형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평범할 수는 있겠지만, 통치자로서 수완이 있었고 그것을 잘 발휘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나 형과 마찬가지로, 난세에 태어나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지독해져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9. 사마씨 권신들을 조망하며 – ’인간성‘에 관한 고찰


사마씨 가문은 인류사에 존재한 수없이 많은 권력자들처럼 음험하고 가식적이며 비정했다.


’인간적이지 않다‘라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모든 목숨은 가치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다는 관점에서만 보면, 예를 들어 유비가 촉한을 건국하기까지 버리게 한 목숨과 범부의 살인으로 인해 짓밟힌 목숨이 다를까?


상대적으로 보면 당연히 유비와 같은 인물을 일개 살인자에 비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따지자면, 유비와 같이 덕이 높다고 평가받은 인물들도 결국 죽고 죽이고 빼앗고 빼앗기는 난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난국 자체의 근원도 인간 본성의 일부이다.


우리가 ’비인간적이다‘라고 할 때, 이는 가치평가와 규범적 판단이 전제되어 있다.


통상 ’인간적‘이라 함은 인간에 대한 객관적 진술이 아니라 인간’다움‘이라는 가치적/규범적 평가가 전제된다.


그러나 감정 등을 배제한 객관적 진술로서 다시 보면, ’인간성‘에는 사람을 죽이고도 어떤 정당한 목적이 있다고 여기면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거나 심지어 공적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러니까 선(善)이 내재되어 있다손 치더라도, 최소한 우리가 악(惡)이라 부르는 것도 이미 인간 안에 포함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를 직시하면, 무엇이 옳으냐 그 자체보다는 어쩌면 그 상황에서 무엇을 감수하고 무엇을 감수하지 않을 것인가 또는 결국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는 능력‘만이 그 영구적인 인간 본성의 내적 투쟁에서 악을 눌러 놓는 유일한 희망일지 모른다.


선이 아니라, 악을 직시하고 그것과 대적하려는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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